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함체가 기울어지고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얼마 안 있으면 태스크 포스 373의 지상팀원들은 배와 함께 저 밑의 산성 구름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밖으로 빠져나가!
빈우가 지정한 루트가 팀원 전원에게 공유된다. 태스크 포스 373 팀원들이 달려나갈 때 함선 안에 대피해있던 발 가르단 하스인들도 위기를 느끼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공중에 부유해서 이동하는 이들이라 함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초속 200m를 넘는 강풍에 휘말려 날아간다. 여린 촉수로 어디를 잡아보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날아가고 터진다.
-김 소령, 저들을 구할 수는 없겠나?
이케가미 상원의원이 빈우에게 부탁을 하지만 빈우는 들은 척도 않는다. 아니 대답할 겨를조차 없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그를 대신해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오우 씨발.
뒤늦게 이케가미 상원의원의 정보가 두뇌 통신으로 공유되자 위르겐이 뱉은 말이다. 옆의 모니카도 놀란 게 느껴진다.
-세상에! 이케가미 전 상원의장이시잖아요. 이런 분이 어떻게 이런 곳에….
무려 상원의장까지 해본 연방의 고위인사를 개 막장 진행 중인 보호 행성에서 만났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들이 놀라건 말건 빈우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린다.
-전원 부머에 붙어서 탈출한다. 모니카, 네가 부머로 팀원을 전부 들어 올려라.
빈우는 주변의 잡소리는 전부 무시하고 필요한 명령만 내렸다.
실험기인 부머는 샤다이의 중력제어기술을 응용해서 비행하는 장갑복이다. 헤비급의 동체에 여러 신기술이 들어있어 현재의 중력에서도 장갑복 예닐곱 기는 거뜬히 들어 올린다.
-네? 알겠습니다.
모니카는 즉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녀를 도우려고 바깥으로 먼저 나가본 위르겐이 혹시나 해서 발바닥의 스파이크를 꺼내 보지만 역시나 리퍼 함선에는 이빨도 안 들어가 주욱 밀린다.
-일단 모니카가 먼저 나가서 팀원들을 태울 준비를 해.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부머에 올라탄다. 부팀장, 의원님을 잘 지키세요.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십자 대형으로 모니카에게 붙은 다음 제트팩의 조종권은 나한테 넘겨라. 자세제어는 내가 맡겠다.
빈우의 명령에 팀원들의 제트팩 조종권이 빈우에게 넘어온다.
지금 배 바깥은 강풍이 몰아치고 있어 장갑복의 제트팩으론 제대로 날기 힘들다. 제아무리 부머라 할지라도 4명의 지상팀에 1명의 민간인을 달고는 제대로 부상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상승은 모니카가 조종하는 부머의 출력에 맡기고 빈우가 팀원들의 제트팩을 써서 자세제어를 맡는 것이다.
함선 바깥으로 탈출한 팀원들이 차례로 모니카의 부머에게 모여들었고, 모두 다 탑승하자 부머는 추락하는 함선을 밑으로 하고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강풍이 몰아쳤지만 빈우의 조절대로 각 팀원들의 제트팩이 분사되어 자세는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아, 자료가 아직 남았는데….
모니카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머 곳곳에 박박 긁어모은 리퍼의 장비와 부품들이 있는데도 아쉬운 모양이다. 무선으로 자료의 복사본이 부머의 데이터 칩으로 넘어오는 중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일단은 생존이 먼저다. 지표에 도착한 다음에는….
말을 흐린 빈우는 궤도 상을 올려다보았다. 어찌어찌 전열함 한 척을 격침한 블랙 랜스가 9척의 샤다이 함선에게 뭇매를 맞는 게 보인다. 간간이 반격하고는 있지만, 화력으로나 수적으로나 압도적인 열세라 얼마 더 버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개조한 구형 구축함을 가지고이런 단시간에 전열함 한 척을 날려버린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다.
시선을 다시 주변으로 돌린 빈우는 현재의 상황과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명령을 마무리 지었다.
-…셔틀로 이동해서 탈출한다.
팀원 누구도 ‘어떻게’라고 묻지 않았다. 팀장이 ‘어떻게든’이라고 대답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팀이 타고 내려온 셔틀은 아직 능선 너머에 대기하고 있었다. 빈우는 거기에 라이노 2기를 회수한 다음 지상팀 쪽으로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단 팀원들이 셔틀로 올라가 블랙 랜스에 타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도망은 칠 수 있을 것이니 작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셔틀을 타고 블랙 랜스로 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함장님, 지금 지상팀이 셔틀을 타고 올라가면 회수 가능하겠습니까?
대답은 약간의 딜레이를 두고 돌아왔다.
-그 방법은 추천 못 하겠군요. 본 함은 지금 호위할 여력이 없고 셔틀이 올라온다 해도 안전하게 회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샤다이 함선 9척의 집중포화를 신들린 조함과 방어 전술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블랙 랜스다. 그 가열한 포화 속으로 셔틀이 날아온다면 블랙 랜스로썬 지킬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빈우에게 다시 오르 함장의 말이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선 이쪽에서 내려가야죠. 셔틀이 일정 고도로 올라오면 롱소드로 셔틀을 밀어 올리면서 블랙 랜스가 대기권을 돌입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상팀이 탄 셔틀을 도중에 랑데부해서 격납고로 집어넣은 다음, 후퇴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오르 함장의 말투는 왠지 생사를 앞둔 결투를 하면서 웃는 듯 했다. 실제로 그는 웃고 있었다.
대기권을 돌파해 올라가는 셔틀을 대기권으로 강하하는 구축함이 낚아챈다는 발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지만 어쨌든 오르 함장이 한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다.
이어서 대략적인 이동궤도와 좌표가 지상팀원에게로 들어온다. 그런데 블랙 랜스의 진입 각도가 위험하다. 이 각도로 발 가르단 하스로 진입하다간 강하 속도와 대기의 저항, 각도의 3박자에 의해 블랙 랜스는 대기권에서 튕겨 나간다.
-과연.
빈우는 오르 함장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먼저 물어보았다.
-가능하겠습니까?
-종종 해봤고, 사실 아까도 한 번 해봤습니다.
아주 믿음직스럽다.
-알겠습니다. 셔틀이 도착하는 즉시 지정된 궤도를 따라 탈출하겠습니다. 전원 이동.
땅 위로 도착한 팀원들은 강풍을 피해 갈라진 지표 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산성 구름이 솟구쳐 올라서 비교적 안전한 곳을 찾는 데만 해도 꽤 애를 먹었다. 불렀던 셔틀은 얼마 안 있어 도착할 예정이다.
-팀장님, 이상 전파가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샤다이가 전자전을 한단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말이죠.
주변을 경계하던 위르겐이 학을 뗀다. 굵은 자갈이 날리는 강풍에 산성 간헐천까지 겹쳐 경계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데 여기다 전파방해까지 들어오니, 눈과 귀가 다 가려진 셈이다.
-발 가르단 하스인들의 단말마일세.
이케가미 의원의 설명이다.
-그들은 전파로 대화를 하지.
그러고 보니 발 가르단 하스인은 전자파로 주변을 인식한다고 했다. 전자파로 의사소통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케가미 상원의원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전파들이 마치 실제 비명이라도 되는 양 헬멧 위로 귀를 막았다.
지상으로는 블랙 랜스가 쏜 포격의 여파로 죽어가는 발 가르단 하스인들의 비명이, 지하로는 방금의 공격으로 뒤집힌 땅에 파묻혀 죽어가는 보호 종족들의 비명이 전자파가 되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난 그저 옛날의 과오를 되돌리려 했을 뿐인데…. 왜 주변에서 날 놔주질 않는 거야.
그의 넋두리는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자의 울부짖음 같다. 사건의 당사자랄 수 있는 373의 팀원들은 그에게 해줄 말이 없고 줄 시선도 없다. 다만 예전에 경호를 섰던 아룹만이 이케가미 의원의 곁에서 그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케가미 의원의 수상한 언행에 빈우는 뭔가 캐묻고 싶었다. 주전파의 거두가 자신의 사상을 저렇게 바꾼 채, 홀로 보호 행성에 은거하고 있는 것부터가 굉장히 수상하다. 아까 이케가미 의원의 거주지에서는 자칫 그에게로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갈 뻔했지만, 지금은 어떨까. 빈우는 슬며시 운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후코라고 했던가요? 그 발 가르단 하스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빈우의 질문에 이케가미 의원이 흠칫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뚝에 달린 데이터 패드를 만져 뭔가의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다행히도 거주지는 괜찮군. 후코도 무사하네.
그렇게 안도하는 이케가미 의원을 빈우도 거든다.
-그거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제 명령으로 인해 의원님의 지인이 다칠까 봐 걱정했습니다.
이는 포격의 여파가 거주지가 있는 동굴에는 가지 않은 것을 아는 빈우의 빈말이다. 블랙 랜스로 올라가고 상황이 안정되면 사자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것이다. 무리로 돌아간 사자는 건드릴 수 없다. 하이에나는 그전에 최대한 먹이를 빼앗기 위해 조심스레 송곳니를 놀렸다.
그렇게 할 참이었다.
-상공에서 뭔가 강하합니다.
파트리샤가 자신이 탐지한 화상을 전 팀원에게 공유했다. 인간형으로 생긴 물체 3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지상팀원으로부터 제법 먼 거리의 고지대에 착지했다.
이럴 때는 십중팔구 그딴 거 없고 백 퍼센트 샤다이다.
-팀장님, 보세요. 박으려면 저렇게 박아야 한다고요.
빈우는 파트리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팀원들 전원은 두뇌 통신으로 진하게 풍겨오는 ‘좆같네, 시발’이란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정도쯤 되는 베테랑이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 않고 팍팍 드러낸다는 점에서, 빈우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게 지금 지상으로 강하한 샤다이들은 셔틀의 이동궤도를 훤히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 놈들은 언제든지 셔틀을 요격할 수 있다. 팀원들이 셔틀에 타려는 순간 어떤 꼴이 날지는 뻔했다.
-이 새끼들, 도대체 몇이나 있는 거죠?
혀를 차는 위르겐의 말에 제대로 대답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빈우가 팀원들에게 질문했다.
-글쎄다. 중요한 건 숫자보다 저놈들이 왜 저기 내려왔을까, 지. 우리 쪽이나 셔틀 쪽으로 직접 강하하지 않고 말이야. 우릴 못 봐서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일단 착륙한 놈들에게서 이쪽을 눈치챈 듯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셔틀 쪽으로도 공격하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모래와 파편이 가득한 강풍 속이라 적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인간형인 것 정도는 실루엣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 아군이 아닌가 싶지만 움직임이 영 아군 같지가 않다.
-샤다이들은 근접전에 들어오면 불리하잖습니까. 그걸 알고 저 멀리 떨어진 거 아닐까요?
위르겐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빈우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팸들이 그걸 따질 정도로 머리가 좋진 않았지. 그리고 셔틀은 왜 저리 내버려 둘까? 지금 바로 쏘면 될 텐데 말이야.
빈우가 부른 셔틀은 저공으로 배를 깔듯이 비행하며 암석 사이로 엄폐를 하면서 오고는 있지만, 고지대에 자리 잡은 샤다이가 쏘려면 못할 것도 없다.
스팸들이라면 대번에 쏘고 난리가 났을 거다.
-팀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룹의 말투는 동의를 구하는 말투였다. 그는 샤다이들의 속내를 대강 짐작한 듯싶었다. 빈우도 자신이 짐작한 바를 털어놓았다.
-흐음, 아마 탈출하는 우릴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탈 셔틀을 원거리에서 추적하는 거 같네요. 탈 때를 노려서 싹 쓸어버리게. 근데 이 정도 머리 굴리는 놈들이면 꽤 골치 아픈데….
지금 빈우가 걱정하는 것은 저놈들이 혹시나 리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리퍼가 아니더라도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놈이 아니라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라면 성가시다.
-어쩔까요?
부팀장의 말에 빈우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먼저 칩시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란 말이야말로 이럴 때 쓰는 것일 거다. 적들은 고지대를 점하고 있으니 유리하고 이쪽은 빠듯한 시간에 탈출해야 하니 불리하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을 흔들어야 했다.
막 등장한 샤다이들은 골에 엄폐한 지상팀의 12시 방향 고지대에 당당히 서서 셔틀을 주시하고 있었다. 표적이 된 셔틀은 10시 방향에서 9시 방향을 거쳐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빈우는 라이노 2기를 도중에 착지시켜 바위 틈새로 엄폐시킨 뒤, 셔틀의 AI에겐 속도보다는 엄폐를 위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부팀장은 여기서 위르겐, 모니카와 함께 의원님을 지키면서 놈들을 견제하세요. 나와 파트리샤는 3시 방향으로 우회해서 놈들을 공격하겠습니다. 허나 부팀장, 전투보다는 탈출이 우선입니다. 상황 봐가며 셔틀 쪽으로 가세요.
일단 팀을 둘로 나누면 각각 팀장, 부팀장 조로 나뉘고 이케가미 의원을 누군가 돌보며 지켜야 하므로 아룹은 후방이다. 또 위르겐은 지금 포격용 무장으로 나온 터라 원거리에서 포격을 하는 게 좋고 모니카는 비전투 인원이니 당연히 후방이다. 무엇보다 중력을 이용하는 부머의 방어능력은 플라스마 공격을 상대로 출중하기에 여차하면 위르겐을 지켜줄 수도 있다.
우회 조는 침투능력이 뛰어난 인필트레이터를 입은 파트리샤와 팀장인 빈우다. 인필트레이터는 팀원 중 기습과 위장능력이 가장 뛰어나니 우회 공격에는 안성맞춤이고, 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다. 빈우는 실험기인 컨커러를 입고 왔지만 방금 XPS의 성능을 확인했으니 방어능력은 가장 좋은 편이다.
-팀장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빈우와 파트리샤 두 명이라면 스팸 셋은 순식간에 쓸어버리겠지만, 지금은 탈출이 급박한 상황이다. 자칫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우회 조 두 명은 진짜 낙동강 오리 알이 된다.
-걱정 마세요. 이빨 안 들어간다 싶으면 입 싹 닫고 튈 테니.
우회 조는 골을 따라 샤다이의 시선을 피하며 돌아갔다. 고지대의 샤다이는 셔틀에서 라이노를 내리는 걸 보고 뭔가 반응은 했지만, 아직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가자, 파트리샤.
컨커러와 인필트레이터는 라이노의 맞은편 위치로 신중히 이동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