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88화 (88/301)

88화

빈우가 돌아보니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드물게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파서 휙휙 터는 저 오른손바닥으로 빈우를 후려갈긴 듯싶다.

“왜, 뭐가?”

영문을 몰라 더듬거리는 빈우의 어깨를 아나스타샤의 왼손이 잡아당긴다. 그리고 오른손이 다시 올라가 빈우를 내려친다. 그런 그녀의 눈썹은 짜증으로, 입술은 분노로 일그러져있다.

“마님, 죄송해요. 제가 도련님을 잘 키우겠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이렇게 돼버려서. 민간인 여성하고 대화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데 그걸 또 이렇게 말아 드시나요.”

아나스타샤가 돌아가신 마님에게 용서를 빌며 연신 빈우의 등을 때린다. 빈우는 눈을 질끈 감고 얻어맞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레드우드는 화면 너머로 자신의 부하가 메이드 안드로이드에게 처맞는 것을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인공지능은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다. 어지간해서는.

또 인공지능은 주인에게 대들지 않는다. 절대로.

그런 인공지능이 저렇게까지 주인에게 손찌검한다는 것은 지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단 뜻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레드우드에게 어떤 데자뷔를 떠올리게 했다. 전우인 캐서린 시슬의 이야기다.

언젠가 일이 바빠 손녀 나디아의 학예회에 가지 못한 캐서린의 정강이를 나디아가 걷어찬 적이 있었다. 강화된 육체에 기별도 안 갈 충격이었지만, 캐서린은 꽤나 아파했었다. 마치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그걸 본 레드우드가 뭐가 그리 아프냐고 핀잔하듯 묻자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 자포자기한 눈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자신의 메이드에게 등을 두들겨 맞고 있는 빈우의 얼굴을 보자니 이해가 간다. 녀석도 마음이 꽤 아픈 모양이다.

“욕봐라.”

그리고 레드우드는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잽싸게 통신을 끊었다.

* * *

훈련실에서 빈우는 기지개를 켜면서 등을 쭉 폈다. 아까의 감촉이 남은 것 같다.

아나스타샤에게 딴 곳도 아닌 등을 그렇게 세게 두들겨 맞는 것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이 아마도 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빈우는 아까 일을 떠올렸다. 레드우드 사령관과 오다 의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을. 이어서 신나게 등을 난타한 것을.

그때 아나스타샤가 하고 있던 표정을 봤던 빈우는 도저히 저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어지간한 잘못이 아니고선 안드로이드 메이드인 그녀가 주인에게 손찌검할 리가 없으니, 얻어맞는 빈우로선 ‘내가 또 뭘 사고 쳤구나’하고 넘어갈 뿐이다.

몇 번 때리다가 손바닥이 아파서 콩콩 뛰던 아나스타샤는 당장 오다 의원님께 가겠다고 했다. 빈우가 같이 가려 하자 그녀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했었다.

“…잘 알아서 하겠지.”

빈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장갑복의 척추 부분을 살폈다. 발 가르단 하스에서 컨커러를 홀라당 해먹은 뒤 이곳 특수전 사령부에 도착해서 받은 어벤져다.

물론 컨커러는 굉장한 성능을 가진 장갑복이다. 현재 연방에는 샤다이의 플라스마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개인 장비는 없다. 그뿐인가. 장갑복의 출력 또한 출중하다. 그러나 빈우는 한 번 발동하면 전신이 굳어버리는 인간 형태의 관짝을 두 번 다시 입고 싶지 않았다.

무장으로 받았던 XPS는 저 옆에 그대로 있지만, 이것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총과 방패를 오가는 가변형 무기. 이것도 플라스마를 쏘고 플라스마를 막을 수 있으니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총을 쓸 때는 방패를 못 쓰고 방패를 쓸 때는 총을 못 쓰니 가변의 의미가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따로따로 쓰고 말지.

“진짜 컨커러 안 입으실 거예요?”

모니카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하며 세팅하던 어벤져 뒤편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다.

“입고 싶어도 없잖아.”

모니카는 태스크 포스 373으로 올 때 컨커러를 몇 기 더 들고 왔다. 그러나 발 가르단 하스의 격전에서 모두 소실되었다.

“아! 그거 신청하면 바로 올 거예요. 컨커러는 아직 3기 정도 더 있어요. 그리고 사용 데이터를 넘겼더니 과장님께서 바로 개량하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아마도 다음에 오는 건 단점이 고쳐져 있을 거예요.”

말할 건수를 잡자 모니카가 대번에 튀어나와 신나게 말했지만 빈우에겐 그다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너 왜 고쳤다가 아니라 고쳤을 거라고 말하는 거냐.”

삿대질 한 번에 풀이 죽은 모니카 옆으로 파트리샤가 폴짝 튀어나온다.

“근데 어벤져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라인더는 어때요?”

어벤져는 현재 연방의 주력 장갑복이긴 하다. 하지만 파트리샤의 말대로 그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장갑복이 몇 가지 더 있다. 지금 태스크 포스 373에도 있는데 실리콘 나이트가 쓰는 인필트레이터와 단검 뿔 토끼의 그라인더가 바로 그것이다.

허나 인필트레이터는 사용자의 육체에 장갑복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용자를 장갑복에 맞춰서 집어넣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용 육체 강화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형체변형 같은 본래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특수 장갑복이라서 먼저 제외.

다음 후보인 그라인더는 모든 면에서 어벤져를 뛰어넘는 고성능의 장갑복이다. 헌데 이것도 쓰기가 조금 껄끄럽다.

“흐흠. 그라인더도 좋긴 한데. 부팀장.”

“네, 팀장님.”

자기 장비를 점검하던 아룹이 대답한다.

“지금 단검 뿔 토끼가 쓰는 게 D형이죠?”

“네. 근데 팀장님이 그라인더를 입으시려면 강화단계를 좀 높이셔야 할 겁니다.”

그라인더 정도 되는 고성능 장갑복의 속도와 출력, 내구도를 제대로 살리려면 착용자 역시 그에 맞춘 강화를 해야 한다. 문제는 병과가 장갑 보병이라면 모를까 빈우는 정보 사령본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런 고단계의 신체 강화는 좀 꺼려진다.

“D형이 아니면 그라인더를 입었을 때 딱히 큰 메리트도 없고 말이지.”

“그렇죠. 제가 봐도 팀장님께선 어벤져를 쓰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지금 빈우 앞에 있는 어벤져는 뱅가드 연대에서 쓰는 F형이다. 뱅가드의 어벤져는 전부 장교용이고 수많은 실전을 거쳐 개수된 버전이라, 다른 부대에서 쓰는 초기형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주인님, 오다 의원님께서 오셨습니다.”

빈우와 팀원들이 한창 장비 문제로 고민하면서 어벤져를 세팅하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오다 의원을 데리고 훈련실로 들어왔다.

“어이쿠, 의원님.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빈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히 사과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잘못한 것 같으니-아나스타샤의 반응을 보면 백 퍼센트 사고 친 게 확실해 보이니-하는 사과였다.

옆에 있던 팀원들도 주섬주섬 일어났지만, 그 관심은 상원의원이 아닌 사과하는 팀장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팀장님, 그 사이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라고.

“어머, 아니에요. 함 내 주의사항에 대해 제가 더 자세히 물어봤으면 되는 일이었던 걸요. 오는 길에 아나스타샤가 다 설명해 주었어요.”

그제야 빈우도 납득할 수 있었다. 위험한 걸 알려준다 떠들어 댔지만, 전후 사정이 싹둑 잘려있었으니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구나 하고.

실제 들었던 오다 히토미에겐 이해할 수 없는 공포 괴담이었으나 이 군인이 그걸 알 턱이 있나.

군용 육체와 프로그램을 깐 군인들에게 블랙 랜스는 딱히 위험한 곳이 아니다. 설령 위험한 사고가 발생해도 ‘팔 잘렸네? 붙여, 이 새끼야.’ 하는 게 빈우가 사는 동네다. 다만 강화하지 않은 민간인이라면 좀 다르다. 재수 없으면 관성 제어장치 범위 바깥에서 순식간에 토마토소스가 되는 게 또 이 동네이기도 했다.

“여기는… 위험한 게 없나요?”

아나스타샤를 조심스레 따라오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오다 의원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있었다.

“많습니다.”

딱 부러지는 빈우의 말에 오다 의원이 움찔한다.

“이곳은 훈련실입니다. 때문에 장갑복이라던가 무기 등이 있지요. 이런 것들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정해진 메뉴얼을 따르기만 한다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여기 있는 제 부하들이 의원님의 안전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빈우는 팀원들을 오다 의원에게 소개해 주었다.

허나 상대가 자신의 팀을 조사하러 온 사람이니만큼 팀원들의 정중한 인사는 살갑다기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싹싹하게 인사를 하는 파트리샤가 빈우로서는 더 불안했다.

“아, 맞다, 총.”

오다 의원은 허겁지겁 손에든 가방을 열고선 총기 비슷한 것을 하나 꺼냈다.

“실은 제 사물 중에 이런 총이 있었는데 등록을 해야 하나 싶어서 가져왔어요.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총이라고요?”

블랙 랜스에 들어오는 물건들은 전부 검사한다. 물론 상원의원의 사물은 건드리지 않는 게 관례지만 빈우는 쌩까고 전부 검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때의 검사에선 딱히 위험하거나 수상한 물건은 없다고 했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네, 여기요.”

오다 의원으로부터 받은 총을 살펴보던 빈우는 이게 왜 검사에 걸리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화약식 총기입니까.”

“네. 조금 골동품이죠?”

그녀가 총이라고 말한 것은 회전식 탄창에 화약 격발씩 탄환을 끼워 쓰는 리볼버 권총이다. 만일 총신에 각인된 1873이란 숫자가 모델의 제조연도를 나타내는 숫자라면 조금이 아니라 근 350년 정도 전의 물건이다. 이런 건 제아무리 군인인 빈우라 할지라도 다룰 줄 모른다. 그냥 상식과 역사 시간에 배운 지식에 근거해서 만질 뿐이다.

“응?”

총을 살펴보던 중 빈우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놀랍죠? 이런 오래된 골동품, 진품 화약식 총기를 보시는 건 소령님도 처음이지 않나요? 선물로 받은 건데….”

신나서 설명하는 오다 의원에게 미안하지만 빈우는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의원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오다 의원은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빈우에게 호기심 반 기대감 반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거. 짝퉁입니다.”

대답은 한 템포 늦었다.

“예. 그렇습, 예? 예에에? 왜요?”

빈우도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연방 상원의원에게 이런 가짜를 선물로 줄까 하고.

“그럴 리 없어요, 이건 로즈필드 의원께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총의 이름처럼 평화를 만들라고.”

갑작스러운 통보에 오다 의원은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 총은 그녀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선물이었던 것 같다. 헌데 총이 평화를 만든다니. 그건 평화를 반대하는 놈들을 조용히 시키는 방법뿐이다.

아무튼, 그건 둘째 치고 상원의원이 같은 상원의원에게 짝퉁을 선물한다? 어지간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여 있다면 작정하고 오다 의원에게 모욕을 주려는 제스쳐다. 혹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빈우는 다시금 찬찬히 총을 살펴보았다.

“얼레?”

가방 안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한 빈우는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어흠.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의원님, 이건 진품이 맞습니다.”

오락가락하는 빈우의 발언에 오다 의원의 시선에는 의심의 농도가 짙어졌다. 뒤편에서 쏘아지는 팀원들의 눈초리엔 기대와 경계가 반씩 섞여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거 오해다. 이걸 보라고.”

불편한 시선들이 빈우를 향해 집중포화 됐다. 황급히 빈우는 백기를 들듯 사건의 원흉을 들어 보였다. 오른손에는 19세기에나 쓰였을 법한 리볼버 권총이, 왼손에 들린 섬유재질의 서류엔 정품증명서라고 쓰여 있었다.

“키야, 이건 부팀장님보다 오래 묵었는데.”

파트리샤가 휘파람을 불며 다가온다. 그러다가 아까의 빈우처럼 눈빛이 알쏭달쏭하게 변해간다.

“에엥? 이게 진품이라고요?”

평화를 만드는 자란 별명을 가진 권총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파트리샤가 손잡이를 날름 핥아보았다.

“생성기 맛이 나는데? 진품 맞아요?”

“오냐, 옜다, 증명서.”

그녀의 질문에 빈우는 진품 증명서를 내밀었다.

“오마나, 이거 문서대로라면 진품이 맞는데, 설마 문서까지 위조한 건 아니겠죠? 응? 진짜 정품 맞나?”

그제야 눈치를 보던 373 팀원들이 총과 파트리샤 옆으로 모여들었다.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의 주제는 당연히 오다 의원의 권총이다. 350년 전의 골동품이라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게 진짜냐 가짜냐 라는 얘기가 나오니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 당시 기술이나 재료를 써서 복원하지 않았을까요? 보통 골동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나요?”

안경 형태의 시각 강화 고글을 낀 모니카가 총의 성분을 자세히 분석하며 물었다.

“냄새 맡아보니까 얼마 전까지도 썼네. 실사용을 목적으로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총기법 상 요즘에 쓰면 안 되는 재료라도 있었겠지.”

파트리샤는 총구를 훅 분다, 냄새를 맡는다 하면서 이리저리 장난을 쳤다. 그때 옆에서 아룹이 튀어나와 파트리샤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총을 뺏었다.

“일단 만든 회사의 정품인증서가 있으니 법적으론 정품입니다. 허나 교체된 부품의 재질이나 그걸 만들 때 쓰였던 기술로 볼 때 어흠, 선물 받으신 상원의원님께는 실례가 되겠지만 수집가들한테는 외면받는 물건이군요.”

눈을 빛내며 총과 서류를 꼼꼼히 훑어보던 아룹은 이내 흥미를 잃어버린 듯 한발 물러서며 설명했다. 아마도 그 자신이 수집가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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