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식사를 마치자 아나스타샤가 식기를 정리하고 차를 준비했다.
“주인님, 차는 뭐로 하실래요? 참, 이제 커피는 뽑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커피.”
아무리 맛을 비슷하게 한다 해도 생성기에서 나오는 카페인 음료는 커피에 비할 게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 풀던 중인 짐 안에서 커피메이커와 커피 원두를 꺼내 자연산 커피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빈우가 보관품 목록을 살펴보니 울토르 프로젝트 때문에 솔리드 베타로 가면서 보관소에 맡겼던 개인 사물들은 얼추 다 온 것 같다. 나머지 사물들은 아까의 우주항 보관소에 있다.
“짐 정리하는 중이었구나. 거의 다 왔지?”
이 짐들은 빈우가 오스카 스테이션에 온 다음 날부터 하나둘씩 오기 시작해서 닷새째인 오늘까지 오고 있었다. 아마도 정보국에서 검열하고 보내는 중일 것이다.
“네, 오늘까지 일단은 다 온 것 같은데 만약에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망가진 게 있다면- 음, 담당자를 칠공분혈 할 거예요.”
“응? 너 요새도 그런 거 보니?”
생뚱맞은 단어를 들은 빈우의 표정은 처음엔 의아하다는 것이었지만, 저기 꺼내진 영상물 칩들을 보고선 아직도 그러냐는 듯한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발끈한 아나스타샤가 아직 덜 풀린 보존팩 더미 쪽으로 가더니 뭔가 뒤적뒤적하며 꺼내 들었다.
“헤헹, 이거 기억나세요?”
아나스타샤가 불쑥 내민 물건에 빈우가 기겁했다.
“억! 너 그거 언제 챙겼어?”
“챙기긴요. 옛날에 주인님이 입대하실 때 저도 따라가려고 부랴부랴 짐 챙기다가 딸려 들어간 거 같아요. 그게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방금 제가 찾았지롱-요.”
아나스타샤가 든 것은 ‘평화를 지키는 마법 공주 피스메이커’에 나오는 주인공 ‘피스메이커’의 장난감이다. 이 마법 소녀 물은 빈우의 여동생이 특히 즐겨보았던 작품으로 아나스타샤 역시 팬이었다.
“피스메이커! 사악한 강강대마왕으로부터 나를 지켜줘~”
“야아아임마!”
장난기 가득한 메이드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주인의 얼굴에 피스메이커를 부비부비 문지르고 있었다.
“아유, 정말이지 위험했다니까요. 그때 피스메이커가 안 지켜줬으면 큰일 났을걸요?”
“큭, 그만해.”
버틸 수 없게 된 빈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도망갔고 아나스타샤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래요, 그때도 침대 위에서 피스메이커가 나와서 저를 지켜주었죠. 아, 아니다. 사실 나를 지켜준 게 아니라 주인님을 지켜준 거려나?”
“내… 내가 잘못했다.”
빈우가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덮자 아나스타샤는 날름 그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들어오지 마!”
아나스타샤가 이불을 비집고 다리에서부터 꼬물꼬물 기어 올라오자 빈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메이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이불 속에서 포복해 올라갔다.
신장 183cm에 강화 육체를 가져 102kg을 넘는 빈우의 저항을, 신장 172cm에 체중 56kg의 가녀린 메이드는 솜씨 있게 돌파했다.
“욧차.”
마침내 이불 위로 아나스타샤가 쑥 올라왔다. 머리가, 목덜미가, 가슴이 빈우의 얼굴을 지나 올라갔고 마침내는 아랫배까지 턱을 스치고 올라간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빈우의 얼굴 위에 무릎걸음으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피스메이커를 든 채.
“어머나? 이젠 그때랑 반대네요?”
그때라면 빈우가 15살, 한창 혈기 왕성할 무렵이다. 그 철없던 꼬맹이는 자신의 누나 같은 아나스타샤를 덮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뭘 어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꼭 안고 침대 위에 넘어진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덮친 건 덮친 거다. 사실 음흉한 마음이 좀 있기도 했고.
그리고 마침 두 사람이 넘어지는 충격에 아나스타샤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던 인형이 떨어졌는데 그게 바로 빈우의 여섯 살 된 막내 여동생과 아나스타샤가 함께 가지고 놀던 마법 소녀 피스메이커의 인형이었다.
인형을 보니 어른스러워 보이던 아나스타샤의 모습 위로 막내 여동생과 천진난만하게 소꿉장난을 하던 모습이 겹쳐져, 자신에게 깔린 아나스타샤가 마치 여동생 또래의 여자아이 같아 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빈우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쳐버렸고 그때부터 마법 소녀 피스메이커는 아나스타샤가 빈우를 놀려먹을 때 종종 등장하는 비밀병기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무상하게도 이제는 역으로 메이드가 주인을 덮치고 있었다.
“그다음에도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나중에는 희한한 속옷이나 사주시고 말이죠.”
“으아아, 으아아.”
아나스타샤의 과거 폭로에 기겁하던 빈우는 살랑거리는 메이드 복의 치맛단이 얼굴을 스치자 움찔움찔한다.
“또, 또 오래간만에 만났더니 처음 한다는 말이 뭐어? 팬티 보여줘?”
“내려가, 내려가, 내려가, 아유, 제발. 쫌.”
빈우가 제대로 힘쓰면 가녀린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그냥 날아가겠지만, 이 불쌍한 강화 군인은 주인에게 목줄 잡힌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 다리 사이에 깔린 빈우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짓궂게 히죽 웃더니 자기 치마를 살금살금 들어 올리며 약을 올렸다.
“자아~ 오늘의 제 팬티는 뭘까~요?”
“검정 망사!”
촥, 하고 아나스타샤의 손바닥이 빈우의 이마를 찰지게 때렸다. 맞은 쪽보다 때린 쪽의 얼굴이 더 빨개진다.
“하이씨! 못됐어! 아직도 그런 거 생각해요? 전 그딴 거 절대로 안 입는다고요!”
아나스타샤가 아픈 자신의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다시 뭐라고 하려 할 때.
-딩동.
공이 살렸다고 해야 하나, 문의 벨이 울리는 바람에 아나스타샤의 장난과 빈우의 수난은 멈출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잽싸게 일어나 짐과 방을 정리했고 빈우도 대충 물건을 치우며 문 옆의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인터폰의 화면에는 군인 한 명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말이 필요할 리가. 인터폰의 화면 옆으로 그의 정보가 뜨고 있고, 또 무엇보다 빈우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지 레드우드 중장?”
뜬금없이 연방군 특수전 사령부 부사령관이 오스카 스테이션에 있는 자기 방문 앞에 서 있자 빈우는 급히 문을 열며 경례를 했다.
“레드우드 중장 각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반갑네, 김 소령. 안에서 얘기하지.”
레드우드 중장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더니 아나스타샤가 준비해준 자리에 앉았다.
“안전하겠지?”
그의 질문은 짧았지만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예, 각하. 제 방은 안전합니다. 아나스타샤, 잠시 자리 비워줘.”
“네. 주인님.“
차를 준비하려던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말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아까와는 영 다른 얌전한 미소를 띠며.
그리고 문이 닫히고 빈우도 자리에 앉자 레드우드 대장이 말을 꺼냈다. 언제나 그렇듯 본론부터.
“이노우에 국장과 대강 얘기가 됐어. 자네가 팀 하나 맡아.”
중장이나 되는 인물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밑도 끝도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그 다운 행동이다.
과거 빈우가 전투 훈련을 받기 위해 특수전 사령부로 파견되었을 때 처음 만났던 레드 우드 중장은 이후로도 몇 차례의 합동 비밀작전을 하면서 제법 얼굴을 트게 된 사이다.
“김 소령.”
빈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레드우드 중장은 짧은 한마디와 함께 자신의 가슴, 계급장 옆에 붙은 휘장들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본 빈우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텅스텐으로 만든 해골 모양의 휘장. 통합 특수전 훈련인 닉스 과정을 3단계까지 모두 수료해야만 받게 되는 이 휘장은 연방 군인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자 당사자가 인간 흉기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만큼 닉스 과정은 흉악한 난이도를 가진 훈련이라 시속 60km로 달리고 800kg을 들어 올리는 강화군인들 조차 버거워하며, 이를 필수적으로 수료해야 하는 장교들은 1단계를 거치는 게 고작이다. 물론 1단계만 되어도 그 사람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2단계를 통과하면 연방의 최정예 특수부대원임이 증명되고 3단계가 되면 앞서 말했다시피 마주치는 적마다 재앙을 선물하는 최종 병기가 된다.
빈우는 타 부서 사람치고는 드물게 3단계까지 수료했던 터라 레드우드 중장 외 특수전 사령부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고 수차례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빈우가 지금은 휘장을 안 차고 있으니 레드우드 중장이 곱게 볼 리가 없다.
“이전 임무 때문에 사물을 모두 맡겼는데 그때 보관소로 가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각하.”
“흠.”
레드우드 중장이 납득의 의미인지 불만의 의미인지 모를 콧소리를 낸다. 한참 휘장을 만지던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튕겼다. 빈우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날아오는 텅스텐 카바이드 휘장을 이마로 받으며 레드우드를 향해 오른손을 내질렀다. 레드우드는 빈우가 내지른 오른 주먹을 왼 팔꿈치로 막으며 반격하려 했지만 막은 건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이었다.
빈우는 레드우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왼무릎을 찔러나갔고 그 와중에 두 사람 사이의 식탁이 박살이 나면서 두 군인이 부딪혔다.
“시발 중장이란 작자가 아직도 전투용 강화를 하고 있네.”
“안 하면 휘장 떼야지.”
소령과 중장이 치고받는 풍경은 다른 곳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특수전 사령부에선 종종 벌어지는 광경이다. 상관이 때린다고 그냥 허허 맞고 있을 모범군인은 그 동네엔 없으니까.
레드우드의 박치기에 빈우도 박치기로 맞받아치자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두 사람의 이마 피부가 터져나간다. 부상 부위는 곧바로 재생을 시작했고 상처에 묻은 상대의 피와 살은 곧 아군의 것으로 판단되어 재생의 재료로 함께 쓰였다.
“왜 또 남의 방에 와서 시빕니까!”
“깨죽깨죽 말이 많다.”
빈우와 레드우드는 격렬한 육박전을 시작했다. 빈우가 몸을 오른쪽 뒤로 돌리며 허리춤의 권총을 잡으려는 것을 본 레드우드는 그걸 막지 않고 먼저 자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근거리에서는 총보다 칼. 그러나 권총을 잡으려고 뒤로 뺀 빈우의 손은 페이크였고 그 손이 그대로 어퍼컷으로 레드우드의 턱을 올려쳤다. 그리고 레드우드가 잡으려던 진동 나이프를 왼손으로 빼앗아 쥐고 텅 빈 목덜미를 그으려고 할 때 레드우드의 손이 빈우의 왼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빈우는 나이프를 재빨리 오른손으로 토스해서 레드우드의 머리를 찔렀다.
전원이 켜지지 않은 나이프에 찔린 레드우드는 씩 웃었다.
“괜찮군.”
흡족하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레드우드 중장을 보며 빈우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니, 뭐가 괜찮습니까! 남의 방 개판 만들고.”
“일이야.”
일을 벌인 사람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방 주인은 속이 탄다. 빈우는 주섬주섬 자리를 치우며 레드우드 중장에게 의자를 권했고 자신은 그냥 침대에 앉았다.
빈우의 엉덩이가 침대에 닿기가 무섭게 다시 레드우드 중장의 본론이 시작됐다.
“자네도 잘 아는 거지?”
레드우드 중장이 보여주는 홀로그램은 과거 솔리드 베타를 습격한 신형 샤다이의 자료들이다.
“이 신형 샤다이는 리퍼라고 명명되었어. 그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직접 겪은 빈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지 영상에는 리퍼와 울토르 중대원들 간의 전투 장면 몇몇이 나오고 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울토르 클론들은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나?”
레드우드 중장의 그 질문에 빈우가 먼저 한 생각은 이 양반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국장과 이미 얘기가 되었다고 하니 의미 없는 생각일 것이다.
“한정적으로 닉스 2레벨은 됩니다.”
제아무리 클론들이라고 해도 유전자 제공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 할 순 없다. 그러나 따라 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빈우는 자신이 배웠던 것을 클론들에게 철저히 꼼꼼하게 가르쳤고 클론들도 열심히 따라와 줬기에 그 성취도는 높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장갑복은 어벤져지?”
울토르 중대는 현재 연방군의 주력 장갑복 중의 하나인 어벤져를 몇 군데 개조해서 썼다.
“네. 손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울토르 중대는 우리 27연대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아주 골치야.”
제27연대. 일명 뱅가드 연대로 불리는 연방군의 최정예 부대 중의 하나로 침투, 암살, 게릴라전 등의 기밀작전을 하는 여타 특수 부대와는 달리 문제가 되는 전장에 신속 투입되어 소방관 역할을 하는 정규전 기동 타격 부대다.
뱅가드 연대는 정규전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특수전 사령부의 직할부대로 편성이 되어있는데, 이는 뱅가드 연대가 중요한 현장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최정예 부대이자 연방이 가진 창의 날카로운 맨 앞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레드우드 중장의 우려는 연방의 창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신형 샤다이, 리퍼-를 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