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62화 (62/301)

62화

빈우는 주변을 잠시 둘러본 다음 은신처로 돌아왔다. 은신처라 해봐야 착지한 다음 이리저리 헤매다 들어온 땅 밑의 공동일 뿐이다. 아군은 이제 이 행성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했고 주변에는 원주민과 샤다이들 뿐이다. 이제 빈우와 이케가미 의원, 두 사람은 블랙 랜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히토미….

실신한 이케가미 의원은 지금 은신처 바닥에 누워 누군가를 찾으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다친 곳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탓에 삼도천에서 반신욕을 하는 것도 모자라 자꾸 물 밑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물론 부상 당시 즉시 파편을 빼내고 치료용 마이크로 머신을 주사하긴 했지만, 그건 군용 의료용품이라 군용 강화육체가 아닌 민간인의 몸에는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민간인용 의료용품이 있었더라면 훨씬 도움이 되었겠으나, 빈우는 이번 작전에선 필요 없으리라 판단해 챙기지 않았다. 부상 당사자인 이케가미 의원이 입은 우주복엔 들어있었지만 아까 리퍼에게서 도망칠 때 허리띠와 함께 버려졌다.

문득 강하하기 전 위르겐이 장비를 점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은 민간인용 물품까지 챙기고 있었는데, 그런 걸 뭣 때문에 챙기냐고 물어보니 ‘없으면 꼭 필요하더라’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하긴 민간인들과 부대낄 일이 많은 뱅가드다운 대답이었다.

-히토미, 응 그래. 아빠다, 아빠야….

이케가미 의원은 누운 채로 팔을 휘젓다가 손에 잡힌 작은 바위를 하나 끌어오더니, 그것을 토닥토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표정도 한결 나아진 것을 보니 아마도 잠에서 깬 딸을 다시 달래서 재우는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 모습은 빈우의 기록 속에 있는 그의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기록 속의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뜨겁게 도전해서 냉철하게 실행하는 사람이었지, 오늘 본 것처럼 우유부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이케가미 상원의원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일 년 전 이곳 발 가르단 하스에 온 것일까. 또 어떤 이유로 샤다이들이 그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셔틀에서의 리퍼는 분명히 이케가미 의원을 납치하려고 했었다. 그 샤다이가 인간을 죽이지 않은 것이다.

이 외에도 아까 그의 거주지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풀 기회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방해가 들어와 미처 물어보지 못했었다. 물론 이런 의문들은 시야를 달리해서 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먼저 이케가미 의원이 자신의 사상을 바꾸었다 한들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도 연방의 정치가인 이상 연방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주의와 사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문제는 그 원인이 무엇이냐, 또 그 결과가 과연 연방에 이익이 되는 것이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케가미 의원이 적과 내통하였다 한들, 이 역시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아군의 정보를 적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필요한 정보를 얻어 전략적 우위에 서는 것은, 그가 정치가인 이상 이미 예술의 영역까지 다다랐을 외교 기술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 과연 연방에 이득이 되느냐는 것이다.

발 가르단 하스에서 우연히 재회한 이케가미 의원은 처음에는 빈우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군사정보국의 어구인 ‘어차피 우리들은 연방을 위해 일하지 않나, 우리들 사이에 비밀이 있을 순 없지 않은가’를 말했었다. 즉 정보교환에-제공이 아니라 교환에-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히토미? 히토미?

그때 이케가미 상원의원이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멍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싶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까 셔틀에서 추락할 때 제가 의원님을 구출해서 이곳까지 모셨습니다. 다른 팀원들은 모함을 타고 일시적으로 후퇴를 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다시 구하러 올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래… 그런가. 알겠네. 잘 부탁하네.

빈우의 말을 들은 이케가미 의원은 대강 상황을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우는 그런 그를 보며 어느 정도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겠다 싶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행성은 26시간 뒤면 끝납니다. 뭐, 그전에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은 제가 보장하지요.

-끝난다고? 26시간 뒤에?

멍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이케가미 소이치로에게 빈우는 현재의 행성 지도를 띄워 보였다.

-네. 현재 발 하스 항성계는 이곳 발 가르단 하스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들이 접근하는 이상 현상이 발생 중입니다. 항성인 발과 하스도 물론 끌려 오고 있고요. 그래서 앞으로 약 26시간 후 발 하스 1과 발 하스 6이 우리가 있는 발 가르단 하스와 충돌할 예정입니다.

설명을 다 들은 이케가미 의원은 쿨럭거리며 웃었다.

-아냐, 아냐. 결코 끝나지 않아. 결코.

기침이 가라앉자 그는 자세를 세우며 빈우를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자네들이, 아니 우리가 끝낼 뻔했지.

그러면서 이번엔 이케가미 의원이 행성 지도를 조작해 확대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그래, 이 행성 가르단은 발과 하스 이 두 항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가르단요? 발 가르단 하스가 아니라?

빈우가 묻거나 말거나 이케가미 의원은 자기 말을 계속했다.

-이건 행성 가르단이 항성 발의 궤도를 공전할 때의 모습이라네. 발의 복사열로 인해 지표 아래의 증기와 광물들이 녹아 끓어오르며 분출되는데, 이때 지표를 구성하는 암석층의 미세한 구멍들이 여과와 증류탑의 역할을 하지. 그래서 상대적으로 입자가 작고 비중이 낮은 혼합물들만이 지표까지 닿는다네. 그리고 발의 궤도를 벗어나면 이 금속층들은 식어 가르단의 지표에 얇은 금속 피막을 형성하게 되지.

화면상의 발 가르단 하스는 마치 열핵폭격을 당해 방사선 유리구슬이 된 행성마냥 반짝거린다. 한데 저 색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색이다.

-다음, 이건 가르단이 항성 하스의 궤도를 지날 때의 모습이야. 하스에서 나온 강력한 전자파가 가르단을 자극하면, 지표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금속 증기들이 가열되고 팽창해서 금속 피막층을 향해 맹렬하게 솟구치게 되지.

화면에는 분출된 증기들에 의해 공중으로 날아오른 금속 피막들이 둥글게 닫히며 금속 풍선들이 되어가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제야 뭔지 알겠다. 저것들은 발 가르단 하스인이다. 아직 촉수 같은 부속지라던가 여타 기관들이 없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바로 발 가르단 하스 인이었다.

이 발 가르단 하스는 항성 발과 하스를 순환하며 생명을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진 말할 수 있군.

그러면서 이케가미 의원은 지치는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발 가르단 하스의 순환 생태계를 개박살 내놓은 것은 바로 인류연방과 구 지구제국, 즉 인간들이었다.

행성에 반물질 폭탄을 투하하고 대기층을 갈아버렸으니 발 가르단 하스의 정교한 혼합 물질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을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이어서 발생한 이상 현상에 발 가르단 하스가 두 항성 사이에 정지해 버렸으니, 저 순환과정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 의미는 새로운 발 가르단 하스인은 태어날 수 없게 되었단 소리였다.

처음에 보였던 이케가미 소이치로의 분노가 이제는 이해가 간다. 연방은 단순히 발 가르단 하스인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연속성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나 노여워하셨던 겁니까.

한데 아까 이케가미 의원은 분명히 말했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나직하게 떠보는 빈우의 말에 자리에 앉은 이케가미 의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회답했다.

-시장하군.

빈우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좀 생뚱맞긴 했다. 허나 이케가미 의원이 정보를 풀기로 한 것 같으니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다.

-지금은 군용 식량뿐입니다만… 이것도 못 드시겠군요. 나중에 모함으로 올라가면 제대로 대접하지요. 뭐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갓 지은 따끈한 쌀밥으로… 계란 밥을 만들어 먹고 싶구먼.

빈우의 기록에 의하면 이케가미 의원은 벼농사를 지었던 탓인지 쌀밥을 꽤 특별히 취급했다. 밥그릇에 붙은 밥알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떼어먹을 정도로.

-다행이군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내드릴 수 있습니다.

살아 돌아가면 계란 밥이 대수랴,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만들어 먹어도 된다. 그런데 상원의원 나리의 입맛은 아니나 다를까 조금 까탈스러우시다.

-생성기로 만든 것 말고, 진짜 계란으로 말일세.

그 말에 태스크 포스 373 팀장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순양함이라면 모를까 블랙 랜스는 구축함이다. 진짜 계란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화물 적재량이 넉넉하진 않다.

-흠,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는 보겠습니다. 아마 액상 계란이나 분말 계란은 있을지도요. 액상으론 안될까요?

-허어, 뭐 되었네. 생성기 걸로 참아보지. 참, 계란 하니까 생각나네만, 아직도 아나스타샤 양이 자네 비서인가?

전 상원의장이 정보국 소령의 안드로이드 비서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모함에 있습니다.

-그래, 그녀가 그때 만들어 줬던 카스텔라가 정말 맛있었는데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었지. 올라가면 꼭 인사를 해야겠어.

그러고 보니 빈우의 기록에도 있다. 울토르 프로젝트에 대한 개요를 논하는 자리였는데 이야기가 길어지자 아나스타샤가 갓 만든 카스텔라를 내온 적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의원님께 칭찬받으면 꽤 기뻐할 겁니다.

약간 웃음기를 띤 빈우의 말을 듣고선 옛일을 추억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케가미 의원이 지나가는 어투로 폭탄을 하나 던졌다.

-자네, 김빈우 소령이 맞나?

순간 빈우의 손가락이 펄떡 뛰었다. 사자가 일어서자 하이에나가 놀라서 뛴 것이다. 이 신경 신호를 쓸모없는 거로 여긴 장갑복이 가만히 있어 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 베테랑 정치인에게 빈우의 동요를 들킬 뻔했다.

-새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여쭙고 싶은 건 오히려 접니다. 이케가미 의원님이야말로 정말 본인이 맞으신지요?

빈우도 반농담조로 대꾸하자 이케가미 의원이 고개를 으쓱한다.

-예전과는 너무 달라서 말일세. 자네는 예전에 아나스타샤 양을 절대 그렇게 대하지 않았었지.

-눈매가 꽤 매우시군요.

-이 정도로? 자네야말로 눈매가 무뎌진 것 아닌가? 안드로이드가 싫다면 버리고 새로 사면 될 일. 하지만 당시의 자네는 안드로이드 비서인 아나스타샤 양을 철저히 무시했었지. 마치 사물이 아닌 인간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야. 한때 특별한 감정 교류가 있었던 안드로이드가 아니고서야 주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지 않나. 한데 지금은 어떤가? 꽤 살가운 반응 아닌가? 왜 그렇게 바뀐 거지?

역시 무시하면 안 된다. 수많은 정계의 괴물들 사이에서 군림했던 상원의장이다. 그것도 계파에서 밀어준 얼굴마담이 아니라 스스로 정적을 제거하고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만큼 상대의 약점을 찾고 후벼 파는 데는 도가 텄다.

-너무 그러지 말게나. 자네가 마치 나 같아서 하는 말이야. 주변에서 그러더군. 자네가 아나스타샤 양을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딸아이를 보는 눈빛 같다고 말일세.

마치 장갑복 헬멧 너머로도 빈우의 표정이 보인다는 듯 이케가미 의원이 너스레를 떤다. 딸이라면 아까 잠꼬대를 하며 말했던 히토미란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라면 이케가미 의원은 어릴 때는 그렇게 애지중지 다뤘던 딸을 나중에는 무시했다는 말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카스텔라를 먹으며 얘기를 나눌 때만 해도 자네는 마치 장전된 총과도 같은 사람이었네. 의심 없이, 후회 없이, 자비 없이 마치 당기면 바로 발사될 정예대원 말일세. 그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바뀌다니 나로서도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어느 쪽이 김빈우 소령인가?

삼도천으로 세례를 받으면 회광반조라 하던가. 다 죽어가던 사자가 일어나 어슬렁거리니 하이에나는 뒷걸음질 칠 뿐이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습니다. 살다 보니 좀 팍팍하게 변했고 그때가 의장님을 뵐 때였죠. 요즘 다시 예전 모습을 찾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의원님은 왜 그렇게 바뀌셨습니까?

-허어, 자네도 그랬나? 나도 그랬다네. 나도 처음에는 비둘기파였다네. 그때만 해도 외계종족과는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지. 바뀐 이유는… 자네 혹시, 노라 맥켄지 사건 아는가?

알다마다. 그 사건의 여파로 빈우의 고향까지 위험해진 적이 있었고 커서는 사관학교에서도 단골로 다루던 문제였다.

-목타하에 개미와 벌을 소개한 분이죠.

노라 멕켄지는 자치 행성 콘스탄틴의 총독이었다. 그녀는 인류연방을 경계하고 적대하는 곤충 종족인 목타하에 대해 평화적인 접근법을 모색하려 했다.

자치 행성은 외교권이 없기에 외계종족인 목타하와는 연방을 거쳐 접촉해야 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선조치 후보고가 승인되는 전례가 있었던 만큼, 그 접근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당시 목타하는 인류를 전쟁에 미쳐버린 호전적인 종족, 골격이 내부에 있는 부드러운 피부의 혐오스러운 종족으로 보고 굉장히 경계했다. 그 혐오감과 공포심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콘스탄틴의 총독 노라 멕켄지는 인류만이 전쟁을 벌이는 생물이 아니다, 다른 생명체들도 전쟁을 벌인다, 인류를 우주 유일의 전쟁종족으로 보지 말아 달라며, 개미와 벌들의 전쟁을 담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곤충 종족인 목타하에게 보여주었다.

의도는 좋았다. 불쌍한 노라 멕켄지. 그녀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목타하의 입장에선 개미와 벌도 지구의 생명체였던 것이다. 얼핏 봐도 비슷한 종에 속한 생명체들이 상상도 못 할 레벨의 싸움, 아니 전쟁을 하는 것을 본 목타하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저쪽 동네는 대체 어떤 지옥도가 펼쳐진 것이냐.”

인간의 입장으로 바꿔보자면, 아주 호전적인 제국의 후예인 곤충 종족들이 우리는 제국의 후예지만 그들만큼 호전적이진 않다. 그리고 자기만이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며 보여준 영상자료에 온갖 유인원들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나오는 셈이다.

그러면 인류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쪽은 종속과목을 막론하고 죽도록 치고받는 놈들이로구나.

그런 이유로 목타하는 살기 위해, 정당방위로, 인류연방과 콘스탄틴에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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