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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114화 (114/301)

114화

시작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았던 히토미의 장갑복 착용은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다. 빈우는 그녀에게 기본적인 작동법과 간단한 전투기동을 가르쳐주었고, 히토미는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배우려고 했다. 물론 빈우가 그녀를 살살 꼬드긴 것도 있지만.

“의원님, 혹시 저번 작전 때의 ‘청소’ 얘기 기억하십니까?”

“유사시에 아나스타샤가 저하고 자폭한다는 거 말이죠?”

“장갑복을 다룰 줄만 알아도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 겁니다.”

히토미는 정말 열성적으로 배웠다. 조금만 동기를 마련해 주면 죽을힘을 다해 따라오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그래서 빈우는 그녀가 따라올 수 있을 만큼 계속 동기를 제시해 주었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따라왔다. 게다가 그 운동량 덕분에 히토미는 오늘 밤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 * *

히토미가 지쳐 곯아떨어지기 일보 직전이 되고 나서야 훈련은 끝이 났다. 빈우는 기진맥진한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언제나 헌신적인 안드로이드 메이드 아나스타샤가 침대에 대자로 누워 나태하게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빈우의 시선을 끄는 것은 침대 옆의 탁자다. 거기엔 빈우가 질색팔색하는 프렌치 메이드 복이 잘 개어져 있었다. 아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닌 듯, 아마 수틀리면 정말 그거 입고 덤빌 속셈이었던 듯싶다. 아나스타샤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다녀오셨어요.”

“아직 안 자고 있었어?”

“불안해서 잘 수가 있어야지요.”

일어서서 주인을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의 눈은 말썽꾸러기 막냇동생을 추궁하는 누나의 눈이었다. 이어서 그녀의 입이 히죽 웃더니 심문이 시작되었다.

“오다 의원님과는 잘 해보셨나요?”

빈우는 그 시선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한두 해 같이 산 것도 아니라 둘은 서로를 제법 잘 파악하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웃음은 자기 주인의 연애 사업을 기대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번에도 높은 확률로 실패했을 것이란 예상에서 온 것이다. 척 봐도 주인을 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빈우는 여기서 반격의 승부수를 던졌다.

“뭐 그럭저럭. 의원님은 사석에서 히토미라고 부르라던데?”

“어머!”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나 무릎걸음으로 다가앉는다. 입가의 비웃음이 금세 기대와 활기에 찬 웃음으로 바뀐다.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뭐 자세하고 자시고, 이랬는데?”

그러면서 빈우는 아까 히토미와 나눴던 대화 중 일부를 재생했다. 음성만.

-자아 힘 빼시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요.

-아야야, 아파요. 차라리 제가 할게요. 억지로 밀어 넣지 마세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아나스타샤가 놀라서 일어서다가, 무릎으로 치마를 밟고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빈우가 우당탕하고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주지 않은 것은 이 상황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너 그러는 거 보면 진짜 인간 같다니까.”

“아야얏, 방금 그거 진짜예요?”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를 문지르며 눈물을 글썽인다. 로봇이라면 하지 않는, 그리고 일반 염가형 안드로이드라면 할 수 없는 인간의 의태다.

“글쎄. 어떨 거 같아?”

빈우는 의자에 푹 기대앉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즉시 애교를 부리며 주인의 팔에 매달렸다.

“아이참, 제가 잘못했어요. 주인님. 가르쳐주세요.”

그러면서 커피를 준비한다, 다과를 준비한다 부산을 떨고 아부를 했다.

“싫어. 네가 맞춰봐.”

하지만 빈우는 쿠키를 먹으며 튕겼다. 아나스타샤는 주인의 얄미운 모습을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가끔씩 빈우를 샐쭉하게 흘겨보는 눈빛이 ‘뭔가 수상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정을 한 듯 아나스타샤가 주인에게로 스윽 다가가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한다.

“이거 원래 다른 내용인데 중간만 뚝 잘라 저를 속이시는 거예요, 맞죠?”

“우리 아샤 똑똑하기도 하지, 정답.”

빈우가 대답을 하자마자 아나스타샤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얻어맞은 주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바보같이, 좋다고 속는다.”

“아아아! 진짜 얄미워어!”

빈우의 말에 잠시나마 홀딱 속은 아나스타샤가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른다.

“자 됐지? 이게 저 흉한 거 치워라.”

여기서 흉한 것이란 물론 탁자 위의 프렌치 메이드 복이다. 주인을 놀리려다가 오히려 잔뜩 놀림만 받은 아나스타샤는,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려는 주인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비죽 내밀고 반격을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 도련님 취향은 차암 이상하시단 말씀이에요?”

“예끼, 고얀 것. 감히 주인의 취향에 왈가왈부 말렷다.”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하든 빈우는 의기양양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다음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한 채.

“그래요, 취향요. 분명히 주인님은 상체파인데, 희한하게도 속옷 취향은 검정 팬티에 스타킹이시란 말이지요.”

커피를 마시다가 사레들린 빈우가 캑캑거린다.

“너 그거 몇 년째 우려먹을 거냐. 내가 어릴 적에 그 팬티 한 번 사줬다가 이게 무슨 변이니. 인제 그만하자, 응?”

그러나 주인의 명령에 성실하게 복종하는 안드로이드 메이드 아나스타샤는 전혀 들을 기색이 없었다.

“어릴 적? 하, 요즘도 틈만 나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시면서. 그런데 레이스는 좋아하시면서 또 이런 옷은 싫어하시다니 제가 당최 종잡을 수가 없어요.”

아나스타샤가 들어 보인 ‘이런 옷’은 방금까지 탁자 위에 있던 프렌치 메이드 복이다. 현재 그녀가 입고 있는 빅토리안 스타일의 제복과는 전혀 다른, 가슴과 엉덩이만 아슬아슬 간신히 가리는 위험한 복장이다.

아나스타샤는 옷을 보자마자 대번에 얼굴을 찡그린 주인과 자기 손에 들린 메이드 복을 번갈아 보더니 문제의 프렌치 메이드 복을 자신의 몸에 한 번 대어본다.

“야 이! 하지 마!”

터져 나온 빈우의 비명에 아나스타샤가 화들짝 놀란다.

“깜짝야, 왜 소릴 질러요. 잘못하면 치겠네.”

빈우는 놀라서 툴툴대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 손에 든 옷을 냉큼 뺏었다.

“이딴 거 버려. 이건 사도야. 네가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사마외도의 물건이란 말이다.”

그리곤 옷을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분해시켰다. 하지만 빈우의 뒤로 아나스타샤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요? 그럼 이건 명문정파네요?”

돌아본 빈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나스타샤의 손에 들린 검은색 망사팬티다. 바로 솔리드 베타에서 찰리하나팔의 손에 잡혔던, ‘이거 믿지 마라’라고 적힌 팬티다.

“아악!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아나스타샤는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주인의 손을 피해 팬티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어디긴요. 주인님 책상 정리하다 발견했죠. 진짜-, 이런 건 어디서 구한 데요? 만든 것도 아니고.”

“에잇, 이리 내.”

빈우는 빼앗으려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가슴을 방패 삼아 들이밀며 허리 뒤로 숨긴 팬티를 지켰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이거 저 입히려고 산 거죠?”

“너 줄 거 아냐.”

“에이, 또 거짓말하신다. 그럼 누구? 보르자 대위님? 피아프 중위님? 그것도 아니면~.”

이럴 때의 아나스타샤는 꼭 누나 같다. 동생의 약점을 놀리려는 짓궂은 누나.

“좋아 대답할게, 대신 조건이 있다.”

포기한 빈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협상을 시도했다.

“조건? 흐흥. 좋아요. 말씀해보세요.”

주도권을 가진 아나스타샤가 한껏 기세를 부린다.

“먼저 약속부터 하나 하자. 아샤 네가 내 부탁 하나 들어주면 그 팬티가 어디서 왜 났는지 말해줄게. 어때?”

“뭐, 그 정도면 좋아요.”

아나스타샤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빈우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좋아, 약속. 약속하는 거다?”

분위기에 떠밀린 메이드는 자신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주인과 서로 마주 걸었다.

“네. 약속.”

아나스타샤처럼 인간을 의태 하는 인공지능의 단점 중 하나는 인간이나 일반적인 인공지능이라면 걸리기 힘든 함정에 제법 잘 빠진다는 점이다. 판을 깔아놓은 빈우는 명령을 내렸다.

“자, 그럼 먼저 내가 부탁할게. 그 팬티 입어.”

“예? 엣? 어어어라아?”

아나스타샤가 아무리 인간답다고 해도 결국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다. 이번에도 인간이라면 탈출할 수 있는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우우.”

울상을 지은 아나스타샤가 팬티를 손에 들고 우물쭈물한다. 이 문제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주인과 자신이 한 약속이란 점에서, 그녀에게 상당한 제약을 주고 있었다.

“이잉, 못됐어. 여기에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 꼭 이래.”

그녀가 말한 ‘여기’란 팬티를 입을 자리를 말한다. 특수목적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아닌 이상 다리 사이에 별다른 부품을 달아놓을 리가 없다.

“그걸 잘 아는 넌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인간님들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 놨고 또 주인님이 저를 이렇게 키웠잖아요.”

공장에서 갓 나온 다른 쿠델카 모델이라면 모를까, 근 삼십 년을 인간과 지낸 아나스타샤는 정말 인간처럼 행동하고, 감정을 느낀다.

“피장파장이지. 날 이렇게 키운 게 너잖니.”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하건 말건 빈우는 숫제 커피잔에 위스키를 콸콸 따르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좋아요, 입을게요. 입으면 되죠?”

마침내 결심을 하고 기합을 넣은 아나스타샤가 검은색 망사팬티를 입기 위해 한쪽 다리를 살짝 들었다.

“오오, 안에 팬티와 스타킹을 안 벗고 그 위에 바로 덧입는다고? 머리 좀 쓴다? 어디서 저런 못된 꼼수를 배웠을까…. 맞다, 나겠지!”

“으앙.”

참지 못한 아나스타샤가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자 빈우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에게 갔다.

“됐어, 됐어. 그만해. 아샤. 장난이었어. 장난.”

주인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만하라고 하자 메이드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아… 저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세요. 혼란스럽다고요.”

“이 정도로? 에휴, 아샤 너도 아직 멀었구나. 자자, 울지 마.”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뭐, 나도 해결할 수 있었어요. 수동 상태로 들어가면 그런 명령들은 우회하거나 무시할 수 있으니까.”

“로봇 모드 말이지? 어머나 고마워라. 그건 또 내 특기 아니겠니. 다음에 수동 상태 들어가면 꼭 말해줘. 봉춤 가르쳐 줄게.”

아나스타샤는 약이 올라 주인을 밀어내려 하고 빈우는 또 그런 그녀를 끌어안으며 달래주려 한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투닥거리며 치고받았다. 한참을 울던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진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나스타샤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고, 빈우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내려다보며 인사를 했다.

“잘 자, 아나스타샤.”

“네. 주인님도 피곤하실 텐데 얼른 주무세요.”

인사가 끝나고 아나스타샤는 바로 잠들었다. 정확히는 수면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빈우는 그 모습을 보며, 방금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의 그 팬티를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마커로 쓴 메시지가 보인다.

-이거 믿지 마라.

빈우가 찰리하나팔으로 위장하고 있을 때 그 ID로 쓴 마커다. 얼마 전 그는 이 팬티를 언젠가는 아나스타샤가 발견할 수 있도록 적당히 숨겨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나스타샤가 이것을 발견해 빈우에게 들고 왔다.

‘일단 연결점은 없어 보이는데.’

방금 아나스타샤가 이 팬티를 봤을 때 보인 태도와 반응은 마치 처음 보는, 알지 못하는 물건을 대하는 것 같았다. 속이거나 숨기는 언행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그녀와 오래 살아왔고 또 AI 전문가인 빈우에게 금방 들켰을 것이다.

빈우가 마카로니에서 부상한 다음 확보한 증거, 메시지가 적힌 팬티는 마커스의 조사결과 아나스타샤와 같은 쿠델카 모델이 입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팬티에 남은 조직 세포의 등록번호는 아나스타샤의 것이 아니었고, 그 안드로이드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안드로이드가 솔리드 베타에 침투한 시기는 아마도 포말하우트 게이트에서 울토르 리퍼의 습격을 받은 뒤, 여러 부서의 입김이 닿았을 때로 추정된다.

왜 아나스타샤와 동일한 쿠델카 모델이 투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지만 몇 가지 짐작 가는 것은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빈우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안드로이드, 아나스타샤를 바꿔치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적은 그렇게 차츰 솔리드 베타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빈우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고, 또 어떻게 썼을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게다가 방금 아나스타샤와 약속을 하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걸었을 때, 빈우는 하나의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얼마 전 누군가와 새끼손가락을 건 적이 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기 위해. 문득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다.

‘엘리자베트 허드슨?’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다. 지워진 기억이나 기록의 이름일지도.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봐도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갈 길이 멀다 해서 서둘러선 안 된다. 방향을 잘 파악해야 하고 가는 동안의 계획 또한 잘 세워야 한다. 그리고 휴식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빈우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팬티를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씌우고 자기 침대로 갔다. 그리곤 내일 아침 그녀가 보일 반응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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