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빈우는 식당 의자를 끌어와 거기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런 그에게 마커스가 다가와 물을 건네준다.
“기록 건은 미안하게 됐다.”
“미안하긴, 신경 쓰지 마. 우린 원래 이렇게 살잖아.”
빈우는 자신의 머릿속과 칩의 내용을 조작당했지만 불쾌함은 그다지 없었다. 이런 것쯤은 감수하고 사는 것이 정보국의 삶이다. 오히려 자신의 친우인 마커스가 해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때 다다다, 뛰는 소리가 나더니 아나스타샤가 빈우에게 달려와 와락 껴안았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빈우는 울면서 자신을 끌어안는 그녀의 볼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사각거리는 금발 귀밑털에 말랑거리는 볼살. 빈우로서는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감촉이다.
“울지마, 아샤.”
“하, 하지만. 하지만, 일 년 반이에요. 일 년 반 만에 주인님이 돌아오신 거라구요.”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 하지만 다시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설마 그동안 계속 작동하고 있었니?”
이 불쌍한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우느라고 대답 대신 눈물을 흩날리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마커스가 대답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사건 뒤에 회수되어 조사받았다가 바로 풀려났어. 샤다이의 공격 때엔 네 개인실에서 대기하고만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건 없었지.
그런데 회수되고 나서 사정을 듣고 나더니 솔리드 베타에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더라고. 좀 생뚱맞은 질문이라 혹시나 해서 재검사를 해봤는데 두 번째 검사에도 달리 주목할 만한 건 없었어.“
아나스타샤는 주인을 잃은 뒤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을, 빈우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랬구나.”
빈우는 이제야 울음을 그친 충성스러운 메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년 시절부터 빈우를 돌봐온 아나스타샤는 그의 보모이자 누나였고 부모였다.
“뭐 빈우 너의 부재 시 네 개인 재산관리자로 쓰이기도 했고 정보국에선 정보 백업용으로도 활용했던 군용 안드로이드니까 절차나 보안상으론 문제는 없고, 해서 그냥 함선 관리용으로 돌렸지. 밖으로 나가 봐야 동결 상태로 창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일 테니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아나스타샤는 피부와 머릿결 등이 많이 상해 있었다. 생체 안드로이드인 그녀에게 척박한 군함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타이 소령님께서 저를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보급 물자에도 제 전용 소모품들도 넣어 주시고 가끔 연락도 해주셨어요. 소령님께서도 그때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절 도와주신다고 더 힘드셨을 거예요.”
상식적으론-정보국의 상식이라면-관리자인 빈우가 작전 중 실종이 된 다음에는 아나스타샤도 어떻게든 처분되었을 것이다. 마커스 말대로 정지 상태로 동결시키는 것은 양반이고, 기록을 지우고 재가공을 해서 사회로 방출하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 자체를 말소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 삭막한 정보국을 상대로 안드로이드가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혔을 테지만 마커스는 친구의 가족이 하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것도 위험한 상황에서 꽤 무리해가면서.
“고맙다. 마커스.”
빈우의 감사에 마커스는 말없이 피식 웃을 뿐이다. 반대의 경우엔 빈우 역시 그렇게 할 것을 알고 있기에.
하루하루 피 말리는 정보국의 삶에서 동기였던 빈우와 마커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사관학교 이후부터 이어져 온 둘의 유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제가… 저한테 권한만 있었더라면 주인님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해요. 제가 검사만 했어도 주인님을 찾을 수 있었는데….”
아나스타샤로서는 같은 배 안에서 자신의 주인을 두고도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군용 프로그램이 주입된 그녀는 주인인 빈우나 명령권자의 지시 없이는 정해진 행동 외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가 클론들의 수면기들을 직접 하나씩 뒤져보려면 누군가가 명령하거나 그녀의 자유행동을 허락해 주었어야 했다.
마커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아샤는 네 방과 전투 정보실을 오가며 이런저런 잡무를 하는 게 고작이었어. 나도 그 이상의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고.”
그러고는 다시 사무용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빈우를 자기 등 뒤로 숨기려 했다.
마커스가 앞으로 할 일이 자신의 주인에게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귀여워.’
어릴 때부터 봐왔던 아나스타샤의 등이다. 사랑스럽고 든든했던 그녀의 등이 약하고 귀엽게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괜찮아, 아샤. 비켜줘. 할 일은 해야지.”
아나스타샤는 주인의 말에 겁먹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비켜섰다.
이제 마커스는 빈우의 두뇌 칩을 최종 조정할 것이다. 정보국의 목적에 알맞게. 고토 국장이 판단하고 내린 명령을 따라서.
“난 언제 복귀할 수 있냐?”
빈우가 자기 두뇌 칩의 접속 권한을 넘겨주며 다시 정보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의 반응으로 미뤄보건대 그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음, 아마 당분간은 안될걸. 알만한 사람들한테- 라지만 넌 노출되었으니까.”
첩보 계열에 일하는 요원들은 보안에 민감하다. 그래서 정체가 드러나거나 보안 쪽에 문제가 있는 요원들은 철저히 신분 세탁을 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난다.
빈우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마커스의 말로 보아 샤다이의 습격 이후 울토르 중대가 대대적인 조사를 받게 되면서 덩달아 자신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 흘러갔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마커스 말대로 알만한 사람들에게만, 이겠지마는.
“이제 트리니티 패턴으로 잠겨진 ‘그’ 정보는 해석이 되어도 빈우 네가 접근할 수 없을 거야. 암호가 풀리면 자동으로 다른 방식으로 잠길 거고 우리 쪽으로 넘겨진 다음에는 삭제되겠지.”
빈우가 목숨을 걸고 구하고 숨긴 자료는 이제 당사자가 볼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정보국과 연방을 위해 했던 일임이 분명할 텐데도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마커스가 이번에 할 일은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야, 마커스. 그거 말고 내가 가진 기록 더 잠글 거 있냐?”
“응? 아니, 잠글 건 이미 다 잠갔어. 오히려 지금은 잠그는 게 아니라 색인 남기는 거야. 나중에 위화감 느끼지 말라고.”
마커스의 말대로 장시간의 기록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다면 해당 요원은 기록의 단절에 의한 정신적인 부작용을 겪는다. 해서 이번처럼 이러저러한 기록은 어떤 이유로 열람이 금지된다는 식으로 각인시켜 놓으면 요원들은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한다.
기억은 자신이 살아온 증거이며 경험이다. 했던 일과 느꼈던 감정이 모여 앞으로의 자아를 만드는데 하나하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정보국에서 겪었던 것들은 감정이 배제된 기록으로만 남는다. 풍화되거나 변질하는 기억과는 달리 기록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은 일절 저장되지 않을 뿐이다.
만약 과거의 기록을 조회했을 때 본인에게 기억이 있다면 다시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때의 자신을 다시 되새길 수 있다.
그러나 애초 기억을 할 수 없는 정보부 요원들은 자신의 기록이 마치 제삼자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덕분에 요원들은 자신의 기록이 조작당해도 큰 거부감을 느끼진 않는다. 조금 적게 느낄 뿐.
“자, 이제 완료. 이제는 걱정하지마, 아나스타샤.”
마커스가 패드를 말아 넣고 자신도 의자를 가져와 마주 앉았다. 평소보다 조금 가까이. 빈우의 경험상 마커스의 이런 행동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개인적인 대화를 할 때 하던 것이다.
“아샤, 뭐 먹을 것 좀 있어?”
“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재빨리 식당의 조리시설 쪽으로 몸을 돌리는 아나스타샤의 등 뒤로 빈우가 한 마디 더 던졌다.
“침묵 모드 사용.”
이제 아나스타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다. 그리고 마커스도 아까 셋만 남았을 때부터 이 2식당에서 도청에 대한 대비를 여기저기 해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린 처음에 마카로니 학살에 네가 관여된 게 아닐까 의심했었어.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거지.”
뜬금없지만 어찌 보면 합리적이다. 울토르 중대의 관리자에다 인공 지능들을 후려치는데 도가 튼 빈우다. 권한이나 능력은 차고 넘친다.
빈우도 그건 잘 알고 있기에 도로 질문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빈우로서는 그런 걸 할 이유가 없다. 아직은. 다만 워프 공간에서 있었던 일이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할 이유는 없지만, 능력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원인이 대강 밝혀졌으니까 크게 걱정하지는 마. 서두른 것도 너나 우리의 결백을 먼저 밝히기 위한 것이었거든.”
그때 아나스타샤가 쟁반에 뭔가를 들고 왔다. 김이 나는 블랙커피와 빵, 그리고 발라먹을 꿀과 버터인데 이것들은 예전부터 빈우와 마커스가 즐겨 먹었던 간식이다.
두 사람의 옆에 탁자를 펴고 그 위에 쟁반을 올린 아나스타샤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가만히 기다렸다.
마커스는 커피잔을 들어 향을 맡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징조를 보였을 때 정보국은 뒤집혔어. 죽었던 거로 생각된 요원이 살아서 잠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울토르 프로젝트는 거의 정보국 손을 떠난 상태라 우리는 감시만 할 뿐, 행동할 수는 없었어. 게다가 타부서에 알리긴 아직 이른 감이 있어서 좀 더 지켜보기로 한 거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마커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때 너 정체 숨긴다고 고생 좀 했다. 이젠 사고가 터졌으니 숨겼던 이유를 둘러대야 하겠지만.”
그러면서 마커스는 아나스타샤를 힐긋 쳐다봤다.
“아나스타샤한테도 미안하지만, 비밀로 했었지. 아까도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어. 그래서 강제 집행으로 식당에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한테 정말 미안해.”
“신경 쓰지 마. 그런데 말이야….”
빈우는 빵을 들어 잘린 면에 꿀과 버터를 발랐다. 칼로리 만땅인 군용 빵에 합성 꿀, 합성 버터다.
“보안국과 기술국은 어떻게 됐냐?”
연방군 정보사령본부에는 네 개의 부서가 있다. 정보분석국, 연방군사정보국, 과학기술국, 보안국.
그중 과학기술국과 보안국은 정보국 다음으로 울토르 중대의 창설에 가장 많이 기여한 부서다. 기술국은 클론 제조에, 보안국은 정보국을 내부 감사 하는 척하며 거짓 정보를 밖으로 흘리는 것으로 타 부서를 견제했다.
“샤다이하고 워프에서 마주쳤을 때 다 들켜서 그때 목줄 하나씩 달렸다. 세 부서 다 따로따로. 덕분에 주인들이 끄는 대로 서로 견제하고 있었지.”
“허이구.”
애초에 그다지 사이가 좋은 부서들은 아니었다. 각각 정보사령본부 휘하라는 명목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서로 눈을 부라리던 곳이다.
그런데 외부의 압력으로 서로 물어뜯게 되었다니 꽤 볼만했을 거다.
“그리고 이번에 마카로니 건으로 한 번 더 뒤집힐 거다. 이번엔 목줄 쥔 사람들이.”
“허이구 시벌.”
그때 울토르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면서 안전장치란 명목으로 여기저기 목줄이 채워졌으니 책임은 목줄을 쥔 사람들이 져야 하겠지. 더군다나 울토르 중대는 정보국 소속에서 벗어나 여러 곳을 전전했다고 하고 사고의 원인도 복잡하게 깔린 보조 AI나 전투 OS 탓이란 게 밝혀지면 책임 소재가 꽤 복잡해질 거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마카로니 학살 사건이 정보국 관할 하에서 일어났다면 고토나 마커스, 빈우를 비롯해 책임자들은 전부 모가지 되었을 테니. 물리적으로.
“새옹지마, 로 봐야 하나.”
“뭐, 그렇게 됐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바라보던 마커스가 질문을 하나 했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나?”
“뭐? 무슨 말… 어?”
마커스와 했던 대화 기록을 다시 불려 오려고 했을 때 빈우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기억이 난다. 기억을 할 수 있다.
정보국에 들어오기 전처럼. 잠수하고 뇌를 위장했을 때처럼.
“야, 마커스 이거 어떻게 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