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죄! 죄송합니다! 팀장님!”
위르겐은 빈우를 향해 가까스로 말할 수 있었다. 첫 만남에서 뻘짓을 하고 개인 메이드를 상대로 실례되는 말을 했으니 입이 있어도 어떻게 떨어지질 않던 것이다.
“뭐가?”
“그… 그….”
말문이 막힌 위르겐을 달랜 것은 빈우의 말이었다.
“위르겐 상사. 지금까지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도 없어. 아, 혹시 안드로이드나 AI 쪽 관련자인가?”
“네넵! 그렇습니다. 대학 전공이 그쪽이었습니다.”
칼같이 대답하는 위르겐의 모습에 빈우는 픽 웃었다.
“군인 장학생 되려고 입대한 거냐?”
“넵, 그런데 이 일도 의외로 적성에 맞습니다.”
그저 적성에 맞을 뿐이라고 하기에는 뱅가드 연대까지 들어간 것을 보면 너무 잘 맞는 모양이다. 뱅가드 연대가 비록 개개인의 전투력 면에서는 단검뿔 토끼나 실리콘 나이트에 한발 처진다고 하지만 엄연히 특수전 사령부 소속의 부대이고 연방의 1티어 부대 중 하나다.
빈우는 자칫하면 군인 장학생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르겐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격려했다.
“앞으로 팀이니까 자주 볼 테니, 아샤하고도 자주 얘기를 나눠봐. 너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가… 감사합니다, 팀장님.”
지금 위르겐의 눈에 비치는 빈우는 지옥 밑바닥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천사와도 같았다. 아직은.
대화를 마친 빈우는 격납고에 모인 팀원들을 한 번 둘러 보았다. 블랙 랜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함장인 지마 오르를 만났고 그다음은 팀원인 아룹 라마누잔과 파트리샤 피아프를 만났으며, 이어서 모니카 보르자와 위르겐 도른베르거가 도착했다.
“자, 또 누가 더 올까.”
빈우가 한숨 돌리려 할 때 간신히 진정된 모니카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팀장님. 제가 가지고 온 물건들 수령하셔야 해요.”
“아, 그렇지. 그게 있었지.”
모니카는 자신이 입고 온 헤비급 장갑복 부머에 컨테이너를 달고 블랙 랜스에 들어 왔었다. 그 컨테이너에는 아마 과학기술국에서 보낸 자재나 장비가 들어있겠지.
“대위, 열어 봐.”
그러나 모니카는 빈우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빈우는 아마 모니카가 현재 그녀 자신의 처지에 충격을 받고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모니카는 빈우의 폭발에 겁먹어서 쩔쩔매는 것이다.
“저기, 저는 못 열어요. 권한이 없어요.”
“흠.”
운반자가 열 수 없다는 얘기는 꽤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말이겠지. 역시나 컨테이너는 팀장 김빈우, 함장 지마 오르, 사령관 조지 레드우드 세 사람만이 열 수 있도록 잠겨 있었다.
빈우의 보안 승인으로 첫 번째 컨테이너가 열렸다. 그 안에는 미들급 장갑복들 4기가 죽 늘어서 있었다.
인간이 사는 곳에서 인간을 죽이기 위한 병기들.
인간이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무기들.
그것을 본 빈우의 뇌리에 뭔가 하나 스쳐 지나간다.
마카로니에서의 궤도 엘레베이터.
석양에 타오르는 고향의 보리밭.
장갑복을 입은 클론들에 의해 죽어가는 인간들.
둔탁한 장갑복의 주먹에 부드러운 살갗이 으깨져 가는 것이 보인다.
김이 나는 핏덩이들이 장갑복에 밟히는 게 느껴진다.
“로보트야아아! 안아줘어!”
나를 보고 살려달라 우는 아이.
내가 살려줘야 하는 아이.
핏덩이가 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린다.
방아쇠를 당긴 촉감이 손가락에 선명하다.
분명 당시의 기억은, 마카로니에서의 기억은 정보국에서 잠가 놨을 터였다. 그래서 아까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피에르 라캉 중령을 도와주기 위해 마카로니의 기억을 떠올릴 때도 빈우는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정신 방벽을 뚫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잠겼던 기억이 이렇게 자연스레 떠오른다면 정보국에서 기록을 풀면서 동시에 잠가놨던 기억도 같이 풀었다는 말이 된다.
빈우에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이노우에 고토, 이 새끼가.’
“팀장님?”
옆에서 아룹이 걱정스레 부르는 소리에 빈우는 정신을 차렸다.
“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컨테이너 문을 잡고 옆으로 기대있던 빈우가 자세를 바로 했다.
“모니카, 이 기종들은 뭐지?”
“이, 이건 컨커러에요!”
모니카도 안의 내용물을 몰랐는지 조금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운반자가 열 수 없게 되어있을뿐더러 안의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 컨커러란 장갑복은 상당히 기밀 병기인듯싶었다.
“특수전 사령부에서는 리퍼들을 상대하기 위한 신형 장갑복 기종을 우리 과학기술국과 국방과학연구소에 각각 의뢰했고, 우리 쪽에서 개발한 기종이 컨커러인데….”
뭔가 내키지 않았는지 잠시 말을 멈췄던 모니카가 말을 이었다.
“저희 팀이 특수전 사령부에서 요구한 사항에 따라 스펙을 맞춰 개발했습니다만….”
모니카는 흘깃 빈우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작 완성품을 만들고 나니 착용자가 움직임을 따라가질 못하거나 음- 반동이 너무 심해서 결함 기기로 판명이 난 기종이에요. 왜 이런 걸 보냈지?”
즉 ‘왜 이딴 게 왔지’라서 놀란 것이다. 궁금함이 해결된 빈우는 실망했지만, 모니카의 말을 들은 팀원들은 눈을 빛냈다.
“리퍼에 대응하는 스펙이라고?”
“착용자가 못 버텨?”
이건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블랙홀마저 찌를 수 있는 특수부대원들의 호기 어린 말들이고.
“결함기란 말이지….”
이건 골치 아파하는 팀장 빈우의 말이다.
스펙을 맞췄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결함기란 말도 사실일 것이다. 확실히.
문제는 과학기술국에서 저 컨커러란 결함 장갑복을 태스크 포스 373의 요청에 따라 그냥 던져준 거냐 아니면 레드우드가 직접 콕 찍어서 ‘컨커러’를 달라고 한 거냐는 점인데,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레드우드가 직접 보고 점 찍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무언가 레드우드의 마음에 쏙 든 게 있거나 작전에 필요한 특징이 있거나 하겠지.
그렇다면 스펙을 살리며 결함기를 쓸 수 있게 운용법을 찾아내는 것이 지휘관의 일이 된다. 여기서 지휘관은 윗대가리인 조지 레드우드가 아니라 앞 대가리인 김빈우지만.
“저, 괜찮으세요? 사실은 팀장님께만 드릴 말씀이 있는데….”
골머리 썩히는 빈우에게 모니카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옆에 다가온 아룹이 했다.
“하하하, 문제가 있다고 해도 쓸만하니까 레드우드 중장님이 징발하셨겠죠. 사용은 저희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위님.”
아룹이 호탕한 웃음 뒤로 파트리샤의 빠른 말소리가 들렸다.
“이거, 기존 개량이나 발전이 아닌걸? 아예 척추 프레임부터 새로 만들었네. 처음 보는 규격인데? 팀장님, 이거 이전 것들이랑 외장 근육 구조가 달라요. 가동 영역이 근접전을 상정하고 만들었네요. 뭐 접합부는 공용이라 입는 데는 문제 없지만 움직임에는 신경 써야겠습니다. 어머나, 동력로 한번 빵빵하다. 출력은 헤비급인데?”
그새 파트리샤는 컨커러를 착용 모드로 열어놓고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저, 이거 말해도 되겠습니까?”
빈우에게 다가온 위르겐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도 되는지 허락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혹시 컨커러에 관한 거냐? 상관없어. 이건 이제 우리 거고, 관련된 기록도 기밀이건 뭐건 전부 우리가 가져간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조금 문제가 있는 장갑복이니 만큼 빈우는 그 이력을 낱낱이 조사할 예정이었고, 그 덕에 위르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3주 전에 우리 뱅가드 연대에서 신형 장갑복의 모의전 상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이 컨커러였습니다. 당시의 일은 전부 기밀에 붙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위르겐 말마따나 기밀이고 나발이고 어쩔 건가, 이제 쓰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 기밀 기록도 싹싹 긁어 가져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직접 착용이 아니라 아쉽지만, 모의전을 해봤다면 그 성능을 눈과 몸으로 직접 느꼈을 것이다. 빈우는 기대에 차서 질문했다.
“어땠어?”
“그게, 평가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지긋이 바라보는 빈우의 시선은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뜻이다.
“평범하게 사격하다가 근접전으로 들어갔는데, 완전히 죽 쑤던데요? 초짜처럼 장갑복에 휘둘리다가 제풀에 쓰러지거나 힘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제압당하곤 했습니다. 상대 테스트 파일럿도 꽤 베테랑 같아 보였는데 아마 장갑복의 문제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래?”
위르겐의 말을 들은 빈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까진 뭐가 레드우드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모니카, 컨커러가 3주 전과 바뀐 것 있나?”
“아뇨! 그때 회수해서 데이터 수집하고 고장 부위 수리한 다음에 계속 보관 중이었습니다.”
황급히 대답한 모니카는 빈우에게 뭔가 계속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걸 보다 못한 빈우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에그머니나~ 이게 무어야~”
파트리샤의 낮은 호들갑이-조금은 흉흉한 기운을 띈 말이-일행의 시선을 끌었다.
“파트리샤, 뭐야?”
다가오는 빈우에게 파트리샤는 컨커러의 동력로 근처에서 발견한 하나의 파편을 보여주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파편. 이가 갈리고 신물이 나는 파편이다.
“샤다이의 부품이군.”
빈우의 확정에 일행의 시선이 모니카에게 향했고 그녀는 다시 얼어붙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팀원들의 시선이 모든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왜 말하지 않았지?
“어어, 수,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에요. 말하려고 했는데….”
연방군에서 무기 개발, 연구와 관련된 부서는 크게 두 군데가 있다. 하나가 국방과학연구소이고 다른 하나가 과학기술국이다.
이 둘의 영역은 겹치긴 해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신기술을 개발하긴 해도 검증된 인류의 기술로 무기를 개발하는 게 우선이고, 과학기술국은 외계 종족 기술의 역설계, 구 지구제국 시절의 기술 복원, 현재 연방에서 법적으로 금지된 기술의 응용 등이 주요 업무다.
클론 기술을 쓴 울토르 프로젝트나 롱 훅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했다면 발칵 뒤집혔겠지.
그리고 과학기술국에서 불분명한 기술을 역설계하거나 실험해서 검사를 마치면 그 기술들은 국방과학연구소로 넘어가 실용화 과정을 거쳐 무기로 만들어진다.
때문에, 과학기술국이라 해서 딱히 터부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곤란하다. 자신이 입고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하는 장비에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썩 즐겁진 않다.
빈우가 모니카를 향해 한 걸음 내딛자 팀원들도 말없이 빈우의 뒤로 다가서려 했다. 단지 그뿐인데도 모니카는 겁에 질려 한번 부들, 하고 떨었다. 빈우는 오른손을 약간 들어 팀원들을 제지하고 아나스타샤에게 눈짓으로 모니카를 달래주라고 했다.
아나스타샤가 자리에 앉혀주고 옆에 같이 앉자 다시금 진정한 모니카가 말을 이었다.
“커, 컨커러는 샤다이의 기술을 응용하기 위해 만든 기체에요. 샤다이의 방어막은 우리 것에 비하면 월등하기에 그걸 역설계해서 개발하는 게 목적이었죠. 그런데 저 방어막을 생성하는 부위를 완전히 분석한 게 아니라 단지 장착만 해놨기 때문에 사용 도중 오작동이 되어 착용자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모니카는 자신은 당당하다는 듯, 빈우에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실은 이것이 기밀 사항이라 팀장님께만 말씀드리려 했는데 틈이 없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강 상황을 파악한 빈우는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그게 내포한 의미는 ‘상황 끝. 일 봐. 애 괴롭히지 말고.’ 였고 알아들은 팀원들은 다시 각자 제 할 일에 몰두했다.
빈우는 모니카 앞에 서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가 한 실수의 이유가 짐작이 가기 때문에.
“대위, 긴히 할 말이 있으면 개인 통신을 넣어.”
“통신을… 아! 네, 그렇네요. 요즘 써본 적이 없어서… 알겠습니다.”
비밀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두뇌 칩끼리 통신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다. 말하지도 않고 머릿속으로 문자를 생각했을 뿐이니 누가 엿들을 수가 없다. 도청이라면 몰라도.
아마 모니카는 연구소나 기밀 구역같이 보안상 두뇌 칩의 개인 통신을 금지하는 곳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이런 사용법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빈우도 이 같은 경우를 종종 봐왔기에 딱히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전투 요원이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외부 통신기를 썼겠지?”
“네, 이걸 썼습니다.”
빈우의 질문에 모니카는 자신의 손목에 달린 통신기를 보여주었다. 보안 칩을 넣어야만 설정 구역에서 통화할 수 있는 통신기다.
그걸 본 아룹이 뒤에서 감탄사를 날렸다.
“햐, 고풍스럽구나.”
56살이나 먹은 아저씨가 저런 말을 할 정도니 어지간히 오래된 모델이다. 피식 웃은 빈우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준 부팀장에게 눈인사를 한 번 하고 다시 모니카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딱히 모니카에게만 하는 것이 아닌, 팀원 전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잘 들어. 팀원들끼리는 일체의 비밀이나 기밀은 없다. 모든 정보를 공유하도록. 물론 프라이버시는 빼고. 아, 그것도 공유하려면 각자 맘대로 하던가.”
말이 끝나기 무섭기 파트리샤의 비명이 울렸다.
“꺄~ 팀장님 화끈해. 부디 저의 비밀부터 파헤쳐 주시와요~”
빈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금 아룹의 주먹이 파트리샤의 관자놀이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