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따지고 보면 태스크 포스 373도 워프 비스트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보안국이 군침을 질질 흘릴 정도의 고급 자료가. 다만 그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를 찾기 위해선 자료의 원주인이었던 피에르 라캉 중령의 인격복제 AI인 아를르캥의 도움이 필요하다.
“저기 팀장님. 그 라캉 중령께서 숨겨진 자료를 찾기 위해 다 같이 아를르캥이 만든 식사를 몇 번 먹었잖아요…. 혹시 팀장님은 뭐 알아낸 거 없으세요?”
빈우도 아를르캥이 보여주는 반응과 행동, 메뉴 등에서 단서를 찾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파편 몇 개를 찾았을 뿐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은 없다.
“아직 확실한 게 없어. 단서야 있다지만 자음 모음 몇 개로 주관식 문제를 풀 순 없잖아.”
“에헤에~ 진짜요?”
모니카가 장난기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빈우를 보더니, 슬그머니 상체를 이쪽으로 기울인다.
“아니, 진짜라니까. 왜 그래? 내가 이런 거로 거짓말하겠어?”
“팀장님이 누굴 속여먹은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소, 속여먹다니!”
모니카의 말에 빈우는 입까지 떡 벌렸다. 언제나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다 자부하던 그에겐 정말로 충격적인 말이다. 억울한 빈우는 뭐라 항변해보려 했지만, 모니카 옆에서 그녀의 잔에 커피를 채워주던 아나스타샤의 시선에 움찔했다.
“그러니까 좀 작작 하셨어야죠.”
“아나스타샤! 너마저!”
빈우는 의기양양해서 키득거리는 둘의 시선을 피해 눈을 접시로 내렸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듯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나 맛있고 달콤했던 아나스타샤의 초코케이크가 오늘은 유달리 썼다.
* * *
그렇게 모니카와의 회의와 저녁식사가 끝난 후 빈우는 그녀를 방까지 배웅해 준 다음 돌아가고 있었다.
“아샤, 나 지금 모니카 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길이야.”
-잠깐만, 지금 뭐라고요?
“지금 모니카를 방에 바래다주고 돌아간다고. 정리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러나 통신 너머의 아나스타샤에게서 답이 없었다. 그동안 쌓인 경험상 빈우는 이럴 때 굉장히 안 좋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야 이 화상아!
아니나 다를까, 빈우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바래다주랬다고 그냥 바래다주는, 어우! 아, 내 감정 모듈.
자신의 주인에게 젖을 먹여 키우고 가르쳤던, 또 같이 커가면서 주인에게서 행동거지를 배워왔던 안드로이드가 폭발했다.
-아아, 어떡해. 저 마님 사진을 똑바로 못 보겠어요. 마님 죄송해요. 제가 도련님을 잘못 키웠나봐요.
“거기서 어머니가 왜 나오는데. 맞다. 혹시 너한테 따로 당부하신 거라도 있어?”
빈우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어떻게든 흐름을 돌리려 했다. 어떤 인공지능이든 빈우에게 걸리면 탈탈 털리게 되지만 지금 대화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빈우를 직접 키웠고, 또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던 만큼 쉽지가 않다.
-말 돌리지 마세요. 굳이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만나서 인연도 쌓고 오늘은 또 제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고급스러운 식사 자리까지 마련했는데, 그냥 바래다 만 주고 돌아오다니. 어이구 이 답답아.
“아니, 나 걔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어. 무슨 오랜 시간이야.”
-밀도! 밀도!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사선을 넘나들었잖아요!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나 부하들 하곤 그런 관계 안가.”
-배가 불러 할복을 하시네. 그럼 상사 마누라하고 딸하곤 그런 관계 가고요? 이노우에 국장님 마누라하고 따님은 건드렸잖아요.
“야 이! 그건 사심 없이 단지… 아니 개인적인 원한으로 복수한 거고. 그리고 또 두 사람 다 끝까지 가진 않았어. 그냥 좀 뭐랄까, 가지고 논… 건 아니고. 시늉? 시발 논거 맞다 치고.”
-타하아아….
아나스타샤의 한숨은 영락없이 한심한 동생의 꼬락서니에 허탈해하는 누나의 한숨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 갖고 노는 시늉이라도 하시라고요. 연습 땐 잘하시던 분이 꼭 실전 나가면 저러시더라.
그녀의 말마따나 빈우는 이런저런 정보조직에서 여러 가지 대인관계 대응법을 배웠던 터라 이성에게 접근하거나 관심을 얻는 법 또한 제법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게 매뉴얼에 의한 행동이라 자신의 진심이나 호감에 의해 움직일 때는 서투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인은 가슴이죠?
“너 또 왜 그러니.”
불쑥 튀어나온 아나스타샤의 지적에 빈우가 골머리를 싸쥔다.
-어릴 때부터 주인님이 제 가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아요. 막내 아가씨 수유가 끝나서 수유용 유방을 일상용으로 교체했을 때 주인님이 보여주셨던 충격적인 시선,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 큰 게 갑자기 작아지면 당연히 놀라지. 갖다 붙이지 마세요. 아나스타샤 양.”
-그럼 언제 취향이 바뀌시기라도 한 거예요? 저번에도 오다 의원님의 가슴에 큰 관심을 보이질 않으셨으니…. 설마 진짜로 상체파에서 하체파로 전환하셨어요?
“상원의원 앞에서 눈깔 함부로 굴리다간 뒤진다.”
-그렇다면 아직 가슴 취향? 오케이, 접수. 지금 오다 의원님 훈련실에서 사격하고 계세요. 빨리 가보세요.
“아샤. 너 왜 이러니 지금.”
-주인님이 안드로이드 품을 떠나 제대로 된 인간 여성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가지길 바라는 제 간절한 마음을 모르신다면, 저는 오늘 밤 프렌치 메이드 옷을 입고 주인님을 기다린다는 결론.
“악! 썅, 상상했어. 갈게, 가면 되잖아!”
빈우는 갑자기 돋은 소름에 팔을 문지르며 훈련실로 내달렸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구축함인 데다 블랙 랜스는 함의 특성상 필요 시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거기다 빈우가 요즘 사령관실로 달려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훈련실에는 오다 의원 혼자 있었다. 사격 연습을 하다가 지금은 잠시 쉬는지 자신이 가져온 골동품 화약식 리볼버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여기 계셨군요.”
“어머, 팀장님. 잠시 실례하고 있었어요. 마침 팀장님이 식사 중이셔서 피아프 중위에게 허락을 맡고 쓰는 중이었습니다.”
“훈련실이라면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오다 의원이 훈련실에서 본 거라곤 373 팀원들의 피 튀기는 훈련뿐이라, 피와 금속 냄새가 그윽한 이곳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실제로 그날 이후 한 번도 이쪽으론 걸음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훈련실에 들른 것이다.
“실은 요즘 잠자리가 조금 불편해서요. 운동을 하면 조금 숙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그녀가 힐긋 하며 훈련실 안을 돌아보았다. 마치 뭔가를 찾듯이. 그리고 빈우는 그녀가 찾는 것이 무언지 바로 알아챘다.
“운동 기구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저희는 강화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육체 단련은 그리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다니, 함 내 생활이 불편하십니까? 말씀하시면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무리 신체 강화를 해도 오다 의원은 민간인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빈우는 그녀가 투박한 군함 내의 생활을 힘들어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 아니에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실은 자고 일어났을 때 의정활동에 관련된 정보가 하나도 안 들어와 있기에 조금 불안해서 말이죠.”
“아하, 그런 일이었습니까.”
연방의 시민들은 대부분이 하원의원이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군인이나 그 외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직업군 외에는 모두 하원의원이 되어 각 행성별 의회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 회의내용은 포지트론 웹을 통해 연방 의회에 업로드된다. 거기서 정렬되고 합의를 거친 내용들은 다시 의원들에게 다운로드 된다. 그리고 이 정보의 다운로드는 본인이 직접 할 수도 있지만 대개 수면 시에 두뇌 칩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쓴다.
하지만 블랙 랜스는 비밀 작전을 하는 함선이기에 당연히 통신에 제약이 있다. 때문에 빈우가 미리 말했듯이 연방의 의원이라면 누구나 하는 수면 시의 의정활동 갱신 또한 불가능하다. 또한 아무리 상원의원이라 해도 블랙 랜스에서 외부와 통신을 하려면 함장이나 팀장의 허락을 받고 접속해야 한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규정상 들어드릴 수가 없군요. 다행히도 몇몇 분들의 사례를 보면 곧 익숙해진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불편하시더라도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외에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그거 말고는 어디 보자… 맞다, 여긴 귀마개나 안전 고글 같은 건 없나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던걸요.”
말씀하라고 한 게 무색하게 처음부터 난관이다. 터프한 강화 군인에게 귀마개나 고글이 필요할 리가. 그런 건 생성기 매뉴얼에도 없어서 수동으로 만들어야 한다.
“죄송합니다만 저흰 그런 것은 쓰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쓰지 않는다고요? 안전장치 없이 사격훈련을 하신단 말씀이에요?”
놀라는 오다 의원의 말에 빈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그녀 앞의 탁자에 놓인 탄환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화약 추진제를 쓰는 납탄두군요. 무게는 7.5g. 아음속 탄이니까… 뭘 해도 운동에너지는 500J이 안 될 겁니다. 이런 건 우리 군인들은 맞아도 안 죽습니다. 자, 보십시오.”
빈우는 자신의 말을 증명할 겸 총을 장전한 다음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꺅! 하지 마세요! 총 내려요!”
오다 의원이 생각 이상으로 놀라서 호들갑을 떨자 오히려 빈우가 민망해졌다.
“저, 의원님. 저희는 이런 총을 맞아도 안 죽….”
“총 내리시라고요!”
“넵.”
빈우가 시무룩해서 총을 내리자 오다 의원이 잽싸게 낚아챘다.
“아무리 육체를 강화한 군인이라고 해도 제 총으로 사람을 겨누진 마세요.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이런, 제가 실례했군요. 죄송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빈우의 모습에 오다 의원이 피식 웃는다.
“그런데 군인들은 정말 사격 훈련할 때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냥 하나요?”
“천만의 말씀. 저희도 진짜 총을 다룰 땐 제대로 주의합니다. 일단은 장갑복을 입지요. 현재 연방에서 군용 장갑복 보다 뛰어난 개인 방호 장비는 없습니다. 뭐 대전차, 대물 사격을 하게 되면 장갑복도 위험합니다만. 아무튼 적어도 진짜 총을 다룰 때면 규정을 따르고 안전 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다 의원이 봐왔던 태스크 포스 373의 팀원들은 그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다.
“아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군에서 쓰는 총은 어떤 게 있죠? 그 진짜 총이란 거 말이에요.”
오다 의원의 그 말에 빈우는 옆의 총기 보관함에서 HM-22A 코일건을 꺼냈다. 현재 연방군의 제식화기이며 무수한 외계종족을 장사지낸 명총이다.
“소개해 드리죠. 저희 연방 군인의 애인 HM-22A 소총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오다 의원이 빈우가 내민 손에서 코일건을 들어보려 했지만 들기는커녕 빈우의 손에서 떼어낼 수조차 없었다.
“왁, 무, 무겁네요. 이거 장갑복 입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나요?”
“네. 기본적으로 장갑 보병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군인이라면 맨몸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보시죠.”
빈우는 저 멀리 표적을 하나 뽑아낸 다음 시범 사격을 보였다. 초속 3km로 날아간 니켈강 탄자는 목표에 명중, 산산조각을 냈다.
“어떻습니… 의원님?”
폼나는 각도를 의식하며 돌아선 빈우는 귀를 감싸 쥐고 바들바들 떠는 오다 의원을 보고 놀라서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으아아 귀가, 귀가 먹먹해요. 말이 안 들려어.”
오다 의원은 초음속 탄자의 발사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소리에 익숙해 있던 빈우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태 해결을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의원님, 진정하세요. 지금 의원님의 육체는 군 시설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 있습니다. 감각기관 수용치를 조절해보십시오. 안 들리십니까? 제가 대신해드릴까요? 아, 두뇌 칩 접속이 안 되네….”
힘겹게 빈우의 조언을 들은 오다 의원은 청각기관의 감도를 조율했다. 그러자 그녀의 귀에서 이명이 사라지고 통증도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