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빈우는 즉시 팀장의 권한으로 태스크 포스 373의, 그리고 블랙 랜스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살펴볼 시점은 발 가르단 하스를 탈출하는 셔틀에 샤다이들이 점프로 습격해 와 리퍼가 이케가미 의원을 납치하고 빈우가 그들을 추적했을 때부터다.
헌데 현재의 빈우는 함 내 네트워크에 접속할 권한이 없었다. 빈우는 몸을 일으키며 아나스타샤에게 이를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님. 함장님을 부르겠습니다.”
“아, 아나스타샤 양.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왔으니.”
아나스타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키는 빈우 앞에는 벌써 오르 함장이 와 있었다. 그는 빈우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함 내 의료정보를 보자 바로 이곳 의무실에 몸을 생성시킨 것이다.
“정신이 드셔서 다행입니다, 팀장님. 현재 팀장님의 권한은 잠시 정지되었으며 아룹 원사가 직무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태스크 포스 373의 특성상, 팀장인 빈우가 실종 중이라면 그 권한은 잠시 정지되며 지휘권은 아룹이 맡게 된다.
“함장님,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먼저 권한부터 복구하지요.”
그러면서 오르 함장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영상과 말과 기타 기록으로 빈우에게 설명해주었다.
빈우가 이케가미 의원을 구출한 후 블랙 랜스는 발 가르단 하스를 탈출해 간신히 샤다이의 추적을 따돌렸다. 그리고 발 가르단 하스와 발 하스 1 사이에 있는 소행성 지대로 숨어 부서진 함의 수리와 수복에 전념했다. 당시의 블랙 랜스의 상태로는 발 가르단 하스로 돌아온다 해도 빈우를 구출해 탈출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작전 수행능력을 갖춘 다음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발 하스 1에는 이미 샤다이 함선이 와 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역장으로 발 하스 1을 끌어오는 대형의 함선이. 더군다나 그 외 나머지 발 하스의 행성들에도 각각 동급의 샤다이 함선들이 있어, 저마다 발 가르단 하스로 행성들을 견인해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항성계 안에 포진한 샤다이 함선들에게 포위당해 순식간에 격침당할 게 뻔했기 때문에, 자연히 태스크 포스 373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연방에 비해 탐색이나 전자전 능력 등이 월등히 떨어지는 샤다이는 블랙 랜스를 발견하진 못했다. 그러나 함부로 움직였다간 발각당할 것이 뻔해 수리에 차질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수리를 마친 블랙 랜스는 사전에 암호통신으로 알린 대로, 충분한 규모의 암석군이 발 하스 1의 소행성 군에서 발 가르단 하스로 향할 때 그 속에 숨어들어 움직였다.
그러나 블랙 랜스가 발 가르단 하스로 도착해서 본 것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보기 힘들 장관이었다.
두 태양인 발과 하스에서 날아오는 코로나와 플레어, 그리고 형제 행성들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암석군들이 모여 발 가르단 하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녹고 분해되고 재구성돼 발 가르단 하스를 되살리고 있었다.
항성계의 모든 별들이 발 가르단 하스를 위해 모인 것이다.
보면 알 수 있었다. 별들을 끌어온 것은 샤다이였지만 그다음 일어난 모든 일은 발 가르단 하스 스스로가 했다는 것을.
이런 상황이니 블랙 랜스는 섣불리 발 가르단 하스로 접근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오늘내일하는 구축함이 저 사태에 휘말려 들어가 저 별들처럼 뜯겨나갈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변 상황을 살피며 발 가르단 하스를 탐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발 가르단 하스의 행성 궤도에서 빈우의 피아식별 신호가-정말 갑자기 신호가 발생했다.-잡혔다. 신호가 잡힌 곳으로 롱소드를 조심스레 보내 봤더니 그곳에는 의식 불명 상태의 빈우가 녹아 눌어붙은 컨커러를 입고 발 가르단 하스의 궤도상을 떠돌고 있었다.
블랙 랜스는 일단 빈우를 발견하고 재빨리 회수했지만, 섣불리 그를 함 내에 들일 수는 없었다. 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행여 샤다이들이 빈우에게 어떤 조작을 했을지도 모를뿐더러 만에 하나 그가 워프 비스트에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후에야 빈우는 블랙 랜스 함 내로 들어올 수 있었고 엉망진창이 된 몸은 장기간의 수술과 회복을 거쳐 지금에 와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현재 상황이군요.”
“네, 팀장님.”
오르 함장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정상화된 발 가르단 하스 항성계의 현재 모습이었다.
발 가르단 하스는 부서진 지표를 완전히 수복한 다음 다시 발과 하스의 공전궤도로 돌아가 두 태양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이쪽으로 향해 모이던 형제 행성들도 역시 원래의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샤다이 함선들도 다 사라졌지만 아직은 확실한 정보가 없으므로 블랙 랜스는 일단 발 가르단 하스의 궤도에서 행성 재건에 쓰이고 남은 암석군에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블랙 랜스의 현 상황은… 음, 힘들군요.”
“네, 일단은 조심해서 도망가는 게 최선입니다.”
포대는 대부분 파괴, 보유한 미사일과 어뢰들은 한 번의 전투에도 모자랄 양만 남아있다. 주 추진기도 2기 중 1기만 70%의 출력으로 가동 중이고 그 외 전자장비도 정상적인 작전은 힘들 정도다. 다행히 외부장갑은 어떻게든 복구해 놓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시 수리라 외장만 그럴 뿐이고 정상적인 장갑의 방어도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일단은-.”
“팀장님! 정신 드셨습니까?.”
빈우의 말을 끊은 것은 의무실로 뛰어든 아룹 부팀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팀원들도 다투듯 밀려들어 왔다. 허나 쟁쟁한 일행을 비집고 가장 먼저 침대 가까이 온 것은 다름 아닌 모니카였다.
“다행이에요, 팀장님. 그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서 걱정했어요.”
빈우는 의료기기의 정보를 살핀 다음 눈물을 글썽이는 모니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다시 정신 차렸잖아. 고맙다, 모니카.”
그녀는 장갑복과 강화 신체의 전문가여서 빈우의 치료와 수리를 맡았었는데, 이유도 모른 채 빈우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마음깨나 졸였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니 아쉽네.”
다음으론 파트리샤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빈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이라고?”
그녀는 황당해하는 팀장에게 혀를 날름하곤 뒤로 빠졌다. 도대체 파트리샤는 빈우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뭘 한 걸까.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위르겐은 리퍼의 습격 당시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진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리퍼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손도 못 쓰고 당했으니, 연방의 창끝이라 자부하는 뱅가드 대원인 위르겐으로선 그 자신의 추태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넌 최선을 다했어. 네 능력 밖의 일로 자책하지 마라.”
빈우가 주먹을 들자 위르겐이 쓰게 웃으며 자신도 주먹을 들어 가볍게 마주쳤다.
“어, 저는….”
태스크 포스 373의 팀원이지만 빈우의 직속은 아닌 우지는 버벅이고 있었다. 자신이 셔틀을 밀고 있는 사이 일어난 일이라 그때 아무것도 못 하고 떨어져 가는 빈우를 보고만 있어야 했기에 우지도 꽤 충격을 받았었다.
“회수해줘서 고맙다, 우지.”
“네, 네.”
간신히 울음을 삼킨 우지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를르캥이었다.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신가요? 현재 함 내 상태가 여의치 않아 메뉴가 그리 다양하진 않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솜씨를 뽐내보지요.”
피에르 라캉의 얼굴이 해맑게 웃는 모습은 그리 익숙지 않지만 아를르캥의 마음 씀씀이는 고맙다.
“고마워, 나중에 주문할게.”
그리고 마지막 아룹의 질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무거웠다.
“팀장님… 의원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구하지 못했습니다.”
답하는 빈우의 목소리도 나직하다.
“…그렇습니까.”
물론 아룹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 정도 사지에서 빈우가 생환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어차피 작전목적은 달성했고 이케가미 의원은 부차적인 구조목표였던 만큼 작전에 큰 차질은 없다. 허나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아룹이 한때나마 모셨던 인물이었기에 그가 침울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팀장님,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는 충분히 회복하신 다음에 하도록 하죠. 저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런저런 대화가 끝나고 팀원들이 나가자 의무실에는 빈우와 아나스타샤 둘만 남았다. 빈우가 누운 채 팔을 벌리자 아나스타샤가 와락 안겨 왔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여태껏 기본 표정으로 감정을 숨기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폭발하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셔틀이 돌아왔는데, 왔는데. 주인님이 없어서. 흐어어.”
“괜찮아, 봐, 살아있잖아.”
빈우는 자신의 목덜미에 매달려 울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아나스타샤는 얼마나 놀랐을까. 자신의 주인이 사선을 넘나들 때마다 그녀가 받는 충격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일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사고가 가능한 고급 인공지능인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키워온 주인에게 가지는 감정은 가족과도 같다. 그런 빈우가 죽음과 마주하고 위협받는 현실은 아나스타샤에겐 고통이고 고문이나 다름없다.
“제발, 주인님 제발. 다치지 마세요.”
“그래, 그래. 여길 봐 다 나았잖아. 나 이제 다 나았어.”
빈우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흐느끼는 아나스타샤를 달래보려 하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가 없다.
“다치지 마세요. 죽으시면 안돼요. 부탁할게요. 제발요, 제발. 제발.”
“약속할게. 안 죽어. 꼭 돌아올게. 꼭. 응?.”
빈우는 오열하는 아나스타샤의 고개를 들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나스타샤의 이마를 훑는 빈우의 입술에 희미한 흉터가 느껴진다. 예전에 주인의 고통을 보며 궁지에 몰렸던 아나스타샤가 괴로워하다 못해 스스로 낸 상처다. 그뿐만 아니다. 빈우의 품에 꼭 끌어안긴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는 이런 흉터들이 몇 군데 더 있다.
허나 아나스탸사의 머릿속에는 그딴 것들관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처들이 있다. 이번 일로 그런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났을 것이다.
빈우는 자신의 고통이나 부상보다는 아나스타샤의 고통이 더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지켜줄 수 없고, 또 구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빈우를 더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자신을 길러왔던 메이드의 말대로 모든 것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나스타샤와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빈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끝내기 전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제 그만 울어, 목이 다 쉬었네. 좀 누워 봐.”
빈우는 자신의 옆에서 아나스타샤를 눕혀서 다독였다. 어릴 적에 그녀가 불러줬던 자장가를 불러주자 아나스타샤도 가까스레 웃는다.
이어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질하고 귓불을 주물러 주니 울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주인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자 메이드가 스스로 얼굴을 훔친다.
“죄송해요, 주인님. 이제 안 울게요.”
“이제까지 제대로 못 쉬지도 못했지? 좀 쉬어, 아샤.”
“아니에요, 제가 주인님을 돌볼 거에요.”
빈우는 몸을 일으키는 아나스타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다시 눕혔다.
“먼저 자. 네 옆에서 잘게.”
그리고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나스타샤의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주인의 차분한 몸짓에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다음 오열의 여파로 할딱이는 그녀의 옆머리를 쓰다듬던 빈우는 손을 서서히 내렸다.
부드럽게 스치고 내려간 손이 아나스타샤의 치마를 잡는다. 그리고 서서히, 아주 천천히 치맛단을 올렸다. 종아리의 하얀 살결을 감싸고 있는 옅은 갈색의 스타킹이 보인다. 이어서 손이 무릎을 거쳐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다.
갈색 스타킹에 감싸져 있는 것은 흰색 팬티였다.
“후우-.”
빈우의 한숨과 함께 올라갔던 손이 방금의 속도 그대로 천천히 내려와 치마를 다시 원래대로 덮어 놓았다.
현재 빈우가 가지고 있는 단서 중 하나는 검은색 레이스 팬티다. 빈우가 울토르 중대에서 클론으로 위장하고 있을 때 그의 사물함에 들었던 검은색 팬티. 거기엔 빈우의 아이디로 ‘이거 믿지 마라’라고 적혀 있었다.
빈우에겐 그것을 적은 기억이 없으니 가능성은 두 가지다. 누군가가 빈우의 장갑복을 써서 그 메시지를 썼거나, 아니면 빈우 자신이 썼지만 기록이 트리티니에 의해 잠겨있는 경우다.
울토르, 워프 비스트, 트리니티, 팬티. 널브러진 단서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복잡하다. 허나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휴식이다. 일단 한 가지 숙제를 마친 빈우에겐 정신과 육체 둘 다 휴식이 필요했다.
“잘 자, 아나스타샤.”
빈우가 침대에 누웠다. 마주하는 아나스타샤의 느릿한 숨소리가 편안하다. 어린 시절 자는 척하다 눈을 뜨면 이미 눈치챈 아나스타샤가 짓궂게 웃으며 빈우의 코를 꼬집곤 했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이다. 빈우는 그런 날들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불행히도 그런 날과는 멀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