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한숨 자고 일어난 빈우는 식탁 위의 음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가져온 음식은 치킨 파이와 초코 쿠키들로 둘 다 빈우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음식들이다.
개구쟁이인 빈우가 밥도 안 먹고 싸돌아다니면 아나스타샤는 늘 치킨 파이를 손에 들고 따라와 어떻게든 먹이려고 했었다. 그때의 악동은 파이보다는 그것을 먹었을 때의 아나스타샤가 지었던 표정을 좋아했고, 그보다 더 재밌어했던 건 한 입만 먹고 뒤돌아 도망칠 때 그녀가 보였던 애타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한 입 먹고 도망치고, 또 한 입 먹고 도망치고를 반복하다 종래엔 치킨 파이를 다 먹고 아나스타샤의 등에 업혀 돌아갈 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초코 쿠키는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다. 뭐가 잘 안되거나 혼나서 울고 있을 때면 엄마는 쿠키를 구워 와 아들을 달래며 같이 먹었었다. 아무리 힘들고 또 아무리 슬퍼도 엄마와 같이 초코 쿠키를 먹으면 어린 빈우의 기분은 금방 나아졌다. 엄마는 커피와, 아들은 우유와, 가끔은 아나스타샤도 끼어서 같이 쿠키를 먹었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주인님?”
아나스타샤의 말에 빈우는 추억에서 깨어났다.
“응? 잘 먹을게.”
파이를 우물우물 씹던 빈우는 문득 한 가지 음식이 생각났다.
“아샤, 혹시 계란 밥 내올 수 있어?.”
“계란 밥이요?”
물질생성기로 무슨 음식을 못 만들겠냐마는 지금 빈우가 원한 것은 그게 아님을 아나스타샤는 바로 깨달았다.
“죄송해요, 주인님. 지금은 신선한 재료가 없어서 만들 수 없어요.”
“아, 괜찮아. 생성기 걸로도 좋아.”
그러자 아나스타샤는 금세 생성기에서 비벼진 계란 밥을 뽑아와 빈우 앞에 놓았다. 치킨 파이와 초코 쿠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계란 밥은 여기 없는 한 사람을 위해 주문한 것이다.
‘갓 지은 따끈한 쌀밥으로… 계란 밥을 만들어 먹고 싶구먼.’
이케가미 의원의 넋두리가 떠오른다.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를 희생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곤 빈우에게 터무니없는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인류연방은 현재 위험에 처해있으며 거기엔 울토르 프로젝트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때나마 울토르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한 사이였던 만큼 이 일의 해결과 마무리는 빈우가 지어야 할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하고.
빈우는 치킨 파이와 초코 쿠키를 한입에 털어 넣은 다음 계란 밥을 들고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에어록으로 가 안으로 들어갔다. 강화한 육체에 감압은 필요 없고 잠깐이라면 바로 우주 공간으로 나가도 괜찮기에, 빈우는 그대로 블랙 랜스 밖으로 나가 맨눈으로 발 가르단 하스를 보았다.
분명 처음 임무는 토끼몰이 작전의 여파로 추락한 리퍼 함선과 정보를 보호 행성에서 회수하는 것이었는데. 터무니없는 것을 회수하고 말았다.
‘아쉽지만 이거로 참아주시구려.’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를 향해 계란 밥을 던져 보냈다. 원래는 비밀임무를 하는 중이기에 이딴 식으로 흔적을 남겨선 안 되는 일지만, 이미 깽판이란 깽판은 다쳐놓은 상황인지라 지금 이런 일을 한들 별 의미는 없었다.
멀어져 가는 계란 밥을 바라보는 빈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 빈우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그 하나하나가 특급기밀에 속하고 민감한 정보다.
클론 병사를 만드는 울토르 프로젝트는 연방의 기밀이었지만, 마카로니에서 민간인 학살이란 초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느라 관계부서는 피똥을 싸고 있고, 현장 지휘관이었던 빈우조차도 프로젝트에서 격리되었다. 자칫하면 기록 말살까지 갈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을 괴물로 변신시키는 워프 비스트는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지만 울토르 프로젝트와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행히 이케가미 의원의 희생으로 그 발생을 막았지만 발 가르단 하스는 그것을 ‘당분간’이라고 표현했을 뿐 정확한 기간은 알려주지 않았다.
허나 빈우는 이런 정보들을 누구와 함부로 공유할 수가 없었다.
발 가르단 하스가 줬던 정보 중에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발 가르단 하스는 워프 비스트들을 계단을 내려온 자들이라고 칭했으며, 자신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빈우가 알고 있던 단순한 괴물의 모습과는 달리 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거나 달리 그런 부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 발 가르단 하스는 앞으로의 워프 비스트 발생을 막았지 이미 내려온 놈들은 어쩌지 못한다고 했다. 현재 연방이 발견한 워프 비스트는 아직 결과가 확실하지 않은 오브리가도의 특수전 사령부 건을 제외하면 모두 말살로 끝났다. 이미 없는 워프 비스트를 발 가르단 하스가 일부러 언급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연방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워프 비스트들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보들을 조합해 본다면 지성을 가진 워프 비스트들이 이 우주 어딘가에 암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태스크 포스 373을 창설 이전부터 방해했던 세력의 뒤에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정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오르 함장의 통신이 들려온다.
-팀장님, 이제 본 함은 발 가르단 하스 궤도를 벗어납니다. 함 내로 들어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함장님.
이제 블랙 랜스는 고속항행으로 발 가르단 하스를 떠나 포말하우트 게이트로 간 다음, 다시 워털루 게이트로 향할 예정이다. 그리고 워털루 게이트에서 태스크 포스 373이 앞으로 갈 길을 정하게 된다. 원래의 예정대로 특수전 사령부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비상시 목적지인 통합사령부로 가야 하는지.
만약 특수전 사령부의 워프 비스트 발생 사건에 어떤 진행 상황이 있었다면 암호통신이나 연락정을 보내놨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그 내용을 보고 차후의 항로를 정할 것이다.
* * *
다행히도 워털루 게이트로 가는 동안은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랙 랜스의 수리에 로봇들은 물론이고 373 팀원들까지도 달라붙을 수 있었다. 팀원들만.
저번 전투로 작업용 로봇들을 상당수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자라는 부분은 인력으로 때우는 것이다. 우지는 롱소드를 몰고 가까운 곳에 있는 얼음이나 광물들을 모아오는 데 여념이 없었고, 팀원들은 무장 들고 훈련을 하는 시간보다는 공구를 들고 선 외 작업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대가리 두 명 빼고.
“음, 다행이군요.”
전투정보실에서 암호통신을 받은 오르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같이 통신을 보던 빈우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암호통신은 오브리가도의 특수전 사령부에서 발사한 기밀 연락정이 발신한 것이다. 수신자는 물론 태스크 포스 373이다.
-빗자루를 내려놓아라.
현재 시각에 대응되는 암호로는 ‘적 격퇴’다. 오브리가도 특수전 사령부는 워프 비스트의 침공을 무사히 격퇴한 것이다. 하긴 연방에서 내로라할 특수부대원들이 모두 모인 곳이니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턱도 없다.
“이제 예정대로 특수전 사령부로 귀환하면 되겠습니다.”
빈우의 말에 오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특수전 사령부는 태스크 포스 373의 본거지고 블랙 랜스는 현재 비밀작전을 수행하고 돌아가는 중이니,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는 본가로 가는 게 편한 법이다.
그리고 빈우로서도 그나마 비빌 언덕이 있는 특수전 사령부가 나았다. 특수전 사령부의 사령관인 캐서린 시슬 대장이나 태스크 포스 373의 최고 지휘관인 조지 레드우드 중장은 둘 다 뼛속부터 군인이기 때문에, 빈우가 가져온 정보에 대해 그나마 순수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그 어떠한 위협이 닥치더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연방의 위험을 막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빈우의 본가인 군사정보국에 이런 치명적인 고급 정보가 들어간다면? 물론 행동에 나서기야 나설 것이다. 최대한 자신의 세력에게 이득이 되게끔 하고, 최대한 반대 세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정보를 가공한 다음에 말이다.
“그러면 워털루 게이트에서 오브리가도 게이트로 점프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그럼 저는 팀원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 * *
“흐앙, 퍽퍽해-.”
하루 일과를 마친 파트리샤는 전산실의 보안 터미널 앞에서 닭가슴살을 꾸역꾸역 씹으며 팀장인 김빈우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정보와 달리 기밀 정보들은 이런 특정 장소에서만 열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진 블랙 랜스에 들어있는 정보만 검색할 수 있었지만, 게이트 근처로 오면서 연방군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해져 빈우 같은 정보국 요원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실리콘 나이트 대원이자 현재 태스크 포스 373 소속인 파트리샤의 기밀 취급 등급이 높아서이기도 하다.
“뭐, 별거 없네.”
파트리샤의 예상과 달리 이곳에서도 빈우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략적인 신상정보나-빈우의 원소속을 감안하면 이것도 꽤 기밀이지만-활동 내역이 전부고 정작 알고 싶었던 핵심적인 것들은 열람 불가, 접근 불가다.
“너 뭐하냐.”
“엑, 부팀장님.”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아룹의 말에 파트리샤가 화들짝 놀란다.
“또, 또 못된 짓 한다. 궁금하면 앞에서 물어보면 될 텐데 왜 뒤에서 이러고 있냐?.”
핀잔을 주는 아룹도 파트리샤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 빈우는 이케가미 의원을 쫓아간 이후의 일들을 일절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구하러 갔으나 구하지 못했다, 정도였고 자세한 내용에 대해 물어보면 때를 봐서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같은 임무를 짊어지고 같은 전장에서 굴렀던 팀원들에게조차 말이다.
오르 함장이나 아룹은 빈우의 그 말에 더는 묻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팀장인 그가 팀원들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허나 이 말괄량이는 제 성격 못 버리고 뒤에서 혼자서 헤집고 있었다. 이런 건 자칫 잘못하면 서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냥 좀, 궁금해서요. 에헤헤, 근데 피자 타이거에 스파게티 드래곤, 전부 식품 회사네요. 이거 정보국이나 보안국 유령회사죠?”
“그래, 너, 오브리가도에서 피자 타이거 유니폼 입었잖아.”
아룹의 말대로 파트리샤는 오브리가도에서 24함대와의 테스트 건 때문에 피자 타이거 직원으로 위장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룹은 우주 샤다이 대마왕이 되어 주변에 공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사령관인 캐서린 시슬의 손녀와 며느리에 총을 겨눴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아룹과 파트리샤였다.
“어라? 둠 치킨? 이건 군납 식품회사잖아요? 여기도 무슨 정보국 쪽 회사였나?”
“뭐? 무슨 치킨?”
한걸음 거리를 두고 얘기하던 아룹이 화면에 다가섰다. 그리고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에, 부팀장님 왜 그러세요?”
“흠, 파트리샤 넌 둠 치킨은 모르냐?”
그녀가 지금 씹고 있는 게 둠 치킨의 닭가슴살이니 모를 리는 없다. 아룹의 질문은 둠 치킨의 다른 정체를 물어보는 것이다.
“어-어, 그냥 군납 가금류 회사잖아요?”
씹던 닭고기를 꿀꺽 삼킨 파트리샤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닭 맛이 나는 음식류 전반을-자연, 합성 포함해서-취급하는 회사다.
“연방 중앙정보국 계열의 회사다.”
“호마나!”
파트리샤가 놀랄 만도 하다. 연방 중앙정보국이 왜 군납 회사를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피자 타이거나 스파게티 드래곤은 각각 군사정보국과 보안국 소속이며, 연방군이 진출한 곳에는 어디든 따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 소속 기관은 민간 쪽 행동을 제한받기 때문에 피자 타이거나 스파게티 드래곤 둘 다 군기지나 그 근처에서만 장사하지 민간 쪽으론 잘 진출하지 않았다. 그게 원칙이기도 하고
반면 둠 치킨은 이전엔 민간에서 활동하던 회사였으나, 언제부터인가 군납에도 손을 대더니 지금은 군내 닭고기 유통에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다른 곳도 아닌 연방 중앙정보국 소속이라면 문제가 조금 애매해진다. 정부 쪽 기관이 군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뭐 또 못된 짓 하고 있는 거냐.”
그때 문이 열리며 빈우가 들어왔다.
“에그머니, 깜짝야. 오셨어요.”
말과는 달리 파트리샤는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어떻게 둘러댈까 머리를 굴릴 때 대뜸 아룹이 질문했다.
“팀장님, 뭔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뭡니까?”
아룹의 질문에 대수롭잖은 반응을 보이는 빈우와는 달리 파트리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팀장인 아룹이 총대를 메고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볼 거라는 기대감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