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전열함 7, 모니터함 3.
-니미….
함장인 오르의 보고에 팀장인 빈우는 한숨 어린 욕설로 대답한다. 그러나 현재 태스크 포스 373이 처한 상황은 그게 납득이 될 만한 수준이다.
발 가르단 하스의 지상에선 빈우가 이끄는 지상팀이 다수의 스팸과 교전하고 있는 상황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궤도상에 있는 블랙 랜스 주변으로 샤다이 함대가 갑작스레 점프해온 상황이다.
오히려 욕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함장님. 대지 지원 포격,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샤다이들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지상팀은 블랙 랜스의 지원이 절실한 판국이다. 그러나 도와줘야 할 블랙 랜스가 지금은 자기 자신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요청이 빠르면 빠를수록 가능성이 높겠군요.
-부유 포대 2기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연방의 군함들은 함체에 고정된 포 외에도 외부로 사출해서 사용할 수 있는 포대들이 있는데 비록 고정포대에 비해선 손색이 있지만, 전방위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우주전에서 사각을 없애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어떻게든 해보죠.
오르 함장은 부유 포대 2기를 사출하며 쓰레기와 잡다한 화물을 버려 위장한 다음 주변 상황을 분석했다. 이쪽은 최신예 개조 구축함 한 척인 반면 적은 전열함 7척에 모니터함이 3척이었다. 압도적이다 못해 절망적인 전력 차이다.
다행히 이곳저곳 떨어져 점프해온 놈들은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고 그 덕에 포위망을 제대로 형성하지도 못했다.
“아나스타샤 양, 아를르캥 군. 본 함은 지금부터 샤다이와 전투에 들어갑니다.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세요.”
연방은 샤다이와 우주전을 할 때 최소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임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역으로 열 배에 달하는 적에 홀로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지상전과 달리 우주전은 란체스터의 법칙이 비교적 잘 적용되는 곳이기에 더더욱 암울하다.
또한, 연방과 샤다이의 기술력 차이는 꽤 커서 그냥 갖다 박아도 명량해전이 재현될 격차가 있다. 다행히도 타고 있는 샤다이 놈들이 우주에서 내로라할 병신들인 덕분에 지금까지 연방이 아득바득 이기고 있었을 뿐이다. 만일 이놈들이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연방은 예전에 와해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성능과 병력, 두 가지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소수정예의 병력으로 적의 핵심부를 타격하거나, 병기나 함선, 전술 등을 대 샤다이 사양으로 편성해야 한다.
애초에 블랙 랜스는 저 두 가지 요건을 다 충족한다. 롱 훅 프로젝트로 대대적인 개수를 거쳐 최신예 구축함을 능가하는 성능을 가지게 되었고, 함선 구성도 주로 대 샤다이 전술에 걸맞게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임하면서 무장도 대 샤다이용으로 맞춰 놓은 상태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적이 너무 많다. 현재 블랙 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장을 다 쏟아부어 전탄 명중시킨다 쳐도 적함의 1/3도 격침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이겨야죠.”
오르가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그는 승리를 그렇게 멀리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태스크 포스 373의 승리는 적의 전멸이 아니다. 적의 정보와 장비를 회수한 지상팀을 안전하게 구출하고, 발 가르단 하스에 있는 증거를 인멸한 다음 도주하는 게 작전 목표 달성이고 승리다.
그렇다면 블랙 랜스에겐 지상팀이 작전을 완료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 당면과제다.
-함장님, 합류하겠습니다.
아래에서 우지의 롱소드가 애프터 버너를 켜 발 가르단 하스의 중력권을 뿌리치고 나오는 게 보인다.
오르의 생각으론 그가 지상팀의 지원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는데 팀장인 빈우의 생각은 또 다른 모양이다. 그도 블랙 랜스가 버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우지 일병. 롱소드의 상승 각도를 제가 보내주는 대로 맞추세요.
날아오르는 롱소드를 보며 오르는 블랙 랜스를 대기권으로 돌입시켰다. 함선과 동기화된 감각이 그의 신경계를 자극한다. 발 가르단 하스로 다가가자 중력이 점차 그의 몸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벌린 팔의 손가락 사이로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오르가 두 발을 힘차게 박차자 블랙 랜스의 추진기가 급가속했다.
거대한 구축함이 비스듬히 강하하다 행성 대기권에 물수제비처럼 튕겨 떠오르는 장면은 장관이다. 그리고 그 뒤로 롱소드가 따라붙는다.
-우지 일병. 우주전 장비는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항모와는 달리 구축함은 함재기 운용능력이 없고 강하 포드나 셔틀을 탑재하는 게 고작이다. 허나 블랙 랜스는 한정적이나마 전투기의 운용이 가능하다.
한 척의 구축함과 한 기의 전투기가 등속도로 비행하며 대기권을 튕겨 나온다. 블랙 랜스의 관통형 격납고 후면으로 롱소드가 들어온다.
지금 우지가 조종하는 롱소드는 블랙 랜스의 관성 제어장치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동조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격납고 내부에서 수동으로 움직여 무장을 가져오는 로봇암에 롱소드를 가져다 댄다. 그러자 롱소드에서도 로봇암이 나와 사이클론 어뢰를 비롯한 대 샤다이 무장을 잡았다. 모든 장착이 완료되자 롱소드는 흔들리는 격납고의 전면구를 애프터 버너로 가속해 빠져나갔다.
“오오, 역시 영웅 시에 쉰의 손자군요.”
아까 발 가르단 하스의 대지 폭격에서 시원찮은 성과를 보여줬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아무리 속도가 같다지만 대기권에서 튕겨 오르는 구축함의 격납고 안으로 들어와 무장을 장착하고, 가속해 빠져나가는 이 일련의 과정이 착륙은커녕 관성 제어장치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전부 수동으로 이뤄진 것이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시도도 못 하는 일이다.
-우지 일병. 목표 설정을 합니다. 좌우 협공입니다.
오르가 현재의 목표와 공격방법을 롱소드에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블랙 랜스는 방금의 묘기, 대기 수제비 기동으로 샤다이 함선의 포위망을 빠져나가 바깥에 선 다음 급선회를 하며 함수를 적 쪽으로 향했다.
연방의 구축함들은 대부분 선체를 관통하는 초대형 함축 코일건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위력은 전함의 주포 위력에 버금간다. 다만 연방 전함의 주포는 플라스마 병기라 샤다이에게 전혀 통하지 않아, 샤다이와의 전투 시엔 부포인 코일건들을 주로 쓴다. 이런 이유로 대샤다이 전투의 중핵은 중력 충각과 함축 코일건을 쓰는 구축함이 맡게 된다.
블랙 랜스의 함축 코일건은 기존의 것에 비해 위력은 떨어뜨렸으나, 발사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운용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방어막이 재생하는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연사할 수 있어 이론상으론 함축 코일건만으로도 샤다이의 방어막을 무효화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
“실전 사용은 처음이군.”
오르는 전신의 감각을 가다듬었다. 포대들의 목표 설정, 함축 코일건 충전, 어뢰 발사관과 미사일 발사대의 준비와 장전. 마지막으로 장갑 드론들을 살포했다. 미세한 금속 조각들이 함의 관성 필드 주변에 띄워졌다. 이건 장갑 보병의 발포 장갑처럼 샤다이 플라스마 포격을 막아내는 새로운 방어 전술이다.
목표가 된 샤다이함은 홀로 무리에서 떨어진 전열함이었다. 블랙 랜스는 먹잇감을 노리며 거리를 미묘하게 조절했다.
가까우면 저 전열함에 블랙 랜스가 가려져 다른 샤다이 함들의 포격 각도가 나오지 않는 반면 자칫하다간 포위되기 쉽다.
반대로 멀리하면 포위는 막을 수 있지만, 지상팀을 지원할 수 없으며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끌려가게 된다.
오르 함장은 노예검투사로 살았을 때의 전투 경험을 살려 적과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했다. 블랙 랜스가 행성 발 가르단 하스의 대기와 중력의 영향을 충분히 받을 만큼 멀리.
“발사.”
블랙 랜스는 마침내 공격을 시작했다. 먼저 4발의 사이클론 어뢰를 발사했고 이어 2파로 주포와 부포의 포격, 동시에 3파로 미사일들을 발사했다. 그 사이 2발의 사이클론 어뢰를 단 롱소드가 소행성대를 우회해서 반대쪽으로 날아간다.
명중탄은 주포들에서 먼저 나왔다. 고속으로 날아온 대형 텅스텐 탄자가 전열함의 방어막과 부딪혀 서로 소멸해간다. 이어서 미사일들이 요격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날아와 마지막으로 방어막을 날려버린다. 3파는 가장 먼저 발사되었던 사이클론 어뢰다. 정신없이 얻어맞던 전열함이 이 대형 어뢰를 눈치채고 요격하려 하지만 어뢰 자체의 방어막과 요격시스템이 끈질기게 방어한다.
마침내 어뢰가 샤다이 전열함에 명중했고 이 질량 가속 어뢰는 착탄부위부터 시작해 함 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마지막 쐐기는 블랙 랜스의 함축 코일건이 박아넣었다. 물경 40톤에 달하는 초대형 텅스텐 탄자가 초속 60km로 날아가 명중하자, 제아무리 샤다이 전열함이라도 배길 도리가 없었다. 우현이 전부 박살 난 전열함이 반격하기 위해 함 체를 반전시킨다. 멀쩡한 좌현이 이쪽으로 향하고 플라스마 포구가 밖으로 드러난다. 연방 전함의 주포에 맞먹는 위력의 포가 무려 36문이나 달려있다.
물론 블랙 랜스도 쉬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샤다이에 비하면 잽에 불과하기는 하나 연달아 날아간 함축 코일건이 방어막을 날리고 장갑을 갉아 먹는다. 이에 질세라 전열함에서도 반격의 플라스마가 날아오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가 없다. 샤다이의 포격 실력이 개판인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블랙 랜스가 발 가르단 하스의 중력과 대기권을 참호 삼아 숨은 영향이 크다.
지금 블랙 랜스가 절묘하게 걸친 자리는 제대로 된 사각 계산을 안 하면 맞추기 힘든 자리다. 방금 날아온 플라스마도 대기권에 마찰하다 아까의 물수제비 현상을 보이며 튕겨 나갔다. 포각을 위쪽으로 하면 블랙 랜스의 위로 스치고 지나가고, 밑으로 하면 발 가르단 하스의 중력권에 끌려 내려간다.
허나 저렇게 많은 포가 달려있으니 언젠가는 소발에 쥐잡기로 명중탄이 나올 것이다. 그 전에 저놈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선에 들어갑니다!
소행성대를 지나온 우지의 롱소드가 불쑥 튀어나와 이미 엉망이 된 전열함의 반대쪽, 엉망이 된 우현을 노린다. 롱소드는 자신의 추진기는 물론이고 양옆의 어뢰도 점화시켜 초고속으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블랙 랜스는 아까부터 함축 코일건 외에는 공격을 자제하고 있던 것이다.
전열함은 불시에 기습해온 롱소드를 어떻게 요격을 해보려 했지만, 우지가 노리는 우현은 이미 파손이 심각한 상태라 제대로 된 대공방어가 불가능하다. 고속의 롱소드는 어찌어찌 날아간 대공포의 화망이 형성되기도 전에 빠져나간다. 운 좋게 닿은 눈먼 포탄은 롱소드와 사이클론 어뢰의 방어체계로 막는다.
우지는 찰나의 순간에 가장 취약한 목표 부위를 찾아 롱소드를 몰았고 종말 가속을 시작한 어뢰를 분리해, 전열함에 처박은 다음 아슬아슬하게 함 체를 스치며 빠져나왔다.
뒤이어 절묘한 타이밍으로 날아간 블랙 랜스의 함축 코일건이 더해지자 샤다이 전열함은 양옆이 관통된 다음 반으로 갈라졌다.
-이이이얏호!
통신회선으로 우지의 환호성이 들린다. 그러나 오르는 그 함성을 따라 외칠 수가 없었다. 반으로 쪼개져 박살 나는 전열함 너머로, 진용을 갖춘 샤다이 함대가 이쪽으로 쇄도하는 게 보인 것이다.
전함을 일격에 소멸시키는 모니터함의 포격이 날아온다. 대기권과 중력을 씹어버리며 날아오는 무지막지한 포격이다. 연방 전함을 일격에 소멸시키는 초거대 플라스마가 아슬아슬 빗나갔지만, 그 잔열만으로도 장갑 드론들이 증발한다.
이어 조밀한 전열함의 포격이 비처럼 쏟아진다. 모니터함의 포격에 비해 약하다 해도 한발 한발이 연방 전함의 주포 위력이다.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구축함인 블랙 랜스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오르는 맹수와 싸울 때의 자세를 취했다. 창을 뒤로, 방패를 앞으로.
그가 머릿속으로 취한 자세에 블랙 랜스가 반응한다. 함선의 방어막들이 전면부로 집중되고 장갑 드론들이 오와 열을 맞춰 방어대형을 형성한다. 부유 포대는 요격태세를 갖추며 적들의 시선을 돌릴 어뢰와 미사일들을 준비한다.
그때 지상팀의 빈우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현재 지상팀은 파괴된 리퍼 함선 내부로 후퇴한 모양이다.
-오르 함장님. 제가 지정한 좌표로 포격 가능하겠습니까?
아까 남겨둔 2기의 부유 포대는 적들의 눈에 띄지 않아 격추되지 않았다. 작동을 개시하면 얼마지 않아 격추될 테니 그전에 서둘러 쏴야 한다.
-다행히 가능합니다.
샤다이 함대 진형 안에서 정지상태로 있던 부유 포대가 다시 작동을 시작하며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좌표 보냅니다.
빈우가 지정해준 좌표는 리퍼 함선 바로 바깥, 궤도포격의 직격 범위 안이다. 그러나 지상팀이 리퍼 함선 안으로 들어간 지금이라면 블랙 랜스의 궤도포격에도 무사할 것이다.
-전원 안으로 들어가. 함포사격이다.
빈우의 말에 팀원들이 외벽에서 떨어져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는 것이 전투정보창에 보인다. 그리고 작동을 시작한 부유 포대를 눈치챈 샤다이의 대공포대가 경계하며 움직이는 것도 보인다.
-발사.
오르의 사격명령에 아까 남겨놓은 2문의 부유 포대가 지상으로의 포격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파괴되기 전에 몇 발 더 쏘고 싶었지만, 지상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팀장인 빈우의 명령 없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유 포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놀란 샤다이의 포격이 집중되었고 제 할 일을 다 한 포대는 곧 파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상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날아오는 플라스마 포격을 텅스텐 포탄으로 요격하고, 장갑 드론들을 이동시켜 방어막을 구축한다. 함수의 코일건은 이미 쏠 겨를이 없으니 대신 중력 충각으로 명중탄을 휘어 튕겨낸다.
고열의 포격에 용암지대로 변한 소행성 군 한쪽에선 롱소드가 신들린 회피 기동을 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린다. 공격하지 않고 전열함들의 시선을 끌어주며 전투기 일개 편대의 몫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블랙 랜스도 반격을 해 다수의 명중탄을 내지만 깎여나간 방어막이 재생하기 전에 포격을 이어 넣을 수가 없었다. 날아오는 플라스마를 요격으로 쳐내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이다.
-어, 어어, 니미.
빈우의 비명에 시선을 지상으로 돌리니 지상팀이 대피해 들어간 리퍼 함선이 궤도포격의 충격으로 갈라진 지표 아래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