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녀를 돌려보내고 빈우가 간 곳은 현재 이번 작전에서 자신이 타게 될 연방의 주력전투기, 롱소드 앞이다. 수많은 개량을 거친 눈 앞의 G형은 샤다이를 제외한 대다수 종족의 우주 전투기에 비해 확연한 성능적 우세를 보이는 걸작품이다.
문제는 저 대다수 그룹에 이번 작전 지역의 라출노그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기체의 스펙만 따지면 라출노그의 전투기들은 롱소드에 비교 대상이 못 된다. 그러나 이 해양종족의 전투기와 전투함들은 철저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움직인다. 그 탓에 과거 라출노그와의 전투에서 당시 최신예 전투기였던 롱소드 E, F형은 기껏해야 1:35라는, 그러니까 고작 35대를 격추하고 자기가 격추되는 굴욕적인 교환비를 기록했었다.
그리고 절치부심해서 나온 것이 이 G형이었다. 차세대 전투기인 엑스칼리버가 양산에 들어갈 때까지는 연방의 우주를 지킬 놈이다.
“이거 바닐라네.”
눈앞의 순정 롱소드를 보며 빈우는 아쉽단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도 그럴 것이 태스크 포스 373에서 전투기를 몰 팀원은 우지뿐이라, 지금 이 기체는 예비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지! 리미트 해제!”
조종석에 올라탄 빈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면 패널의 왼쪽 가장자리를 세 번, 오른쪽 가장자리를 세 번, 마지막으로 위쪽으로 주욱 그었다. 그러자 디버그 모드로 들어간다. 그리곤 소프트웨어적으로 제한하는 동력로의 한계를 풀었다.
“다음은, 물리적으로 리미트 해제.”
빈우는 숫제 콧노래를 부르며 진동 나이프를 뽑아 쓰로틀 레버의 구간에 집어넣은 다음 더 위로 그어 홈을 갈랐다. 레버의 영역이 억지로 넓혀졌다. 더 위로 미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덕분에 이 롱소드는 기존의 것에 비해 출력이 150%나 상승했다.
물론 그 대가로 엔진의 수명을 후루룩 말아먹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이렇게 한계 이상의 출력을 내는 건 안전에도 문제가 있어서, 3분 이상 연속사용은 권장되지 않았다.
-와앗! 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우지도 그러던데, 팀장님까지.
아니나 다를까. 팀원들의 장비 전체를 책임지는 모니카 보르자 대위의 비명이 통신회선에 울린다.
“뭘, 어차피 우리 장비는 작전 한번 나갔다 오면 싹 바꾸지 않냐.”
-에, 아니 그건 그렇지만요.
일반적인 부대와 달리 특수전 사령부 소속의 작전팀이나 전단들은 장비의 보급과 수리에서 엄청난 특혜를 받는다. 한번 임무에 투입된 장갑복의 인공 근육이나 기체의 동력로, 엔진 같은 중요 부품들은 무조건 전면 교체에 들어간다. 최고들에겐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모니카. 의외네? 막 이런저런 개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순정 바닐라 취향이라니. 독특해.”
-에잇! 그건 과학기술국에 대한 편견이에요. 우린 실험이라면 모를까, 실사용에서는 매뉴얼대로 진행한단 말입니다. 이상한 개조나 개량은 되도록 피한다고요.
투덜대는 모니카의 목소리에선 저번 작전에서 보였던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봤을 땐 심박수가 조금 오른 상태이긴 했지만, 이렇게 말싸움을 할 정도면 나쁘진 않다. 모니카의 심박수는 다른 이유로 오르고 있었다.
“보르자 대위의 고견은 이렇다신다. 그럼 경험자들의 의견 받겠습니다. 우선 나부터. 방어막 작동하면 굳어버리는 장갑복은 뭐 하자는 심보냐?”
-아니, 그건 우리가 안 준다는 거, 레드우드 사령관님께서 가져가신 거잖아요.
허둥지둥 대답하는 모니카의 말꼬리에 다른 팀원들이 장난스레 들러붙는다.
먼저 첫 개시는 아니나 다를까 파트리샤.
-어, 이거 우리 윗기수 얘긴데, 인필트레이터 프로토타입 때는 착용자가 줄줄 녹아나는 사고가 났다더라?
-언니, 그거 프로토타입이잖아요. 프로토타입은 원래 그런 걸 알아보기 위해 만드는 거고요. 또 다들 원상 복귀 되었어요.
다음으론 언제나 친하게 따르던 위르겐이 모니카의 등 뒤에 칼을 꽂는다.
-위은쓸납학에 처박았던 우리 뱅가드의 기함, 원더풀하고 뷰티풀을 과학기술국에서 수리하겠다고 가져가더니 짠 하고 쌍동선으로 붙여서 원더풀뷰티풀 만들었잖습니까. 어찌나 좆 같던지. 내 것도 그렇게 해주세요.
-야아아! 위르겐. 그거 너희 쪽에서 부탁한 거거든? 그리고 네 것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반으로 갈라주랴?
씩씩대던 모니카는 다음으로 경험 많은 아룹이 뭔가 무시무시한 거 하나 날릴 줄 알고 잔뜩 긴장했다. 그런데 다음 타자는 의외로 우지였다.
-제 경험담은 아니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과학기술국 쪽 테스트 파일럿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아, 됐어. 싫어, 당신들 정말 싫어!
바짝 약이 올라 울먹이는 모니카를 보며 팀원들이 낄낄댄다.
그렇게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이 팀원들을 태운 블랙 랜스는 어느새 디안머 2 게이트로 이동했다.
이제 여기서 점프하면 라출노그 항성계의 비밀 게이트로 나오게 된다.
-함장님. 롱소드들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지금요?
게이트를 통해 점프하려면 점프 엔진이 필요하고 그것은 지금 블랙 랜스에만 있다. 롱소드들이 블랙 랜스 바깥으로 출격한들 게이트를 통해 점프하지 못한다.
-견인해서 관성 제어장치 범위에 넣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비록 외부에 있는 기체라 해도, 이렇게 견인빔으로 서로를 연결한 다음 관성 제어장치를 통해 같은 관성계에 들어가면 모함과 함께 점프가 가능하다.
주로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우주 전을 벌여야 하는 경우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함재기를 출격시킨 후 모함과 점프하는 것이다.
오르 함장은 빈우가 라출노그 항성계에 도착한 후, 긴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출격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선선히 승낙했다. 허나 빈우에겐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바로 점프 공간 안에서 샤다이와 조우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점프 공간 안에서 다른 존재와 마주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실제 빈우는 포말하우트 게이트의 점프 공간 안에서 리퍼와 마주쳤었다. 그때 자신이 이끌었던 울토르 중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아무래도 이번 샤다이와 라출노그 간의 접촉은 수상한 점이 없잖아 있어.’
빈우는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연방의 여러 정보부서들이 아무런 전조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런 대형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서 그는 혹시나 이것이 태스크 포스 373을 꾀어내기 위한 함정은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해본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가능성도 작아 팀원들에겐 딱히 알리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출격한 빈우와 우지의 롱소드는 모함 블랙 랜스의 곁으로 다가와 거리를 적당히 둔 다음, 서로 견인빔으로 연결해 블랙 랜스의 관성계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디안머 2 게이트와 그것을 관리하는 점프 포인트가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통상 공간에서 점프 공간을 통해 다시 통상 공간으로 나오는 점프 항법은 게이트끼리만 연결되어 있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함선에 점프 엔진이 달려 있어야 했고, 출발지와 도착지의 게이트 양쪽에 점프 엔진을 가진 위성인 점프 포인트가 필요했다.
-블랙 랜스, 점프합니다.
오르 함장의 통신과 함께 태스크 포스 373은 디안머 2 게이트를 통해 들어갔다. 잠시 후 점프 공간을 스친 블랙 랜스는 라출노그 항성계에 도착했다.
‘괜한 걱정이었나.’
싱겁게 통상 공간으로 바로 나오자 지레 긴장했던 빈우는 저도 모르게 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견인빔을 풀고 날아가려던 빈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팀장님. 상황이 조금 이상합니다.
게이트를 나온 다음 주변을 정찰한 오르 함장은 이상징후를 발견하자 즉시 빈우에게 보고를 했다. 자료를 본 빈우는 무엇이 문제인지 곧장 깨달았다.
“조난 신호가 없군요. 구출 완료 신호도 없고.”
-네. 이건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보고 받기론 샤다이 전열함이 감춰져 있는 소행성대 근처에서 연방 중앙정보국의 위장 함선이 조난을 가장해 표류하며, 라출노그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난 신호를 보내는 것이 마땅했다.
연방과 라출노그는 동맹 관계라 이런 위급신호는 공용으로 쓰고 있었고, 해당 신호를 수신했을 경우엔 최우선적으로 구조하기로 협약되어있다. 그리고 구조를 완료하면 대략적인 내용을 담은 통신을 발신하거나, 해당 내용이 담긴 신호기를 놓아 주변에 송출한다. 구조신호를 수신한 구조자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허나 지금은 두 신호 모두 잡히지 않고 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빈우는 최악의 경우부터 떠올렸다.
“데넥샬들이 선수를 쳤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골치 아프군요.
오르도 빈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현재 빈우가 예상한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애가 탔거나 위장을 눈치챈 데넥샬이 표류하고 있는 연방의 배를 격침하고 샤다이 전열함의 회수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맹의 함선을 공격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이나 비밀리에 처리하려 했을 수도 있고-당장 태스크 포스 373처럼-아니면 그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이번 일을 강행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함장님.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저는 먼저 샤다이 함이 있는 소행성대로 향한 뒤 정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지는 정보국 위장선이 있던 최종 위치로 가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한 후 내 쪽으로 합류한다. 블랙 랜스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십시오.”
전열함이 있는 목표지점은 소행성대라 외부에선 레이더나 여타 센서로 자세한 탐지가 힘들다. 그래서 빈우는 롱소드로 먼저 소행성대 내부로 들어가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조난 신호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현장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필요가 있기에 원래 표류지점으로 우지를 보냈다.
빈우는 이번 작전에서 롱소드들의 설정을 전투보다는 스텔스와 탐색, 전자전 위주로 해놓았다. 비록 제대로 된 전자 전기나 정찰기만큼은 아니지만 상대가 라출노그라면 들키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정도는 충분하다.
두 기의 롱소드와 블랙 랜스는 최대한 정체를 감춘 채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먼저 소행성대로 들어간 건 빈우였다. 이곳은 라출노그의 자원채취구역이라 곳곳에 소행성들의 움직임과 정보를 수집하는 인공위성들이 있었지만, 한세대 떨어지는 그들의 기술로는 롱소드를 발견하지 못했다.
위성의 감시와 주변 운석들을 피해가며 빈우는 조심스레 나아갔다. 라출노그의 주된 원거리 감지방법은 전자파를 이용한 레이더다. 하지만 지금 롱소드들의 장갑은 대 광학 병기용 장갑으로 라출노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자파에 대응하도록 설정해놓았다. 아무리 전자파가 날아온들 이 장갑에 난반사되어 돌아가지 못한다.
롱소드의 센서들은 주변을 탐지하여 암석군들의 위험도를 즉각적으로 파악해 분류한 다음 조종에 피드백했다. 이제 부딪혀서 위험할 정도의 물체들에는 자동으로 반응하여 회피하지만, 그 이하의 것들은 무시하고 그대로 나아간다.
마침내 빈우의 롱소드가 목표물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이거 이거, 불안한데.”
투덜거림이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센서에 잡힌 것은 모습을 숨기지 않은 샤다이의 전열함 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기가 훨씬 컸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센서는 마치 옆에 배 한 척이 더 있는 듯이 반응했다. 빈우는 자신의 불안감이 차츰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서 더 접근하자 롱소드의 망원 센서에 샤다이의 전열함과 거기에 도킹해있는 라출노그의 신형 군함이 들어왔다. 그 배는 얼핏 보기에 아귀급 포격함 같아 보였다.
아귀급은 데넥샬의 주력 전투함으로 추진기 대신 다수의 소형정들을 도킹해서 쓴다. 그러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이 소형정들을 분리해서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포격으로 엄호하는 전술을 쓴다.
그 아귀급과 비슷하지만 좀 더 강화된 모습을 한 전함이 샤다이의 전열함에 먼저 와 있었다.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전투 개시. 목표물에 라출노그가 먼저 접촉했다. 함장님, 전파방해 최대로 하고 원거리 엄호 부탁합니다. 우지, 이쪽으로 오면서 방해전파 발신기 있는 거 다 뿌려라. 부팀장, 그라디우스로 출격하세요. 목표는 라출노그의 신형 아귀급.”
빈우는 통신을 날린 다음 자신의 롱소드를 몰아 신형 아귀급으로 돌진했다. 아무리 롱소드라 해도 데넥샬의 아귀급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라출노그의 전열함 나포를 막아야 하니 나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