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기억을 할 수 없는 정보국 요원이 기억할 수 있는 경우는 몇 가지 없다. 대표적인 것은 잠수해서 신분을 감추거나 외부 파견 요원으로 빠져나가는 경우인데 이때는 외부인들과 접촉하면서 살아갈 때 자신이나 주변에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취한다.
아니나 다를까,
“응, 너 외부 파견으로 돌리기로 결정 났어.”
마커스 녀석이 쐐기를 박는다.
외부 파견의 경우는 잠수처럼 인격을 감추지는 않지만, 요원들의 머릿속에 중요 기록은 지워지고 보안 등급은 팍팍 떨어지며, 위기 상황 시 버려질 확률은 팍팍 올라간다.
약간 일그러진 빈우의 얼굴을 살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마커스가 다시 말했다.
“왜 그래? 너도 이 정도는 짐작했잖아?”
물론 빈우도 짐작했다. 중요한 정보를 가졌지만 찜찜한 전력을 가진 요원이라면 관리를 하면서 밖으로 돌리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빈우는 자신을 외부로 돌리는 정보국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게 아니다. 과거의 자신이 과연 어떻게 현재 상황을 설계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2217년 12월 27일 현재의 김빈우가 이 상황을 예상했다면 2216년 6월 8일 잠수하면서 트리니티 패턴을 설정했던 과거의 김빈우 역시 이 상황을 예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대로 순순히 짜인 판에서 춤추기만 해도 머릿속의 트리니티 암호는 풀릴 것이다.
그다음에는 아까 마커스에게 조작 받은 대로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했던 정보는 다시 암호화된 뒤 정보국으로 이동될 것이고 결국에는 빈우 자신은 결코 알 수 없는 정보가 될 것이다.
연방군사정보국 요원인 빈우는 어디까지나 연방과 정보국을 위해서 일한다. 일에 개인적인 감정이 끼어드는 것은 최대한 배제한다지만 그래도 목숨을 바쳤던 일에서 소외된다니 찝찝함과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외부 파견이라….”
빈우는 혼잣말을 하며 과거의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순순히 따르며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자면 정보가 더 필요하다.
“이제 나 어떻게 되는 거냐?”
아까 빈우는 울토르 프로젝트에서 제외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외부자인 빈우와 아나스타샤는 연락정에 태워 따로 보내는 것이 올바른 취급 방법이다.
“어, 이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간 다음 거기서 새로운 명령을 받으면 돼.”
“뭐? 간다고?”
의외의 말에 빈우는 놀랐지만 마커스는 대수롭잖게 반응했다.
“그래. 목적지는 말해 줄 수 없어. 도착하면 너도 알겠지만.”
어딜 가냐고 물은 게 아니라 뭘 타고 가냐고 물은 거다. 약간 당황해서 말이 헛나와서 그렇지.
대가리가 맛이 가서 개척 행성의 민간인들을 깡그리 죽여버린 클론들과 같은 배를 탄다는 것은 스릴 넘치는 일이지만 그래도 하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배, 솔리드 베타는 울토르 프로젝트의 최중요 시설 중 하나란 점이다. 정보국 내에서도 아는 이는 극히 드물고 현재의 빈우로서는 접근 권한조차 없다. 당장 쫓겨나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타고 간다니.
빈우는 말없이 마커스를 보며 집게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이 배, 솔리드 베타를. 그걸 보고 마커스도 눈치챘는지 버터 바르던 빵을 내려놓고 해명했다.
“지금 클론 중대는 전원 강제 수면 상태로 수면기에 감금되어 있고 솔리드 베타는 추진기가 정지된 상태로 다른 배들에게 예인되어 끌려가는 중이야. 마카로니에서 대형 사고를 쳤으니 말이야.”
하기야 개척 행성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고를 쳤으니, 클론 중대원들은 모두 동결 상태일 것이고 솔리드 베타는 주위에 감시하는 배들로 둘러싸여 끌려가는 중이겠지.
그러면서 마커스는 식당의 대형 스크린에 주변 상황을 띄워주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동형의 페가수스급 상륙함 두 척이 솔리드 베타를 사이에 끼고 이동하는 중이다. 동형함이니 아마 저 안에도 클론들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부대는 어떨까? 헌데 사고 전력이 있는 클론들을 다시 쓸까?
그러고 보니 현재 이 배 솔리드 베타에는 울토르 프로젝트의 주요인물들이 타고 있는 셈이다. 배 옆구리에 어뢰 몇 발만 쑤셔 넣으면 세상이 조용하고 깔끔해진다.
‘좀 너무 나갔나.’
빈우는 쓸데없이 가지를 치는 생각을 잘랐다.
그래, 마커스의 설명은 바른말이다. 그런데 척하면 척하는 놈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 배 타고 가냐?”
“안 그래도 나 혼자서 일손 모자란 데 현지 요원의 협조란 형식으로 좀 도와주라.”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지?”
빈우가 빵을 잡아 던지자 마커스는 그걸 받아 채며 낄낄거린다. 그런 녀석의 장난질 덕분에 빈우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너랑 아나스타샤를 솔리드 베타에 태우라는 건 국장님의 지시였어.”
“…이 양반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자기 입으로 빈우를 프로젝트에서 제외한다고 해놓고서는 프로젝트의 핵심시설에 콕 박아놓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한때 네가 프로젝트 현장 책임자여서 이 배에 태운 건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런 건 마커스도 잘 알고 있었다. 빈우는 자기가 이 배 안에서 어디까지 출입할 수 있는지 보안 등급을 조회해 보았다.
‘꽤 많이 막아 놨는데….’
솔리드 베타 안에서 빈우가 갈 수 있는 곳은 얼마 없다. 탑승은 허락하되 갈 수 있는 구역은 제한해 놓은 것 같은데 왠지 지정된 구역들이 눈에 익다.
‘이거 클론들 행동 범위잖아.’
치밀하다고 해야 하나 허술하다고 해야 하나, 빈우가 갈 수 있는 곳은 과거 클론으로 잠수했던 시절 갈 수 있었던 곳이다. 끽해야 수면실, 식당, 격납고, 의무실, 훈련실 등등. 아마 고토 국장은 빈우가 과거 행동 영역에서 서성거리며 뭔가 건지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아니면 숨긴 것을 찾거나.
그게 뭐든 트리니티 패턴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거라면 대박일 테지.
아닌 게 아니라 빈우도 집히는 게 있긴 했다.
“그러니까 깔아놓은 판 위에서 춤추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새로운 명령을 받고 제 갈 길 가라는 얘기네?”
“떠나기 전까진 밥값 하란 얘기지. 자.”
마커스가 반으로 잘라 건네주는 빵을 받은 빈우는 한입 베어 물고 접시에 내려놓은 다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침묵 모드 해제.”
그제야 옆에서 조용히 시중들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타이 소령님, 커피 더 드릴까요?”
“아니, 난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지. 둘이서 못다 한 얘기라도 하라고. 잘 먹었어 아나스타샤.”
볼일이 끝난 마커스는 둘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주는 건지 남은 커피를 후룩 마셔버리곤 의자에서 일어섰다.
“방은 예전에 쓰던 거 그대로 쓰고, 일정표 보내줄 테니까 나중에 확인해 봐.”
“그래.”
마커스가 식당을 나가자 아나스타샤가 빈우의 무릎에 앉더니 자신의 주인을 가슴으로 와락 품어 안았다.
“주인님….”
빈우는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음에 나올 말을 알 수 있었다.
“인제 그만 해요, 주인님.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요.”
아나스타샤는 빈우가 하는 일을 싫어했다. 물론 군인은 위험하다. 무력을 다루는 집단인 만큼 폭력에 노출되는 빈도도 높고, 현재 연방은 적이 많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예전처럼 보리밭을 일구며 사는 건 어때요? 제가 관리를 잘해서 농장도 많이 커졌어요. 농사가 싫으시다면 다른 일도 있잖아요.”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아와 친숙했던 그녀를 업무보조용으로 썼던 게 빈우의 실수였다면 실수였다.
빈우의 부모로서, 누이로서, 보호자로서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군에 입대할 때 같이 따라가고자 했고 빈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때는 둘 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같이 살아온 동거 AI 로봇이나 안드로이드가 주인이 성인이 되어서도 업무를 도와주며 생활하는 것은 연방에서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총 만이 아니라 등 뒤의 칼도 신경 써야 하는 정보국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아나스타샤가 일반 가사용이었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빈우가 밖에서 힘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를 웃으며 맞이하고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업무를 돕기 위해 군용 보조 프로그램을 받고 빈우가 하는 일을 지켜봐 온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키웠고 같이 커온 주인이 스스로가 믿는 연방의 질서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 법과 도덕의 경계 선상에서 줄타기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결과물로 인해 스스로 환멸하고 고통받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정작 아나샤타샤는 중요한 일은 알지 못하고 가끔 빈우가 기억을 지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그런다. 난 괜찮아, 아샤.”
울먹이는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마 부근에 희미한 흉터가 만져진다. 생체부품이 많은 그녀였기에 남아있는 흉터다. 주인인 빈우를 말리지 못해 괴롭게 했다고 생각한 안드로이드 메이드가 스스로를 책망하며 제발 벌을 달라고 애걸할 때 생겼던 흉터다. 그리고 그런 흉터는 아직 몇 군데 더 있다. 그녀의 몸에도, 정신에도.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빈우는 가슴이 쓰렸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외부 파견이니까…. 이번 임무가 끝나면 생각해 보자.”
“…예, 주인님.”
언제나처럼 확답 없이 얼버무리며 빈우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나스타샤는 눈가에 막 맺히려 한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뒤로 물러났다.
“먼저 방에 가 있어. 볼일 보고 금방 갈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약간 움찔하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예, 주인님.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두 사람이 먹었던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방금 마커스가 잘라준 빵은 잘린 면이 접시 바닥으로 놓여 있어, 거기에 발린 꿀과 버터가 이리저리 뭉개져 끈적인다. 방금까지 그 버터와 꿀은 ‘백업’이란 암호-오직 마커스와 빈우 둘만의 암호-로 적혀 있었다. 마커스가 빈우를 백업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빈우가 마커스에게 던졌던 빵에 적힌, 역시 버터와 꿀로 적은 ‘현 상황’이라고 물은 암호에 대한 대답이다. 이 역시 빈우가 마커스에게 은밀히 물은 질문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빈우와 정보국의 현 상황이 어떤지를 물은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상 무’라고 적거나 마커스가 이상이 없다고 직접 말해야 했다. 위험하다면 ‘위험’이라고 적어놓을 것이다. ‘백업’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마커스 자신도 갈피를 못 잡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란 뜻이다. 아마 그 백업에는 서로서로 봐주자는 의미도 들었겠지.
지금 빈우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만하다. 속했던 부대는 대형 사고를 쳤고, 과거에 얻었던 정보는 잠겨져 알 수 없는 데다 상부로부터의 라인은 간당간당하다. 여기서 마커스마저 등을 돌리면 답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믿을 만한 사람은 마커스 밖에 없다.
‘어차피 마커스가 돌아섰다면 뭘 하든 끝난 거다. 지금은 녀석을 믿는 수밖에.’
빈우는 먼저 자신이 집히는 것을 찾아 제2식당을 나섰다. 그러면서 가는 길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쓸만한 영상 기록도 미리 채집해뒀다. 이 기록을 쓸지 안 쓸지는 조금 있다가 판별할 일이다.
여기저기 들리며 시간을 끌다가 클론들의 수면실에 도착하자 이미 모든 클론 중대원들은 수면기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점이라면 수면기와 앞의 장갑복 둘 다 잠금 삼태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다.
빈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잠들어 있던 수면기 앞에 가 서서 다시 한번 자신의 두뇌 칩 기록 설정을 확인했다. 외부 파견 요원으로 되어있는 덕에 기억이 가능하고, 실시간 기록 감시는 없다. 나중에 때가 되면 기록을 수거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정보국의 감시로부터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빈우는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아까 촬영했던 영상과 음성 기록을 편집해 자신의 기록을 조작했다.
기억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장점도 있다. 정보국 요원이 본인의 기록을 직접 조작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에, 미리 확실한 증거나 신호를 남겨두지 않으면 조작된 기록에 자신이 속는 자승자박의 꼴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 파견 요원이 되면 기록과 기억이 분리되기에 조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 나중에 일이 꼬이거나 들키게 되면 정보국 특산 자백제에 절여지는 문제가 생기지만.
빈우는 자신의 기록 조작이 끝나자 관리자 시절 몰래 심어두었던 백도어로 들어가 수면실의 보안 카메라의 기록도 조작했다. 이제 빈우의 두뇌 칩 기록이나 수면실 보안 카메라의 기록을 보아도 빈우는 수면실에 들어와서 잠시 둘러보다가 나간 것으로 보일 뿐이다.
잠시 시간을 번 빈우는 수면기 옆에 달린 개인 사물함을 열었다. 거기에는 빈우가 찾던 물건이 있었다.
“이건가….”
클론 시절 잠시 혼란하게 했던 검정 레이스 여성 팬티다. 역시나 기능성 마커로 ‘이거 믿지 마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성자는 김빈우 본인이다. 하지만 빈우는 이걸 적은 기억도, 기록도 없다. 아마 잠겨진 기록 속을 보면 밝혀질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수상한 이 팬티는 아직 정체를 밝히기엔 껄끄럽다. 한동안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것이다.
‘이 팬티의 존재는 장갑복이나 클론들의 기록에도 찍혀 들어있을 건데… 내가 하기엔 무리겠고, 마커스에게 부탁해야겠군.’
빈우는 팬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수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