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여성용 팬티?”
의아해하는 마커스에게 빈우가 팬티를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그래, 그것도 군납이 아니고 민간용. 클론으로 잠수했을 때 쓰던 수면기 사물함에서 꺼낸 거야. 마카로니 강하 전에 부상키로 치킨 파이와 초코 칩 쿠키가 떠오르는 바람에 뒤지다가 발견했지.”
“클론 사물함에 이게 들어있었다고?”
마커스는 팬티를 건네받아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다 큰 사내 둘이서 여자 팬티를 가운데 놓고 진중한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일견 꼴사납지만 둘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일단 눈에 필터 씌워서 봐. 기능성 마커로 뭔가 적혀 있다.”
그제야 마커스도 볼 수 있었다. 팬티 위에 적혀진 메시지를.
“흐음, ‘이거 믿지 마라’ …네가 적은 거잖아?”
“그래. 그런데 난 이걸 적은 기억이나, 기록이 없어. 아까 말했다시피 이 팬티는 오늘 마카로니로 강하하기 직전에 처음 찾은 거야. 이게 과연 어디서 났을까?”
빈우의 말대로라면 이 팬티는 꽤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다. 솔리드 베타는 샤다이의 습격을 받은 뒤 철저하게 조사, 수색받고 나서야 수리를 받았다. 빈우가 잠수했던 울토르 클론 C-18의 경우도 마찬가지. 만약 이 팬티가 그때에도 사물함에 들어있었다면 조사 측이 당연히 발견했을 거다.
그렇다면 검정 레이스가 달린 민간용 여성 팬티는 빈우가 클론으로 잠수해서 행동하던 기간에 사물함에 들어간 물건이란 뜻이다.
“잠깐, 이런 거 함부로 꺼내도 되냐?”
지금 빈우는 외부 요원인 상태에다 여러 가지 내, 외부 요인으로 인해 상부의 마크를 받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수상한 물품의 존재가 밝혀지면 이노우에 고토 국장은 눈을 뒤집고 달려들 거다.
이런 상황에서 빈우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팬티를 공개하는 것과 감추는 것.
“아까 식당은 보안 카메라가 있어서 그랬다지만 여긴 네 개인 숙소잖아. 안전하니까 꺼냈지.”
빈우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까 식당에서의 대화를 보면 당연하다.
“아니, 그렇긴 하다만….”
아까 백업을 해준다고 했으니 이건 빈우 나름대로 마커스를 믿는다는, 그리고 자신도 백업해 주겠다는 무언의 제스쳐일 것이다.
“흠, 그러면 이 팬티는 발견했을 때 챙겨 놓은 거냐? 대단한데?”
그때는 아직 빈우가 클론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그런 단순한 머리를 하고도 용케 이런 중요 증거물을 챙겨놨으니 마커스가 감탄할 만하다.
“아니, 방금 다시 가서 찾아온 거야.”
더 대단한 빈우의 대답에 마커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고토 국장이 빈우가 잠수했던 시절의 모든 물품을 수거해오라는 지시를 해놨었는데 그 전에 선수를 치다니, 녀석답다.
“설마 그냥 다녀오진 않았겠지?”
그러면서 마커스는 제 2식당에서 클론 수면실까지 가는 보안 카메라 기록을 훑어보았다. 깨끗하다. 수면실 내부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방금 보안 카메라가 어떻니, 구시렁거리던 놈이 약간의 유예를 주니 보안 카메라를 마구 씹어먹는다. 역시 정보국의 엘리트 요원다웠다.
“미리 손 쓰긴 해놨는데 나중에 뭐 이상한 곳 있으면 좀 봐주라.”
현재 솔리드 베타의 현장 최고 책임자는 마커스이니 그 정도는 손쉬운 일이다.
“그래그래, 물론 네 두뇌 칩 기록도 역시 손봤을 테고.”
빈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기세에 마커스가 질릴 지경이다. 아무리 정보국 내부의 분위기가 안 좋다지만 몸을 사리는 마커스와는 달리 빈우는 대놓고 적대 행위를 한다.
“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냐….”
일단 빈우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마커스가 나설 차례다. 함 내 기록을 다시 살펴 팬티의 기원을 조사하고, 팬티가 들어간 기록을 조작해서 이 중요한 증거를 숨겨야 한다.
마커스는 즉시 솔리드 베타의 함 내 모든 보안 카메라 기록들을 최고 관리자 권한으로 열람했다.
“일단 지금까지의 영상 기록으로는 이 팬티 같은 이상 물품이 찍혔다는 보고가 없었어. 어쩌면 검색 중에 누락이 되었을 수도 있고. 어디 보자, 검색할 것은 검정 여성 팬티, 2217년 12월 27일 오전 4시 38분이 기상 시작이니까 검색은 그전부터….”
일여 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려면 작정하고 봐야겠지만, 지금처럼 AI를 시켜 영상 속의 특정 사물만 지정해서 검색하는 방법을 쓰면 순식간이다. 그렇게 화면을 살펴보던 마커스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어라, 빈우야. 이거 좀 골치 아픈데.”
자못 심각한 마커스의 말에 빈우도 덩달아 긴장했다.
“없어.”
그 말이면 충분했다. 빈우도 즉시 문제가 뭔지 알아챘다.
“팬티가 들어간 적이 없군.”
그리고 마커스는 클론 수면실 보안 카메라의 영상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알맞은 결과가 없습니다.
화면에는 클론들이 수면실을 드나드는 영상들이 여럿 보이지만 그중에서 사물함에 팬티가 들어가는 장면은 검색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가 뭘 숨겨서 사물함에 몰래 집어넣고 할 것 없이 빈우의, C-18의 사물함은 아예 열린 적이 없었다.
-없어? 어디 간 거야? 내 치킨 파이! 내 초코 쿠키!
강하 직전 빈우가 사물함을 뒤진다.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는 사물함에서 뭐가 잡힐 리 있나. 그러나 검은색 팬티가 잡혔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이 팬티는 오늘 강하 직전에 사물함에 생긴 거군.”
그럴 리는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확률이 높은 케이스를 떠올렸다.
“누가 조작한 거지?”
“설마 아샤가?”
아나스타샤는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 클론 수면실에 올 권한이 없고, 보안 카메라 기록을 조작할 능력도 없다. 빈우야 방금 함 내를 오가며 보안 기록을 조작했다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당시의 솔리드 베타에서 유일하게 능동형 AI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정보국 요원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조사한다.
혹시나 해서 마커스는 데이터 패드를 들어 과거 솔리드 베타의 보급품 목록을 살펴보았다.
“으음, 일단 아나스타샤나 네가 가지고 온 사물 중에는 없어. 그리고 내가 구해준 물건은 아냐. 그렇다면….”
몇 가지 더 조사해 본 마커스는 고개를 갸웃한다.
“함내 물질 생성기로 만들어진 물건도 아닌데. 원래 아나스타샤가 입고 있던 거 아니냐?”
“아니, 아샤는 이런 거 안 입어. 팬티는 흰색이나 베이지색. 스타킹도 살구색이나 옅은 갈색. 아까 봤잖아?”
물론 마커스도 보았다. 갈색 팬티스타킹에 하얀 팬티.
“확실해?”
“어릴 적에 이런 거 입혀보려다 귀싸대기 처맞은 뒤로는 확실해.”
잠시 생각하던 빈우가 혼잣말 비슷하게 말을 이었다.
“설마 트리니티… 인가….”
그 말인즉슨 빈우 자신이 팬티에 메시지를 적어 숨기고 영상 기록을 조작한 다음 트리니티 패턴으로 잠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만약 그랬다면 솔리드 베타가 회수된 다음 대규모 조사를 할 때 발견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팬티는 빈우가 몰래 가져온 증거이니 만치 당분간은 둘만이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누가 입었던 건지 알 수 있을까?”
빈우의 말대로 이 팬티는 누군가 입었던 흔적이 있다. 마커스는 정보국에서 가져온 스캐너에 팬티를 넣고 검사를 돌려보았다.
“이것도 안드로이드가 입었던 거군.”
확대해 보자 팬티에는 생체 조직이 약간 묻어 있었고 그 조직을 더욱 확대하자 안드로이드의 제조 번호와 모델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보고 빙긋 웃은 마커스가 고개를 들자 화면 너머로 빈우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자신의 가족이 용의자인 셈이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자식, 쫄지 말고 이거 봐.”
그러면서 마커스는 화면을 잡아 빈우에게도 공유해 주었다. 홀로그램 화면이 빈우의 앞에 뜨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안 보여.”
“뭐? 안 보인다고?”
마커스가 화면을 다시 살펴보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그래, 인식 불가 필터가 걸려있다.”
“아하, 너 파견 요원이었지.”
마커스는 혀를 찼다. 솔리드 베타에 타고는 있지만 빈우는 어디까지나 파견 요원이다. 배 안은 특례로 권한이 주어졌기에 돌아다닐 수 있고, 과거에 심어놓은 백도어로 침투해서 보안 카메라의 기록 조작이 가능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마커스가 방금 사용한 스캐너는 정보국에서 가져온 정보국 물건이다. 파견 요원의 안구와 두뇌 칩의 보안 등급으로는 정보국 기기에 접근할 수가 없다.
“안심해. 아나스타샤는 아니야. 미등록 안드로이드다.”
“그래, 다행이군.”
한시름 놓은 빈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마커스의 표정이 차츰 썩어들어간다.
“하아, 그러냐. 체조직의 상태를 보니 얼추 1년은 되어 보여. 역시 샤다이와 조우한 다음이라고 보는 게 좋겠다. 최악의 경우엔 정체불명의 안드로이드가 이 배 안을 싸돌아다녔다는 얘기가 되는데.”
미등록 안드로이드가 정보국의 기밀 작전 함선 내부를 보안 카메라 피하며 돌아다니다가 팬티를 벗어서 넣었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걸 밝히는 게 네 일이지. 열심히 해라.”
팬티를 착착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빈우는 일어났다.
“가려고?”
“그래. 안드로이드 점검용 데이터 패드 하나 줄 수 있냐?”
그 말에 마커스가 멈칫한다. 어디에 쓸지는 뻔하다. 마커스는 패드 하나를 꺼내 빈우에게 사용 권한을 주며 넘겨주었다.
“푹 쉬어. 뒷일은 내게 맡기고.”
“고생해라.”
빈우가 방을 나서자 마커스는 이제까지 빈우가 했던 일들의 뒤처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팬티의 스캔 기록을 지웠다. 자료만 지우는 게 아니라 메모리까지 뽑아 물리적으로 부숴버렸다. 다음은 빈우가 편집한 영상을 최종 점검하는 것인데 이건 시간이 좀 걸리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빈우가 해놓은 영상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그곳만 수정하면 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지난 1여 년간의 함 내 보안 기록을 집중적으로 재점검하는 것이다. 이것은 AI의 도움을 받아서 조작 흔적을 찾아내는 일인데 빈우 레벨의 실력자가 했다면 그것도 힘들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 방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이노우에 고토 국장에게 보고되는 일 없이 빈우와 마커스 둘 사이에서만 진행될 것이다. 국장에게 알려질 때는 두 사람의 안전이 보장된 후가 되겠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빈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던 아나스타샤가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앉아있을 때 잠깐 보였던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밝게 웃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다. 노을이 지는 보리밭에서 늘 봐왔던 따뜻한 미소다.
“아나스타샤.”
“네, 주인님.”
기대에 찬 표정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빈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질문했다.
“잠수에서 돌아온 내 성격이 원래대로 돌아온 거 알고 있었니?”
그 말에 아나스타샤가 움찔했다. 몸은 약간 떨렸을 뿐이지만 그걸로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앗… 네…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간 빈우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랬다.
“아니,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괜찮아.”
아나스타샤가 조금 진정하자 빈우가 다시 물었다.
“예전에 내 성격이 왜 바뀌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정보국에 들어오고 나서 뭐 때문에 내 성격이 그렇게… 바뀌었지?”
임무나 일 때문이 아니다. 빈우는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 가족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 음. 모르겠어요. 저도 주인님께 물어보았지만, 주- 주인님은 절대 알려주시지 않으셨어요.”
빈우는 언제나 당당하고 활발했던 아나스타샤가 주눅이 들어,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더듬는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내 성격이 바뀐 거야?”
“어? …말이 …말을, 아니… 아는데.”
아나스타샤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리지만 가냘픈 헐떡임만이 새어 나올 뿐이다.
“아샤, 말하지 마! 됐어, 말하지 마!”
빈우는 자신이 한 몹쓸 실수에 후회하며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주인의 품에 안겨 벌벌 떨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마… 말… 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어요.”
빈우는 조심성 없는 자신에게 욕지기가 일었다.
빈우가 파견 요원이 되면서 몇몇 기밀 기록들이 잠겼으니 그 기록들을 외부에서도 얻을 수 없어야 했다. 예를 들자면 업무보조용으로 쓰인 아나스타샤라던가.
만약 빈우가 해당 기록에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빈우에게는 그 권한이 없으며 아나스타샤도 그 사실을 함 내 네트워크로부터 수신받아 알고 있다.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정보국 프로그램으로 제약을 받아 빈우에게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까 인간인 마커스가 같은 질문에 대해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안드로이드인 아나스타샤는 복종해야 하는 주인인 빈우의 명령과 그것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정보국 프로그램의 명령 사이에서 모순에 빠져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해요.”
“아냐, 아샤 넌 잘못한 거 없어.”
빈우가 달래봤지만 한 번 불거진 죄책감은 그녀를 떠밀었다.
“말… 하려고 했는데, 너무… 너무 기뻐서… 주인님이 저를 불러주신 것에 너무 기뻐서… 으흑.”
짐작이 간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주인이 어느 날부터 자신을 차갑고 매몰차게 대한다. 이유는 모르고 알려고 해도 알려 주지를 않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실종되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키워왔던 주인이, 자신을 부모와 누나처럼 따랐던 주인이 사라졌다. 주변에선 죽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녀 자신이 보기에도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인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저 주인이 마지막 있었던 장소에서 기다리는 것이 고작이고, 최선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기다림이 이어진 지 1년 만에 주인인 빈우가 살아서 돌아왔다. 어찌 안 놀라울까. 행복했던 시절의 성격을 가지고 옛날처럼 대해준다. 어찌 안 기쁠까.
“죄송해요… 미안해요.”
아나스타샤를 침대에 앉힌 빈우는 그녀가 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울음과 흐느낌이 잦아들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늘 들어 몇 번이나 그녀를 울리는 걸까, 씁쓸해하는 빈우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아나스타샤는 주인의 손길에 행복해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빈우는 꺼내기 힘든 말을 간신히 꺼냈다.
“아샤, 잠시 검사할 게 있어.”
빈우가 억지로 웃으며 안드로이드 검사용 패드를 꺼내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눈물기 남은 얼굴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주인님. 얼마든지 하세요.”
아나스타샤는 밝게 웃더니 몸을 돌려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접속 단자가 보인다.
그녀는 빈우가 왜 자신을 검사하는지 모른다. 단지 주인이 시키는 일이기에 기쁘게 따를 뿐이다.
빈우는 패드를 작동해서 아나스타샤의 두뇌 모듈에 접속했다. 그리고 메모리 영역으로 들어가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빈우는 자신의 잠겨진 기록과 연관된 아나스타샤의 메모리에 접근해보려 했지만, 검사용 패드가 즉각 거부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예상했던 바였으니 빈우는 실망하지 않고 아나스타샤의 시각 기록에서 여성용 검정 팬티과 클론들 수면실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없다.’
몇 번이고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클론 수면실 근처로 온 적이 없고 검은 팬티를 클론 사물함에 넣은 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팬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패드를 끈 빈우는 뒤에서 아나스타샤를 꼭 껴안았다. 불안감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 주인님?”
아나스타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신의 목에 두른 빈우의 팔을 잡으며 뒤로 기대었다.
“괜찮아요. 주인님. 제가 있잖아요.”
빈우도 힘들어한다는 것을 아는 아나스타샤가 주인을 어루만져 주었다.
서로를 꼭 붙들고 있는 둘은 알고 있었다. 한차례 폭풍이 잦아들었지만, 폭풍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은 지금 폭풍의 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서로를 느끼는 게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