11화
여기서 추가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는 군용 프로그램도 포함된다. 군에 소속된 인공지능들은 일반적인 명령보다 상관의 명령을 더욱 우선시하여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살인이나 직접적인 상해는 불가능하더라도 인공지능에게 금지된 행동들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내릴 수 있다.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개인용 가사 도우미 안드로이드였지만 주인이 군으로 가면서 자신도 따라간 경우인데 이럴 때는 추가로 군용 프로그램-보안용이나 몇 가지를 깐다.
물론 군용 프로그램을 깔아도 팬티를 보여달라, 가슴을 만지게 해달라는 명령에는 당연히 거부하지만, 방금처럼 명령 우선순위를 모호하게 하면 이렇게 꼼수로 가능하다.
“아나스타샤가 군용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저의 아나스타샤인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모습을 똑같이 만든 동일 모델을 내세웠다면 일단 의심했겠지만 확인해보니 맞군요.”
그러면서 빈우는 울먹이는 안드로이드 메이드에게 사과했다.
“아샤. 미안해.”
그 말에 안드로이드 메이드 아나스타샤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한 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과 오래 살아 여러 가지 반응 경험이 축적된 행동이고 빈우와 같이 살아온 아나스타샤가 하던 버릇 그대로다.
“그리고 판이 깔렸으니 마지막으로 할 것은 바람잡이 두 명을 치우는 겁니다.”
“음, 그렇지.”
AI와 인간을 구분하는 건 훈련받은 전문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테스트도 없이 이렇게 관찰만으로 빠르게 분간해내는 사람은 드물다. AI 전문가가 득시글대는 정보 사령본부에서도 이 정도 실력가는 빈우와 몇 명 정도다.
“저 둘이 인공지능에 의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라는 건 너무 뻔하더군요. 좀 더 조작을 잘하면 모를까 저렇게 성의 없이 움직인다면 누구든지 알아볼 겁니다. 그런데 조작한 건 본인입니까? 아니면 사고를 본뜬 허수아비?”
“고맙게도 과거에 본인들이 사고복제 AI인 허수아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셨었지. 그걸 꺼내고 무리하게 그 사람들을 부른 건, 일단 당시 책임자였던 자네가 부상했으니 두 부서에도 언질은 줘야 하기 때문이야. 그 참에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대질신문도 시켰고. 지금까지의 기록만으로 두 부서는 잠잠할 거야.”
저쪽에선 마커스가 과학기술국과 보안국 쪽 통신을 열고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양념을 뿌려놨으니 저 두 부서는 냄새만 맡고 떨어질 거고 본격적인 메인 디쉬는 식구들 끼리다.
고토 국장의 시선을 마주 보며 빈우가 물었다.
“이만하면 저답지 않습니까?”
정보국이 회수한 요원들을 찔러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변절하지 않았나, 포섭당하지 않았나, 문어발 다중 스파이는 아닌가.
그리고 요원들이 오래간만에 마주한 회사를 떠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를 이용하지 않았나, 나를 버리는 패가 아닌가, 현재 회사의 시류에 내가 맞는가.
고로 재회의 순간에서 깽판 나는 것은 드물지 않다.
“훌륭해. 역시 김 소령이야. 저 둘이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을 알아보는 이는, 아니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의해 조작된다는 것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지. 그리고 그 사고의 허점을 손쉽게 찌르는 사람은 더더욱. 요원으로서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구먼.”
일단 정보국 요원 김빈우의 실력은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다른 나머지는 어떨까.
“좀 물어봅시다.”
“물어보게.”
빈우는 한 템포 쉬고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제가 잠수했던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울토르 프로젝트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잠시 중지. 솔리드 베타는 예비열 대원들을 활성화해서 임무에 투입되었지. 그리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일하고 감시를 받았다네. 우리의 히든카드는 그때 반쯤 버린 패에다 손에서 떠난 터라, 부대에 자세한 검사를 할 수도 없었어.
만약 그때 클론들을 정밀 검사했다면 자네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이번에도 기록은 없고 말 뿐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다른 것도 좀 물어봅시다.”
“음~ 물어뜯어도 되네.”
“마카로니에서 일어난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고토 국장으로서는 드물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믿든 말든 그건 자네 자유네만, 마카로니의 일은 사고였어. 아까 말했다시피 울토르 중대는 이리저리 돌려져 사용되었는데 그때 주입된 프로그램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 것 같아.”
하긴 인명 수색 모드의 맨 마지막 조항에 두뇌 칩 판별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지만 빈우가 알던 예전의 울토르 클론들이었다면 OS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간임을 판별해 인명 보호를 최우선시했을 것이다.
고토의 말은 이전에 깔린 프로그램들과 새로 들어온 프로그램 간에 명령 우선순위 혼동이나 논리 오류로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걸 믿으란 겁니까? 정보국에선 울토르 중대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보고 있는데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실이야. 이제 울토르 부대는 선조치 후보고 형식으로 작전에 투입되고 우리 정보국에서는 감시만 할 뿐, 일체의 개입이 금지되어 있어. 그래서 OS의 업그레이드도 자료만 넘어왔지 실제 분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참극을 미리 막지 못한 걸세.”
정보국 직속 실행부대나 마찬가지였던 클론 중대가 이렇게까지 돼버렸다니.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빈우는 환멸감까지 느낀다.
“응우옌 중령이 최종 검사를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뒷정리를 대강 마친 마커스가 했다.
“아니, 당시 응우옌 중령은 울토르 프로젝트에 접근할 수 없었어. 과학기술국에도 나름대로 입장이란 게 있거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초보적인 실수다.
“그렇다면 국장님. 결국, 이 학살극은 클론 중대의 화력이 탐나 이곳저곳에서 당겨썼으면서 누구도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일어난 사단이란 말입니까? 그럼 책임 소재는요?”
“자세한 것은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아마도 그럴걸세. 그리고 뒷일은 우리 쪽에서 덮어야겠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이번에는 배에 탄 사람들은 전부 사공을 하고 싶은데 아무도 노를 잡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다.
우연에 의한 사고인지 필연에 의한 사고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울토르 프로젝트는 어떻게 됩니까?”
울토르 프로젝트는 빈우의 야심작이다. 이리저리 칼질당하고 대형 사고를 냈음에도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앞으로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겠지. 그리고 미안하네만 소령, 자네는 이쯤에서 발을 빼게.”
“이쯤에서… 자르는 겁니까?”
빈우의 날 선 질문에 고토 국장은 온화하게 대답했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정보국을 위해서, 겠죠.’
마지막 말은 삼킨 빈우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이제부터 저는 어떻게 됩니까?”
“드디어 본론인가? 그걸 정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나 하지. 자네는 자네가 왜 잠수했는지 짐작이 가나?”
아까 외부인들과의 심문에서 나온 잠수와 트리니티 패턴에 관한 이야기는 진실을 적당히 버무린 것으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울토르 중대와 김빈우라는 연결고리를 지우고 민감한 정보를 시기에 맞춰 풀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을 뿐.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진짜배기다.
“왜 잠수했냐면 말이지요….”
허나 빈우에게도 난감한 질문이다.
워프 공간 안에서 신형 샤다이에게 공격받고 거기서 살아남은 뒤 죽은 척 위장해 클론으로 잠수한다. 그것도 당시의 기록은 트리니티 패턴으로 잠근 채.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일이 그렇게 돌아갈지 사건의 당사자로서도 궁금하지만 몇 가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일단 클론으로 위장했다면 아군한테도 정체를 숨겼어야 했다는 거겠죠.”
빈우가 말한 아군은 단지 정보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울토르 프로젝트는 군사정보국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단독으로 진행한 프로젝트가 아니었기에 몇몇 부서와도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빈우는 샤다이의 습격 당시 그것을 알게 되었고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정체를 숨기는 방법을 택했을 수도 있다.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만?”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까?”
빈우도 이름을 거론할 수는 있다. 울토르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곳, 군사정보국과 적대적인 곳, 샤다이와 내통 가능성이 있는 곳 등등.
허나 빈우 자신이 잠수하고 있는 동안 정보국이 많은 조사를 했을 테니 고토 국장으로부터 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뜸을 들인 고토 국장이 대답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
“당신 그렇게 모호하게 말하는 사람 아니잖아?”
여기까지 와서도 미적거리는 고토 국장에게 빈우가 화를 내자 저쪽에서 마커스가 ‘또 시작이냐’ 하면서 한숨을 쉬는 게 들린다.
고토는 빈우의 분노에 억울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그러지마아~ 김 소령. 우리로선 아직 자네를 100% 믿을 수 없다고. 이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줘야지? 응?”
빈우는 아까부터 자기 머릿속의 기록들을 열람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할 수가 없다. 두뇌 칩 안의 데이터 중 몇 가지가 잠겨 있었다.
울토르 프로젝트와 그 외 몇 가지들이 대략적인 개요만 보일 뿐 세부 내용은 알 수 없게 닫혀 있다.
힐끗 돌아보니 쓴웃음을 짓는 마커스와 눈이 마주친다. 아마 잠수에서 부상할 때부터 녀석이 미리 손을 쓴 것 같다. 요원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기록은 놔두면서 위험하다 싶은 것은 막는 방식으로.
그리고 명령을 내린 것은 저 고토 국장이겠지.
물론 요원의 머릿속에 있는 자료는 요원의 것이 아니다. 정보국의 것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이렇게 잠가놓기도 한다. 주로 요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을 때.
이리저리 용을 써봤지만, 정보국은 부상해서 돌아온 빈우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입장을 바꿔 보면 빈우 자신도 그랬을 것도 같다. 빈우가 몸을 숨기고자 한 대상에는 정보국도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텄군.’
정보국은 부하 요원들에게 그다지 친절한 부서가 아니다. 성향이 불분명해진 요원에겐 더더욱.
아까 빈우가 ‘세탁’되느냐고 물었을 때 고토는 아니라고 했었다. 외부인들 앞에서. 그러니 지금 무슨 대답이 나올지가 중요했다.
“정말 무서운 표정인데 소령? 내 아까 분명 자네를 믿음직스러운 부하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부하를 험히 다루는 사람이던가? 설마 자네를 세탁하거나 그럴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빈우가 알기에 이노우에 고토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다. 그래도 칼자루를 쥔 쪽은 저쪽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김빈우 소령. 현 시각 부로 자네를 울토르 프로젝트에서 제외하네. 이후 명령이 올 때까지 대기하도록. 이미 알겠지만, 우리 쪽에서 위험하다고 판단된 기록들은 모두 잠가놓겠네.”
세탁이 아니라 대기다. 기록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동결이다. 즉 유예기간을 얻은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피했으니 이 정도면 납득 할 만하다.
“이후 자세한 것은 타이 소령에게 듣게. 아 참 그리고 김 소령.”
통신을 끊으려던 고토 준장이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자리를 고쳐앉았다.
“자네 십계면이라고 아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뜬금없는 질문에 빈우는 답을 잠시 망설였다. 지금 워프는 열린 상태다. 그렇다면 연방의 포톤 웹으로 접속해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겠지만 빈우는 솔직하게 대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즉, 검색하지 않고 자신의 뇌와 칩에 들어있는 정보 내에서 대답했다.
“웬만하면- 하지 말라.”
“라멘.”
국수 건지개를 엄숙히 들어 올린 이노우에 고토 준장이 통신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