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흠, 내 머릿속의 정보를 마구 들여다본다고?”
“그건 어쩔 수 없어. 나의 분신체나 샤다이들은 멀리 떨어져서도 내 플라스마 신경계에 접속하는 게 가능해서 대화할 수 있지만 너는 그게 안 돼. 그래서 내가 직접 너의 신경계에 접속한 다음 네 머릿속의 정보 중에서 알맞은 정보를 뽑아내 너에게 보여주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네 도서관의 글자를 조합해 문장을 만든다고 봐야지.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단계의 언어와 개념으로.”
그렇다면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바깥의 상황은 어떻지? 나는 죽은 건가?”
“아니, 아직은 접속 상태로 있어.”
빈우의 앞에 그의 육체가 현재 처한 상황이 보여진다. 고온의 플라스마에 접촉해 녹고 타고 증발하는 육체가 거의 정지화면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보인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접속 가능 상태다.
“개수 제한, 시간제한 없다는 거 개소리구만.”
분명 생각이었을 뿐인데 그게 말로 나오자 빈우는 흠칫했다. 하긴 여기가 빈우의 머릿속이라고 하니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지금 고속사고 중이니까 바깥의 네가 죽을 때까지는 여기 체감시간으로 한두 시간 정도 걸릴걸? 내가 보아하니 그 전에 질문이랑 대화는 다 끝날 것 같은데? 그래서 긴장하거나, 조바심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 말한 거 뿐이야. 이런 기회는 나에게도 흔하지 않단 말이지. 대화가 끝나면 보내줄게. 아 물론 살려서. 또 최대한 치료는 해줄 테니 나머지는 동료들에게 맡겨.”
“살려주신다니, 아이고 고마우셔라. 난 네가 주마등인 줄 알고 좆됐다 싶었지.”
싱겁게 농담하며 어깨를 으쓱한 빈우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 온도가 낮아졌다.
“이케가미 의원님은? 왜 그를 죽인 거지?”
“그가 원했으니까.”
궁금한 것부터 아무렇게나 물어보면 이렇게 단편적인 대답만 나올 뿐이다. 질문에 대한 제한이 ‘비교적’ 여유 있다면 순서대로 차근차근 물어보는 게 최고다.
“좋아, 그럼 먼저… 넌 누구지?”
“이 구멍투성이 암석에 쌓인 가스 행성을 말하자면 가르단, 발과 하스의 에너지를 받아 폭발해 플라스마 신경계와 지성을 얻은 나를 말하자면 발 가르단 하스. 다들 그렇게 부르지. 그 외 대략적인 설명은 이케가미 소이치로에게서 이미 들었군.”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른데….”
구 지구제국에서부터 내려온, 그리고 보호 행성에 대한 정보로는 발 가르단 하스가 정식명칭이었다.
“어차피 그건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니었잖아?”
그의 말마따나 발 가르단 하스에 관한 자료는 삭제된 데이터베이스를 복구하면서 얻은 것이다.
“그러면 너와 대화할 조건은 뭐지?”
이케가미 의원은 일 년간이나 기다렸고 샤다이는 도와주러 와서도 대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했다. 그렇다면 대화의 가치는 상당히 높을 것이고 그 조건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 자신이 가진 업이지. 카르마. 스스로 했던 말과 행동이 인과가 되어 결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과 복잡하게 엮여 계산할 수 없는 답으로 연결되는 것. 동족 없이 혼자서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진미이자 성장 동력원이야. 분신체들을 만들고 인격을 나누었다 한들 거기서 나오는 카르마는 한계가 있지. 알잖아, 생성기로 만든 집밥과 3성 레스토랑은 다르단 걸?”
빈우는 자신을 마주보는 발 가르단 하스의 눈동자가 자신의 것과 확실히 다르단 것을 알았다. 그 눈 너머로는 빈우가 이제껏 했던 일들이 일렁이며 보인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고 위태위태하다. 정보국의 장교로서 했던 일이니만큼 그 영향력은 결코 작을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발 가르단 하스의 입맛에 맞았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케가미 의원도 합격점이었겠지. 차고 넘칠 정도로.
다만 그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우주를 누비는 샤다이는 뭣 때문에 탈락인지 모르겠다.
“이케가미 의원은 왜 너와 대화를 하려고 했었지?”
“그야 난 오래 산 만큼 아는 것이 많거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내 연산능력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아까 내가 카르마를 좋아한다 했지? 수많은 인과에서 이어진 수많은 응보를 보게 되면 눈이 좀 트이게 돼. 내가 네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네가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좀 더 좋은 해결방법을 예측할 수 있지. 근데 이게 좀 잘 맞는지, 많은 종족들이 물어보러 오더라고. 그래, 너희들의 황제도 말했어. 자신의 예측과는 다른 예지의 영역이라고.”
뜻밖의 단어에 빈우는 놀랐다.
“뭐? 황제? 설마 넌 지구제국의 황제와도 만난 적이 있나?”
“못해도 백억 년은 살았는데 백 년 전에 살았던 너희 황제랑은 못 만났겠냐?”
“잠깐, 그러면 비홀더 전대는 왜 너에 대해 몰랐지? 왜 너를 공격한 거야?”
빈우의 질문에 발 가르단 하스가 답이 궁한지 고개를 모로 꺾었다.
“네 머릿속에 자료가 너무 없어서 대답하기 곤란한데, 그래도 몇 가지 답을 보여줄게. 첫째, 지구제국의 황제는 지극히 인류 중심적인 존재였어. 필요에 의해서 나를 찾아왔다가도 인류를 위해 나를 멸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럴 존재야. 또 비홀더 전대가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이라곤 하지만 황제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 애초에 황제는 비밀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발 가르단 하스가 빈우 앞에 영상을 보여준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투덜거리는 레드우드 중장과 빈우 자신의 대화다.
“그쪽에서 잘도 보내줬네요.”
“뭐, 달라니까 주기는 하던데 말이지. 십새끼들.”
비홀더 전대가 보내준 영상을 보면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다. 이어서 바뀐 영상에서 이 섬의 목소리가 들린다.
“걸리적거린다. 반물질 폭탄 넉넉히 채워서 저기에 떨어트리자.”
영상을 거기서 정지시킨 뒤 명령을 내리는 이 섬을 보며 발 가르단 하스가 말했다.
“이 섬. 황제의 첫 번째 검이지. 내가 알기론 일을 이렇게 허투루 처리할 놈은 아닌데 말이야? 백 년 전의 이놈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회를 쳤으면 쳤지 다른 행성에 처박는 짓은 안 했을걸? 또 모르지, 그날은 또 심기가 불편해서 사고를 쳤을지도.”
그러고 보니 비홀더 전대는 루비콘 라인에 있던 발 가르단 하스를 연방의 보호 행성이라고 여태껏 건드리지 않았다가, 갑자기 4 주전 샤다이와 전투 때에는 반물질 폭탄을 냅다 퍼부어 버렸다.
“그렇다면 놈들이 일부러 이 장면을 연출하고 우리에게 보내준 거란 말이야?”
“말했잖아. 자료가 너무 없다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토끼몰이 작전부터 훑어봐야 할 거야. 입안자가 누구인지. 숨겨진 목적이 무엇인지. 그렇다면 나에게 샤다이 함선이 떨어진 게 이 섬의 변덕에 의한 사고인지, 아니면 비홀더 전대의 손을 빌리려는 누군가의 음모인지 알 수 있겠지.”
누군가의 음모라면 무엇이 목적일까. 발 가르단 하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아니면 이케가미 소이치로 전 상원의장을 암살하는 것?
발 가르단 하스의 말대로 정보가 너무나 적다.
빈우가 잠시 생각에 빠지자 발 가르단 하스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자, 말이 조금 샜는데 이케가미 소이치로가 왜 나와 대화를 하려고 했는지 물었지? 그것부터 대답해 줄게. 첫째, 그는 계단을 내려온 자들로부터 너희 종족을 지킬 방법을 원했어.”
오브리가도의 감옥에서 알탄훼아나에게서 들었던 단어다. 그때 그녀는 워프 비스트를 계단을 내려온 자들 또는 너무 젖은 자들이라고 말했었다.
“잠깐 그 전에. 워프 비스트의 정체와 그 발생원인은 대체 뭐지? 그것부터 자세히 알려줘.”
“흐흠. 이케가미 소이치로도 같은 질문을 했었고, 그에 만족할 만한 답을 들려줬지만…. 넌 안 되겠는데.”
“왜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발 가르단 하스의 눈동자는 굉장히 공허했다. 그 속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글쎄, 넌 이미 알고 있잖아. 워프 비스트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내가?”
반문하는 빈우에게 발 가르단 하스가 다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꾹 눌렸다.
“그래. 너의 머릿속, 잠겨있는 부분에 확실히 정보가 있어.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가.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잠겨서야 나도 손을 못 써. 아까 말했지? 내가 너에게 주는 정보는 네 머릿속에서 뽑아낸 단어와 개념을 조합해 너에게 이해할 수 있는 단계로 번역해 준다고. 근데 정보가 이렇게 잠겨져 있으면 내가 너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단어가 있는 책장이 아예 잠겨져 있는 셈이거든. 외부에서 다른 방법으로 전해준다면 모를까 이렇게 머릿속에서라면 너에게 어떻게든 정보를 전해준다 해도 너 스스로 거부해버려.”
빈우의 머릿속에 잠겨있는 정보라면, 트리니티로 잠겨있는 포말하우트 점프공간에서의 전투와 정보국에서 묶어놓은 울토르 프로젝트의 핵심 부분이다. 어쩌면 둘 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참고로 이케가미 소이치로의 정보는 잠겨있지 않았어. 밖으로 표현하는 게 막힌 거지. 그래서 그와는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게 가능했지만 넌… 지금 정보가 잠겨있어. 인식이 안 돼.”
“그렇다면 내가 너와의 연결을 끊은 다음 너의 분신체인 후코를 통해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도록 해줘.”
직접적으로 안 된다면 간접적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영 아니었다.
“그건 안돼. 난 분신체와는 그런 대화는 안 해.”
발 가르단 하스는 딱 잘라 거절했다.
“잠깐, 나는 너와 대화를 할 자격이 있다고 했잖아? 이케가미 의원은 샤다이에게 대화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타인에게 그런 기회를 줄 수 없나?”
“업이 틀려, 업이. 이케가미 소이치로가 지금까지 쌓았던 업은 타인에게 나와 대화를 가능케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것이었어. 하지만… 음, 아쉽지만 넌 그 정도가 안돼. 그냥 여기서 대화하는 수밖에 없어.”
하긴 연방의 상원의장을 했던 거물과 정보국 영관급 장교와 비교하면 빈우는 몹시 초라해 진다. 까다롭지만 주도권이 저쪽에 있으니 이쪽에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질문하지? 일단 인식 가능할 법한 주변 정보부터 알아보면 핵심 정보를 나 스스로 유추할 수 있을 거야.”
“아니, 여기선 내 생각이 다 나온다니까.”
어찌 되었든 생각을 정리한 빈우는 다음 질문을 잘 골라서 던졌다.
“내가 워프 비스트를 만난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흠, 우연이냐고?”
뜻밖의 질문에 발 가르단 하스는 놀라면서 감탄했다.
빈우는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레드우드 중장을 만나고, 피에르 라캉 중령을 만났으며, 스미스 일가를 만났다. 레드우드 중장은 태스크 포스 373을 결성하려 팀원들을 모았으니, 그를 만나고 동시에 라캉 중령과 만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때 갑작스레 샤다이들이 습격했고 잠시 인연이 있었던 스미스 일가는 워프 비스트로 변했다.
다음 오브리가도의 특수전 사령부에서는 사령관인 캐서린 시슬 대장과 태스크 포스 373 관계로 시비가 있었고 24함대와는 무력 마찰이 있었다. 둘 다 태스크 포스 373을 고깝게 여기는 세력의 영향을 받아 벌인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
한데 그 후 24 함대원들은 워프 비스트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금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하려던 이케가미 의원이 빈우의 눈앞에서 워프 비스트로 변했고 발 가르단 하스의 플라스마에 죽었다.
연방에서 희귀하다는 워프 비스트를 빈우는 세 번이나 만났다.
이렇다면 사건의 배후에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하다.
“글쎄, 일단 오스카 스테이션에 워프 비스트가 생긴 것. 24 함대원들이 워프 비스트로 변한 것. 이 두 가지는 우연이야. 그냥 재수 없게 거기에 놈들이 내려온 거지.”
저건 또 저것대로 골치 아프다. 워프 비스트의 발생이 우연이라면 연방의 누구나가 워프 비스트로 변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다만.”
“다만?”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필연이지.”
그리고 빈우의 모습을 한 발 가르단 하스가 일어서서 걷는다. 그 앞에는 아나스타샤가 걷고 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옷이 해괴하다. 메이드 복이 맞긴 한데, 훤히 비치는 에이프런에 상체는 가슴이 푹 파였고 짧은 치마는 팬티를 간신히 가리는 정도다. 그 밑으로는 새카만 레이스 스타킹에 킬힐. 빈우가 싫어하는 프렌치 메이드 복이다. 또각거리며 걷던 아나스타샤가 앙칼지게 휙 돌아본다.
“뭐에요, 왜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예요?”
“따라다녀? 착각이 심하시네. 그냥 내 갈 길 가는 거요.”
그리고 발 가르단 하스는 인상을 썩히며 휙 앞질러간다. 그러면서 아나스타샤의 엉덩이를 철썩 후려갈긴 건 덤이다.
“뭐 이런 정도?”
“…개시발.”
못 볼 꼴을 본 빈우도 역시 인상을 썩혔다.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쓴 것에 무슨 의미라도 있나?”
“그만큼 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지.”
머릿속에 워프 비스트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니 당연히 밀접한 관계일 것이다.
“너의 카르마를 보고 네 앞날을 예상해 본다면 김빈우, 너는 앞으로도 워프 비스트와 숱하게 마주칠 예정이었어. 그럴 운명이었지. 그런데 그 예정이 확 엎어졌어. 이케가미 소이치로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