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죽이지 않는 편이라?”
무스후리의 속은 순간 타올랐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껏 당신의 손에 죽어간 자들은 뭐요?”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은 마치 오늘 저녁 반찬은 뭐냐는 듯이 차분한 말투다. 그리고 그만큼 섬의 대답도 태연했다.
“적을 만나면 그저 찢고, 가르고, 으깰 뿐이외다. 그러면 약한 자들은 그만 거기서 삶을 포기해버린다오. 한심한 노릇이지. 제국을 떠나 루비콘 라인을 떠돈 지 어언 백여 년. 진정으로 싸울 만한 상대와 겨뤄본 지가 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이제껏 셀 수 없는 생명을 앗아간 비홀더 1 전대장의 말에선 권태로움 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말에서 무스후리 사령관은 분노에 이어 가증스러움 마저 느낀다.
“찢고, 가르고, 으깬다라. 거기서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소.”
서서히 달아오르는 무스후리의 말을 이 섬이 대수롭잖게 받았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았지, 그렇지 않소?”
그 말이 라일라 무스후리의 기억을, 악몽을 되살렸다.
30여 년 전, 연방은 비홀더 전대를 나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비밀작전을 진행했었다. 목표는 다른 전대들과는 달리 오직 한 척으로만 구성된 1전대. 그 1전대를 잡기 위해 연방은 반란군으로 위장한 함대를 보냈다.
시나리오는 연방군에 반기를 든 중앙함대가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 비홀더 1전대를 친다는 내용이었다. 함대 하나가 굳이 반란군으로 위장한 이유는 후에 다른 비홀더 전대들에게 해명을 할 건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명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 사태는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
단 한 척. 50여 척에 달하는 위장 함대는-연방의 최정예인 중앙 제3함대는-단 한 척의 지구제국 순양함에게 전멸했다. 그동안 착실히 발전하여 따라잡았다고 예상되었던, 정확히는 착각했던 기술력은 그것을 뛰어넘은 압도적인 차이에 무력하게 짓눌렸다.
그리고 오직 한 명이다. 그날 출동했던 함대 중 무스후리가 탔던 함대 기함의 승조원 전원은 침입한 제국제 장갑 보병 한 기, 이 섬에 의해 사망했다.
‘살려줘- 살려줘-.’
‘그만해, 제발 죽여줘, 죽여줘!’
라일라 무스후리는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의 참극이 눈에 보이며, 그날의 비명이 귀에 들린다. 분투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격침되는 아군 구축함들, 순양함에 제국 장갑 보병이 침투하자 통신회선은 비명으로 가득 찬다. 반물질 어뢰에 직격당한 전함이 섬광과 함께 소멸한다.
‘적 장갑 보병이 지휘실로-’
무스후리의 그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눈에 보인 것은 마치 들러붙는 먼지를 밀어내려는 듯한 귀찮은 이 섬의 움직임. 제국의 전대장은 그렇게 무스후리의 내장을 뽑아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전투지휘실의 다른 이들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저 무자비한 폭력의 홍수에 휘말려 떠내려갈 뿐이다.
그날의 마지막 생존자는 지금도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굳어 있었다.
“이 전대장! 너무 무례한 것 아니오!”
보다 못한 니카우 함장이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바로 이 섬과 라일라 무스후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이다.
“누구도 내 배에서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방금 섬이 했던 말은 공식적으로 없었던 일에 불과한 것이고 여기선 오직 둘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카우 함장은 무스후리 사령관의 상태가 이상해졌단 걸 눈치채곤 바로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함장의 거센 항의에 이 전대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무례를 저질렀군. 내 사과하리다.”
이 전대장의 그 말에 무스후리 사령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 중에 잡생각에 빠진 내 잘못이오.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고개를 든 이 전대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요구를 밝혔다.
“다시 한번 말하겠소. 본관은 지난 한 달간 이곳 디안머 항성계의 모든 점프 게이트를 통과한 연방 함선들의 목록에 대해 알고 싶소. 대가는 그쪽의 성의에 따라 정하겠소.”
“혹시 그 대가에 무기도 포함되는 거요?”
“응? 무기라? 무기 따위라면야 바로 사용 가능한 것에다가 설계도까지 제공하겠소.”
그의 대답에 전투지휘실에 있던 모두가 군침을 꿀꺽 삼켰다.
현재 연방의 연구단체들이 구 지구제국의 기술력 복원에 매진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꽤 많은 기술들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구제국과 인류연방 간의 전체적인 과학기술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군사 무기 방면이었다. 허나 이에 관해서는 늘 답보의 상태였다. 남겨진 제국 시절의 군사 유물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살펴보면 볼수록 제국의 군사기술이란 과연 인류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전대장은 무기 따위라고 했다. 그렇다면 보상은 그것들을 훨씬 뛰어넘을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일단 무스후리 사령관은 이곳 디안머 항성계를 출입한 연방의 함선 목록들을 자기만의 회선으로 열람해 보았다. 상황을 봐가며 정보를 넘기고 기술과 교환할 셈이었다. 자신의 지위에 지구제국의 무기가 걸린 사안이라면 미리 행동하고 후에 보고해도 된다.
그러나 그녀는 목록을 살펴보던 중 다음 항목에서 그만 멈춰버렸다.
-태스크 포스 373.
특수전 사령부의 팀이다. 열흘 전, 태스크 포스 373의 모함 블랙 랜스가 이곳 디안머 게이트를 이용한 적이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보안국의 함대마저 같은 날 디안머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용기록을 보면 태스크 포스 373과 함께 점프한 것으로 나온다.
보안국과 특수전 사령부의 팀이 움직인 것이라면 연방 군에서도 최고기밀 사항일 게 분명하다. 함부로 외부에 유출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다른 함선들의 명단을 건네주면 될 일이지만 라일라의 직감은 비홀더 전대가 원하는 정보가 바로 이들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때, 고민하고 있는 무스후리 사령관에게 이 전대장의 말이 날아온다.
“참, 내가 미처 말 안 했구려. 급한 것은 당신들이라오.”
무스후리 사령관이 이 전대장을 보자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아마 본관이 원하던 정보를 찾으신 것 같소만. 그 정보를 원하는 것은 비단 내 1전대만이 아니라오. 다른 놈들도 그것을 쫓고 있지.”
그가 말한 다른 놈은 누구일까. 이 우주에서 특수전 사령부와 보안국을 추적하고 있는 팀은 과연 어디의 누구란 말인가. 다른 비홀더 전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적대적인 외계종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수전 사령부는 주로 외계종족을 전문적으로 조지는 부서고, 보안국은 아군 내부를 들쑤시는 부서다. 이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대상을 찾기는 힘들었다.
잠시 생각을 고르던 라일라 무스후리는 옆에서 들리는 경고음에 생각을 멈췄다. 아프사라스의 인공지능 부함장인 바바라가 적의 기습을 알리고 있었다.
“점프 반응. 샤다이입니다.”
전과 비교해 부장 바바라의 목소리는 차가워져 있었다. 전투에 들어가자 감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보좌하기 위한 상태가 된 것이다.
놀란 무스후리 사령관이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전 함대, 대 샤다이 진형으로. 구축함들은 중력 충각을 충전 후 방패 대형으로 좌익에 선다. 기함 아프라사스는 우익, 폭격기는 사이클론 어뢰를 장착하는 대로 즉시 출격.”
구축함들이 서로의 역장을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역장방어대를 만든다. 이 방어막은 질량이 낮은 고온 에너지 병기인 플라스마에 상당한 효과를 가진다. 대형 안에 있던 순양함들은 플라스마 포는 내버려 두고 함축 입자 가속 포와 코일건을 충전했다. 레이저나 플라스마 병기는 샤다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함 전열함 1, 모니터함 1.”
바바라의 보고대로 두 척의 샤다이 함이 통상공간에 안착했다. 그리고 연방의 함선들이 대형을 갖추는 동안 샤다이 전열함이 선체를 틀어 포구를 이쪽으로 향했고, 모니터함은 거대한 주포에 에너지를 충전하기 시작했다.
“역장방어막 우현 최대로, 내열 장갑 드론은 생성되는 대로 계속해서 살포. 전 입자 가속 포는 충전 후 대기.”
아프사라스의 니카우 함장도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콘솔을 조작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각자 판단에 의한 대응 포격이나 무작정 뿌리는 요란 포격은 큰 효과가 없다. 철저한 포격 관제에 따라 한 점에 화력을 집중해야 샤다이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다.
드디어 함대 사령관인 무스후리 소장이 공격목표를 지정한 다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 개시!”
징수 함대의 포격과 미사일이 샤다이 함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먼저 명중한 것은 레일건. 고속 고중량의 포탄들이 집중공격 목표인 모니터함에 명중해서 샤다이의 방어막을 깎아낸다. 방어막의 섬광이 번쩍이며 포탄들을 튕겨내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잠시 후 연방 함대의 집중사격에 방어막이 사라지고 그 안으로 싸이클론 어뢰들이 파고들어 함의 장갑에 직접 명중한다.
샤다이 쪽에서도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옆의 전열함에서 연방 전함의 주포에 능가하는 위력을 지닌 플라스마 포가 무수히 발사되어 날아온다. 샤다이 놈들답게 관제가 엉망이라 날아오는 화선이 중구난방이지만, 하나하나가 위력적이라 재수 없게 눈먼 포격에 맞기라도 했다간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이에 대응해서 나간 것은 연방의 구축함들이다. 원래는 함대의 돌격대 역할을 맡을 구축함들이지만 지금처럼 샤다이와 싸울 때는 방패 역할을 맡는다. 그러기 위해 공격을 위한 동력마저 함수 충각으로 돌린 다음 서로서로 대형을 짠다. 그리고 역장방어막을 병렬로 연결한 다음 함대 앞으로 나섰다.
전열함의 플라스마 포화 중 몇몇이 함대를 향해 날아오다 구축함들의 밀집 충각 척력장에 튕겨 나간다. 그 대가로 방어한 구축함의 동력이 대번에 소진되었지만, 후열에 있던 동료함과 중력장에 의한 견인광선으로 서로 끌어당겨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동료함이 빈틈을 메꾸는 사이, 자신은 뒤에서 충각의 동력을 충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모니터함의 거포다. 일격에 전함을 소멸시켜 버리는 저 초대형 플라스마 포는 현재의 연방 기술로는 방어할 수 없다. 대처법은 회피하거나 먼저 격침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징수 함대의 공격은 처음부터 샤다이 모니터함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자기력으로 가속된 포탄과 아광속으로 가속된 중입자들이 방어막이 사라진 모니터함의 장갑을 박살 내고, 이어서 미사일이 날아들어 폭발한다. 다시 재생되려던 연약한 방어막은 뒤따라온 싸이클론 어뢰가 비집고 들어가 꿰뚫는다.
전황을 지켜보던 무스후리 사령관이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아프사라스는 샤다이 모니터함에 일제사! 이어 후열의 구축함들은 충각을 내리고 함축 포를 전열함에 발사. 충전되는 대로 쏴라.”
전함 아프사라스의 모든 포격이 모니터함에 집중되자, 마침내 그것이 쐐기가 되어 대폭발을 일으킨다. 함 체의 1/3은 될 만한 모니터함의 거대한 주포에서 충전된 플라스마가 폭발하고 그 여파로 모니터함이 두 동강 났다.
이어서 구축함들의 포격이 전열함에 집중되자 방어막이 명멸한다. 같은 위치로 순양함과 전함의 입자 가속 포가 날아가자 방어막이 사라졌다. 그다음부터 연방군의 공격은 전열함의 장갑에 직접 명중하기 시작했다.
놈은 발악해봤지만 이미 승세는 징수 함대 쪽으로 기울었다. 함대의 일제 포격 후 빈 사선을 채우며 몰려든 할버드 폭격기들이 싸이클론 어뢰를 퍼부었고, 그 뒤를 미사일들이 날아와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전열함 침몰.”
부장인 바바라가 샤다이들의 침몰을 확인했다. 잠깐의 정적 후, 누군가 환호성을 지르려 주먹을 꽉 쥐었을 때, 인공지능 부장이 또 한 번 경고를 했다.
“점프 반응, 샤다이입니다. 반응 다수, 3, 4, 5. 적함 계속해서 통상공간에 안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