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 의원님. 아까는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빈우는 자신에게 들어온 영상을 팀원들에게도 공개했다. 개인 회선이 아니라 함 내 통신 터미널을 사용한 것이라 별 무리는 없을 듯싶다. 그러면서 팀원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금세 표정으로 바꾸어 진정성이 담긴 듯한 얼굴로 꾸미곤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팀장님께서 만류하셨는데도 제가 굳이 미각 쪽 프로그램을 끄는 바람에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첫 만남에서도 그렇고 방금의 대화에서 보자면 오다 히토미 의원은 꽤 유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보통 감사나 조사로 오게 되는 인원은 딱딱한 성격이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일부러 고압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다 의원의 이런 언행들이 연기일 수도 있지만 빈우는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보았다.
-지금 잠시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지금 막 짐을 푸는 중이라 제가 가겠습니다. 장소를 정해주세요.
그러면서 허둥지둥 주변을 치우는 오다 의원의 얼굴 아래로 거대한 가슴이 출렁인다. 편한 옷을 입어서 그런지 아까의 정장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2식당에서 뵙도록 하죠. 안내할 인원을 보내겠습니다.”
통신을 끈 빈우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난 의원님과 얘기하러 가볼 테니 각자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도록. 제발.”
지금껏 사고란 사고는 자기가 쳤으면서 저런 말을 하니 팀원들은 기가 찬다.
“아 참. 특히 파트리샤.”
“예이.”
신나서 생글거리는 파트리샤에게 빈우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따라오지마.”
“쳇.”
빈우는 볼을 부풀리는 파트리샤를 무시하고 아나스타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나중에 내가 메뉴를 보내면 의원님과의 식사를 준비해줘.”
“네, 주인님.”
빈우가 나가자 파트리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의자 뒤로 기대어 누웠다. 그러다가 문득 뭐가 떠올랐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띠며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았다.
“아나스타샤~ 네 주인님 위험하지 않을까앙?”
“네? 위험요?”
영문을 몰라서 화들짝 놀라 반문하는 아나스타샤에게 파트리샤가 서서히 일어나 다가갔다.
“그래. 저 정도 박력 있는 가슴이면 어지간한 남자는 해롱해롱 이란 말이지. 근데 단둘이서만 있을 식당에서 우리 팀장님이 어떤 변을 당할지 걱정 안 돼?”
파트리샤가 자기 가슴을 장난스레 주무르며 키득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아나스타샤는 안심해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푸훗. 어머, 실례. 물론 오다 의원님의 가슴이 제법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인간. 전성기의 저에게는 상대가 안 되죠. 뭐 지금은 필요가 없어서 가슴을 줄이고 있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키울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유모 역할도 했었다고 했다.
빈우를 이렇게 키운 게 아나스타샤일까, 아나스타샤를 이렇게 키운 게 빈우일까.
자랑스럽게 가슴을 들쳐 올리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파트리샤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시무룩하게 앉았다.
* * *
빈우는 제 2식당에 도착해 오다 의원을 맞을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도청장치 설치 같은 것은 아니고 간단한 청소와 식기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블랙 랜스에서 이곳 2식당은 비품창고 비슷한 용도로 쓰이고 있었기에 미리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아르를캥이 오다 히토미 의원을 안내해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빈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님.”
“이렇게 안내를 안 보내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김 팀장님. 그리고 고마워, 아를르캥.”
오다 의원의 감사 인사에 아를르캥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인 다음 식당 밖으로 나갔다.
“응? 안드로이드는 내보내나요?”
“네. 듣는 귀는 적을수록 좋죠. 그전에 먼저 제가 차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빈우의 말에 오다 의원은 식탁 위에 놓인 다기들을 보더니 의외다 싶은 시선으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입가심이라고 하기엔 좀 그럴까요?”
빈우의 농담에 오다 의원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말차를 준비했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빈우는 찻숟가락으로 차 가루를 덜어 미리 데워놓은 다완에 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다음 다선으로 격불해서 거품을 내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자 오다 의원의 눈에는 약간의 놀라움과 기대가 함께 떠올랐다. 비록 약식이긴 하지만 빈우의 다도 실력은 정식으로 배운 자의 솜씨인 것이다.
이윽고 빈우가 적당히 유화를 낸 차를 오다 의원 앞에 천천히 내어놓자 그녀도 공손히 다완을 받은 다음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두 모금. 마지막 세 모금으로 차를 다 마신 그녀는 다완을 내려놓은 다음 갑자기 웃었다.
“후훗! 실례. 큭.”
차도 좋고 낸 사람의 솜씨도 훌륭하다. 그런데 정작 다완이 엉망이었다.
“어흠, 시간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리되었습니다.”
빈우는 멋쩍은 듯이 입맛을 다셨다.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맞은편에 앉은 오다 의원의 손에는 물질생성기로 급히 만든 다완이 들려있었다. 그녀의 웃음에 따라 흔들리는 이 검은색 다완은 누가 보면 폭발한 로켓에서 날아온 노즐 파편으로 볼 지경이다. 빈우가 나름 멋진 모습으로 디자인을 했건만 부랴부랴 만든 탓인지 영 맛이 살질 않는 것이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것도 꽤 풍류가 있군요.”
간신히 웃음을 참는 그녀의 앞에 빈우가 다과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켜켜이 쌓인 층에 꿀이 가득 든 모약과다.
“어머, 이건?”
그녀는 윤기가 가득한 작은 갈색의 과자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 색과 모양을 눈으로 음미했다.
“마카롱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풉!”
빈우의 엄숙한 설명에 오다 의원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간단한 이야기가 오간 뒤 본론이 시작되었다.
오다 의원은 아까와는 다른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상원에서는 특수전 사령부 소속의 작전팀인 태스크 포스 373에 대해 감사를 할 예정입니다. 저는 그것의 사전 조사차 왔고요.”
“왜 저희 팀에 감사가 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꽤 불쾌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탐사차 던진 질문에 갑자기 직구가 날아왔다. 태스크 포스 373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놓고 요청이 있었다고 밝혔다.
오다 의원은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할 일은 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런 요청은 어디에서 온 겁니까.”
빈우의 질문에 오다 의원이 잠시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다음 할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여 긴장된다.
“현재 의회에는 여러 군소정당이 있지만, 이번 감사 요청은 특정 당이 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무리’가 낸 것이죠.”
“무리라고요?”
빈우는 의회에서 무리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비밀결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들은 정치이념이나 소속과는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의견을 내어왔습니다. 평상시에는 눈치채기 힘들었지만 근래에 들어 알아볼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태스크 포스 373이죠. 조지 레드우드 중장께서 태스크 포스 373을 만들기 위해 움직일 때부터 이들의 움직임도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습니다. 어떨 때는 A그룹이, 다를 때는 B그룹이 나서서 레드우드 중장의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변죽을 놓았습니다.
전혀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요. 또 이들은 의회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합동참모본부에서 오는 의견들을 보면 그쪽에도 해당 파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래 의원이란 정치적 이익과 민의의 대변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런 세상에서 이상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이는 정말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오다 의원이 말한 대로라면 그동안 레드우드가 곤욕을 치른 게 이해가 간다. 이렇게 움직이는 놈들이었기에, 레드우드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상대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훼방을 놓으려 여기저기서 깔짝깔짝 튀어나오는 놈들이 어딘가의 끄나풀로 보였을 테고 그 뒤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또 얼마 전 캐서린 대장은 합동참모본부로부터 373을 방해하란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득 여기서 빈우는 하나의 연결점을 찾았다. 워프 비스트.
단순히 인간이 변한 괴물인 줄로만 생각했으나, 행성 생명체인 발 가르단 하스의 말론 자신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지능을 가진 부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 형태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놈들이 이전부터 연방에 숨어있었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빈우의 머릿속에 맴도는 가설은 저 비밀결사란 것이 워프 비스트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수상하게 생긴 의원들이 모여서 그들에게 빙 둘러 질문을 해봤지만, 딱히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안 나왔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변명했었죠.
헌데 이번에는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들이 의제를 낼 때마다 그때그때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받아들였으나 이번 감사 건은 꽤 수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도 나름 대응을 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상원에서 일개 특수작전팀에 감사를 나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빈우는 졸지에 일개 특수작전팀의 팀장이 되어버렸지만, 그녀의 말을 당연스레 받아들였다.
상원 감사가 나서면 부서 하나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일개 소령이 이끄는 작전팀은 표적에 들지도 않는다. 그게 아무리 특수전 사령관 직속팀이라고 해도. 애초에 노린다면 특수전 사령부를 노리고 왔을 거다.
“그래서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오다 의원님께서 사전 조사차 오신 겁니까?”
빈우의 질문에 오다 의원도 시선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태스크 포스 373에 접촉하여 진상을 파악하려는 거죠. 이 팀의 목적과 정체를 파악하면 그 무리의 목적과 정체도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오다 의원의 말은 얼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사냥감을 보면 사냥꾼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데 연방 내의 비밀 단체에 대한 중요하고도 민감한 이야기를 다른 곳도 아닌, 초면에 만나는 조사 대상에게 이렇게 막 풀어놓으셔도 됩니까?”
“아직 정확한 것은 없으니까 뭘 밝힐 단계도 아닙니다. 가설 수준이죠. 그리고 여러분이 어쩌겠습니까.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는데요.”
빈우의 질문에 오다 의원은 의연하게 대답했다. 저것도 맞는 말이다. 어차피 지금 태스크 포스 373으로선 조사차 나온 오다 의원에게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단체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목적을 이루신다면 그다음엔 우리 팀을 어쩌실 겁니까?”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당연히 걸고넘어져야겠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설령 그런 사항이 있더라도 저의 조사에 충분히 협조를 해주신다면 그걸 감안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더니. 의회 내부에 암약하는 비밀결사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의 적인 태스크 포스 373과 손을 잡는단 얘기다. 까놓고 말해 무릎 꿇고 빌면 살려는 주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일부러 빈우는 저자세로 나갔다. 상대의 기세가 우위일 때 굳이 맞대응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유인과 매복은 실전에서나 설전에서나, 둘 다 유용하게 쓰이는 방법 중 하나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제가 묻는 것에만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오다 히토미 상원의원의 질문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빈우는 팀의 목적, 구성원, 작전 내역 등등의 여러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이케가미 의원과 빈우가 발 가르단 하스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선 적절히 가공해서 대답했다. 정식 보고서에 쓰인 대로만.
“의원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막간에 빈우가 다시 차를 한 잔 타주며 질문했다.
“네. 말씀하세요.”
빈우의 성실한 협조와 오다 의원의 그리 모나지 않은 성격이 만나자, 조사는 꽤 원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저번 작전에서 돌아가신 이케가미 소이치로 전 상원의장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시는 것 있습니까? 아무래도 같은 상원의원이시다 보니 다른 정보도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빈우의 시선은 지금 다완에 가 있었다. 질문 역시 거품을 내면서 흘리듯이 했다.
“외계종족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하는 분이셨죠. 아마 살아계셨다면 김 팀장님과 태스크 포스 373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셨을 겁니다.”
양갱을 집어 들며 여상스럽게 대답하는 오다 의원의 대답과 표정에서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빈우는 다완을 건넨 다음 골똘히 생각했다, 아니 골똘히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타이밍을 쟀다.
“실은 사적인 얘기라 보고서에 적진 않았습니다만 당시 이케가미 의원님께선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대단히 후회하고 계셔서 말입니다. 혹시 달리 아시는 사실이 있나 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방금 빈우의 질문은 오다 의원이 두 모금 째 차를 마실 때 나왔다. 높이 들린 고개와 다완에 가려진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 빈우는 그 밑으로 보이는 목의 움직임을 살폈다.
‘한 박자 늦다.’
이야기를 들어서 늦은 반응이 아니다. 빈우의 질문에 마음속 무언가 걸리는 게 있어서 나오는 반응이다. 무엇이 그녀에게 걸렸을까. 아마도 후회란 단어일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다완을 내린 오다 의원의 얼굴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방금 목이 보인 반응과 조금 엇나가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