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허수아비란 인간의 사고를 복제한 AI를 써서 본인을 흉내 내는 안드로이드와 AI들의 총칭이다. 주로 본인이 없거나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대역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것은 메시지를 답하는 업무를 맡거나, 좀 더 발전된 모델들은 이 피에르 라캉의 허수아비처럼 스스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본이 되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버릇을 철저히 모방하는 허수아비들은 일반 안드로이드와 달리, 손님 접대나 업무 대행처럼 본인을 대신하는 일들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서 까다로운 설정과 조작에도 불구하고 꽤 인기가 있었다.
“오래간만이라… 내가 부상할 때는 없었나?”
빈우가 솔리드 베타에서 부상했을 때도 그 자리에는 고토 국장이 수작을 부려 피에르 라캉 중령과 응우옌 티 빈 중령의 허수아비가 직, 간접적으로 나왔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라캉 중령께서 가정용으로 쓰는 허수아비라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수아비를 여러 개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만약 저 녀석이 가정용이고 솔리드 베타에서 봤던 것이 업무용이라면 그때 일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오르 함장님, 검사 부탁하겠습니다.”
“네, 잠시 기다려 주시죠.”
오르 함장은 라캉 중령의 허수아비 뒤로 다가가 접속 단자로 연결해 안드로이드의 내부를 샅샅이 검사했다.
“바이러스나 수상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빈우의 질문에 안드로이드는 잠시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그때 잠깐이나마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은 빈우를 타박 주려는 듯 짜증 난 표정이었다. 마치 라캉 중령처럼.
“실례했습니다, 소령님. 제 이름은 아를르캥입니다. 아를르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하지만 실제 나온 대답은 공손했다. 그날 저녁에 만났던 허수아비의 이름도 아를르캥이었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일부러 빈우는 AI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질문했다.
실제 라캉 중령의 성격이었다면 그것도 까먹었냐며 한소리 했겠지만, 현재 아를르캥은 안드로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아를르캥. 이제 이 사태를 설명해 봐.”
뭘 어디서부터 설명할지는 아를르캥의 성능과 그를 설정한 라캉 중령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빈우에게 관찰될 것이다.
“네, 이 육체, 보안국 소속의 안드로이드 존 도우는 제 주인이신 피에르 라캉 중령의 지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아, 이건 보안국식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존 도우는 라캉 중령을 감시하며 사망 시 정보의 소각과 회수를 맡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지원은 늘 붙는 게 아닐 텐데?”
빈우의 질문대로 정보국이나 보안국에서 이런 감시가 붙을 때는 해당 요원의 신변이 위험하거나 색깔이 불분명해졌을 때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태스크 포스 373으로 가는 임무가 위험할 리는 없다. 그러나 레드우드의 말대로 라캉 중령이 도망치려는 상황이었으면 이런 것들이 붙을 수 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라캉 중령님께서 직접 신청하셨습니다.”
“뭐? 본인이?”
“네. 보호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라캉 중령님께서 스스로 신청하셨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명목상이다. 실제로 보호 역을 맡은 안드로이드였다면 샤다이의 습격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캉을 지키려고 했을 터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니 존 도우와 제인 도우는 감시역이 확실했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 자신의 감시를 요청할만한 이유는 뻔하다.
“아를르캥, 네 생각은 어때?”
허수아비는 원본의 사고와 행동방식에 있어 최대한 똑같을 수 있도록 구성하기 때문에 아를르캥의 생각은 곧 피에르 라캉의 생각일 수 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욱 가까이.”
아를르캥의 대답은, 그리고 피에르 라캉의 생각은 빈우의 예상대로였다. 어차피 붙을 감시라면 오히려 자신의 시야에 두는 게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역시나 라캉 중령은 상부인 보안국과 적대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다. 보안국이 적대하던, 본인이 적대하던.
“계속해.”
“감시역인 안드로이드들은 라캉 중령이 오스카 스테이션에 오기 전 이미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주인은 도착하자마자 안드로이드들을 제압하고 저를 이 몸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다 비밀리에 하셨기에 보안국 측은 그대로 존 도우와 제인 도우를 라캉 중령님의 감시역으로 붙였고 저는 안드로이드의 저장소 깊숙이 가라앉아 깨어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은 참 쉽게 한다. 실제로 보안국의 안드로이드는 전투용이 아니기에 제압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허수아비를 그 안에 집어넣고도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은 라캉 중령 정도 되는 내부의 실력자라 가능한 묘기일 것이다.
“그리고 제게 설정된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인 피에르 라캉 중령께서 사망하신다면, 그 사실을 이 존 도우가 인식하게 된다면, 안전한 때에 기동해 이 몸의 조종권을 빼앗을 것. 그다음은 가능한 한 서둘러서 조지 레드우드 중장님이 계신 태스크 포스 373으로 가란 것이었습니다.”
“중장님이 조건이었나? 그런데 왜 나에게 말을 하는 거지?”
“그야 저의 정보 전달 대상에 김 소령님도 있었으니까요.”
“대상? 그 조건에 정보국의 김빈우도 들어가나?”
“아닙니다. 태스크 포스 373의 김빈우입니다.”
즉, 라캉 중령은 빈우가 373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까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만나 가족의 안부를 물을 때는 이런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빈우를 못 믿었다기보다는 보안에 신경을 쓴 거겠지. 실제로 그때 빈우도 위험한 내용의 대답을 빙 둘러서 했었다.
그리고 라캉 중령이 자기 허수아비에게 이런 명령들을 설정해 놨단 것은 이미 자신의 신변에 심각한 위험이 왔다는 것을 알고 보험이 되는 계획을 만들어 심어놨단 말이다. 그것도 적의 손바닥 안에.
“제인 도우는 어떻게 했지?”
“명령 우선권자는 존 도우였습니다. 제인 도우를 꼬드겨 데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죠. 사태가 진정되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 저는 즉시 셔틀을 타고 블랙 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아를르캥 일행은 셔틀을 타고 오던 중에 작동정지가 됐었다. 이어서 보안국에서 연락이 와 한바탕 소란이 난 게 조금 전이다.
“갑자기 작동정지가 된 이유가 뭐지? 보안국에서 한 건가?”
“아뇨, 그건 셔틀에 타서 블랙 랜스로 올 때였습니다. 당시 존 도우가 가진 정보로는 그 명령서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라캉 중령님의 영현을 회수하는 명목으로 블랙 랜스에 오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한데 셔틀이 가던 도중 갑자기 보안국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블랙 랜스로 가는 걸 멈추고 즉각 귀환하라는 명령이었죠.”
라캉 중력의 감시역을 맡았던 안드로이드들이 보안국 수사명령서가 있는 김빈우에게 간다고 했으니 위에선 난리가 났겠지. 만약 잡힌다면 보안국이 피에르 라캉을 어떤 취급을 했는지 드러날 것이고, 안드로이드의 빈약한 권한으로나마 보안국의 서버에 접속해 정보를 빼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든 무시하려 했지만, 보안국의 명령은 제가 가진 조종권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수준의 강제성을 가지고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작동정지를 했던 거군.”
“네, 그것도 라캉 중령님의 안배로 보안국의 권한이 아닌 보안국 수사 권한에 의해서만 기동 되게끔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블랙 랜스로 오기 전에 보안국의 강제 명령이 떨어졌다면 저는 다른 수를 써야 했겠지만, 이미 셔틀이 거의 도착하는 상황이었으니 저는 안심하고 작동 정지할 수 있었지요.”
라캉 중령이라면 빈우에게 수사명령서가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테니, 허수아비가 태스크 포스 373과 접촉하는 것이 힘들어지거나, 눈치챈 보안국이 먼저 움직인다면 작동정지가 되어 나중에 회수되더라도 이런 사실들을 숨기게 되어있던 것이다.
정보사령본부의 안드로이드들은 빈우가 가진 기밀 케이스에 준하는 보안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렇게 꺼진다면 정해진 방법으로 켜기 전에는 주인이나 보안국이라 할지라도 강제로 해체해서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안국에선 이상행동을 하던 네가 갑자기 꺼졌다가 다시 켜지지 않으니 엄청나게 놀랐겠군. 여기저기 켤 방법을 살피며 살아있는 회선을 찾아보니 그건 수사명령서에 대한 것이고, 자신이 열 수 없는 상자가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쿠사키나 국장이 그렇게 서둘렀던 것도 이해가 가.”
드디어 이야기는 클라이맥스에 도착했다.
“그래, 그렇게 해서 아를르캥 네가 이곳 태스크 포스 373의 모함인 블랙 랜스까지 온 다음 우리에게 전할 정보는 뭐지?”
이미 레드우드에게 들었던 터라 무엇에 관한 정보인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샤다이, 리퍼, 워프 비스트에 관한 정보임이 분명하다.
“포크 트러플 피자를 추천합니다.”
“뭐?”
그러나 아를르캥의 대답은 영 뜬금 없는 것이었다.
“피에르 라캉 중령님께서 태스크 포스 373의 조지 레드우드 중장님과 김빈우 소령님께 남긴 메시지입니다. 포크 트러플 피자를 추천합니다.”
포크 트러플 피자는 정식 메뉴는 아니지만 피자 타이거의 자유 메뉴에서 만들 수 있긴 하다. 한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외에 다른 메시지는?”
“없습니다.”
“리퍼나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는 없나?”
“말씀하신 것에 대한 정보는 제게 없습니다.”
빈우가 메시지의 의미를 곱씹을 때 뒤에서 레드우드 중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를르캥, 혹시 보안국이 네가 가진 정보를 지우진 않았을까?”
“아뇨, 보안국에서 접촉한 흔적은 없습니다. 리퍼, 워프 비스트란 단어와 관련된 정보는 처음부터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입력된 명령들은 주인이신 라캉 중령님이 사망한 이후 태스크 포스 373으로 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고, 그 마지막에는 연락 대상인 조지 레드우드 중장님과 김빈우 소령님을 만난 다음 ‘포크 트러플 피자를 추천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라캉 중령이 시간에 쫓겨 실수한 걸까?”
피에르 라캉은 제 죽음에 대비해 이중삼중의 계책을 짜놨다. 그런 목숨을 건 기교에 실수가 들어갈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왜 라캉 중령은 아를르캥 같은 가정용 허수아비를 쓴 거지? 사무용을 쓰는 게 낫지 않나?’
추리와 기록 검색 속에서 빈우는 힌트를 찾아낸 것 같았다.
“가정이지만… 해답을 알 것 같습니다.”
“오오, 그게 뭐지?”
“아마도 라캉 중령은 우리에게 전하려는 정보를 아를르캥이나 이 근처가 아니라 다른 곳, 더 안전한 곳에 숨겼을 겁니다. 안드로이드 하나에 숨기기엔 중요도나 위험성이 너무 큰 정보일 테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허어? 그럼 그걸 어떻게 찾는다는 거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빈우는 아를르캥을 가리켰다.
“그 답은 이제부터 아를르캥이 찾아야 합니다.”
“뭐?”
“제가 말씀입니까?”
“아를르캥, 기억하나? 전통적으로 트러플, 송로 버섯을 찾을 때 쓰는 방법을?”
빈우의 말에 아를르캥의 눈썹이 가늘게 모인다.
“…돼지에게 냄새를 맡아 찾게 하지요.”
“그거야.”
포크와 트러플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빈우는 몸을 돌려 373의 사령관과 팀원들에게 자신의 가설을 설명했다.
“라캉 중령은 정보를 숨긴 다음 그것을 찾을 단서도 남겨놓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단서를 통해 해답을 찾을 방법 또한,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요. 여기 있는 아를르캥은 라캉 중령의 허수아비입니다. 원주인과 가장 유사한 사고를 할 수 있는 AI죠. 단서를 모아준다면 아를르캥이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라캉 중령은 아예 처음부터 정보를 이곳 오스카 스테이션에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은닉된 곳에서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잠시 일행이 침묵했을 때 위르겐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잠깐만요. 전달 방식이 너무 번거롭지 않습니까? 아니 아까부터 좀 궁금하긴 했습니다만 AI에게 이런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명령들을 설정해 놓고 하는 일마다 이렇게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위르겐의 의문은 타당했다. 전달 방식은 둘째치고 이렇게 변수가 많은 일을 예상해 놓고 그게 자신이 죽은 다음에 제대로 흘러가길 바라는 것은 불확실성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의문도 당연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찾는 방법이 복잡한 만큼 우리가 찾아야 할 정보의 가치와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지.
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라캉 중령이 안배한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에 불과할 거다. 중령은 수많은 시나리오를 짜놨을 거야. 373 팀에 내가 오지 못할 경우, 방금처럼 안드로이드가 블랙 랜스로 오기 전에 강제 회수 명령을 받을 경우, 모종의 이유로 안드로이드가 작동 불능에 빠질 경우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중령은 그 하나하나마다 대응되도록 시나리오를 짰을 게 분명해.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마지막에는 지금 장면이 나오도록 구성된 자신의 마지막 시나리오를.”
“…맙소사….”
한숨과 함께 레드우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장갑복 속의 팀원들 얼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빈우의 말이 맞는다면 라캉 중령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태스크 포스 373에게 자신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마지막 정보까지 찾도록 치밀한 계획을 설계한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레드우드의 질문에 빈우가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아를르캥을 데려가야죠.”
하지만 그 말에 아를르캥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소령님. 물론 저는 수사 대상이니 일시적으로 가능은 하겠습니다만, 그 명령서의 권한으로는 저를 그리 오래 붙잡고 있진 못할 겁니다. 곧바로 반환해야 할 텐데요.”
“그딴 건 신경 쓰지마. 넌 우리 373에서 징집해서 쓰면 된다.”
레드우드가 호기롭게 외쳤다. 실제로 특수전 사령부 소속 태스크 포스의 인사 권한이나 징집 권한은 막강하니, 존 도우 같은 보안국 소속의 안드로이드는 힘들긴 해도 어떻게든 가져올 수 있다.
“아뇨,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빈우는 자신의 완장을 추켜들었다.
“이 수사 권한으로 보안국 안드로이드에 들어있는 ‘비인가 프로그램’을 압수하면 되지 않습니까? 명령서에 적힌 정당한 권한으로 아를르캥의 AI를 가져갑시다.”
“아하, 과연! 그러면 되는 거였군. 그런데 나중에 보안국에서 아를르캥을 돌려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씹으면 되죠. 근데 오늘따라 이 양반 왜 이렇게 부드러워?”
“아유 이 새끼야, 포장마차 다 떼고 장기 두는 기분이다. 난 이렇게 서로 뒤통수 노리는 싸움은 적성에 안 맞아.”
전형적인 용장인 조지 레드우드는 자신에게 이런 수 싸움은 영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팀에 빈우와 피에르 라캉을 넣고자 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냥 안심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보안국에서도 이 방법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응? 아를르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아!”
보안국에서는 당연히 피에르 라캉의 업무용 허수아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373과 같은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뭐 라캉 중령의 작전이 좀 더 심도가 깊기를 바라죠. 가정용에겐 쉽지만, 업무용은 찾기 힘든 단서면 좋겠는데.”
만약 단서가 요리 레시피거나 집 안 청소 요령, 가족의 버릇 같은 것들이라면 이쪽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 허나 생각은 거기까지, 보안국에서 수작을 걸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제 서두르죠. 오르 함장님, 안드로이드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선내 잡무용으로 만든 인간형이 몇 개 있습니다. 그걸 쓰죠.”
“보안등급은?”
“제 직할입니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즉시 존 도우의 육체를 작업실로 옮기고 빈우가 가진 수사 권한으로 안드로이드의 저장소에 접속해 ‘비인가 프로그램’인 아를르캥을 발견, 압수했다. 이어서 오르 함장이 마련해 준 안드로이드에 아를르캥을 심어서 다시 가동했다.
새로운 안드로이드의 외모는 아를르캥의 요청대로 피에르 라캉의 외모로 설정되었다. 그게 허수아비의 선택이었고 빈우는 허락해 주었다.
“저 소령님.”
제작 침대에서 일어난 아를르캥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라고 불러.”
“네, 팀장님. 실은 라캉 중령님께서 팀장님께 전하라 입력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유언인가?”
“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주어 이제 작업실 안에는 아를르캥과 빈우 둘만 남았다.
차츰 아를르캥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주인을 닮아가는 얼굴이 입을 열었다.
“김 소령, 자네는 절대 양심의 가책을 가질 필요가 없네. 아내와 아들의 일에 자네는 어떠한 잘못도 없어. 더는 그 일로 자네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야.”
아를르캥의 얼굴은 아니, 라캉 중령의 얼굴은 오스카 스테이션의 피자 타이거에서 보았던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만이 도망자는 아니었어. 나도 도망자야. 나 또한 도망자라고, 자네와 난 절망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지. 허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어. 반대야. 우린 고통 어린 희망을 버리고 안락한 절망으로 도망간 거야.”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아를르캥의 입에서 말이 쥐어짜여 나온다.
“구더기 치즈… 기억하나?”
물론 기록에 있다. 그날 마리 라캉이 대접해 준, 치즈 안에서 꾸물거리는 구더기가 톡톡 튀는 별식이었다. 다만 빈우가 되새길 수 있는 것은 시각과 청각 정보뿐이고 그것을 먹었을 때의 맛과 촉감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그걸 먹은 다음 라캉 가족의 걱정스러웠던 시선들이 환호로 바뀐 것을 보면 아마도 빈우 자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우린 치즈 속의 구더기야.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가는 곳은 입속이고 아무리 저항해 봤자 그들의 진미가 될 뿐이지.”
고개를 들어 빈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를르캥의 눈은 라캉의 마지막 절망을 담고 있었다. 그가 왜 리퍼 앞에서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는지 알 것도 같다.
“미안하네, 김 소령. 난… 난 더는 못하겠어.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넘기는군.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래, 자네가 해줬던 말이 기억나는군. 내가 지금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닫혔다가 떨리는 아를르캥의 입이 간신히 다시 열린다.
“자네는, 절대… 자신의 양심과 타협하지 말게.”
기억에도, 기록에도 없는 말이다. 아마도 군사정보국에서 잠근 기록에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빈우는 그것을 기억도, 재생도 할 수 없다. 도대체 빈우와 피에르는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