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빈우는 홀로그램으로 서버의 인공지능을 호출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두뇌 칩으로 직접 접속했다. 그러자 서버의 전자신호들이 빈우의 감각 정보로 전환되어 들어온다.
지금 빈우는 통신 터미널이 아닌, 서버의 인공지능이 가상세계로 구축한 한적한 도서관의 입구에 서 있었다.
‘제법이군. 이런 심상 세계를 표현하는 관리자라니.’
터미널을 통해 조작하면 이쪽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도 제법 걸리고 접촉할 수 있는 정보에도 제한이 있다.
반면 지금처럼 두뇌 칩을 통해 관리자와 가상세계에서 직접 접촉하면 짧은 시간에 훨씬 많고 깊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이쪽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단점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장점이었다.
“누구시죠?”
사서로 보이는 중년남성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빈우를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보안이 삼엄한 비밀 공장에 낯선 이가 갑작스레 가상세계로 접속해 왔으니 의심할 만하다.
“이곳에 올 자격이 있는 인간. 지금 여기, 네 앞에 있는 나의 존재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나?”
관리자인 인공지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빈우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지만 동시에 그 자격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관리자가 만들어 놓은 가상세계에 접속하려면 먼저 연방의 두뇌 칩이 있어야 하고, 해당 교육과 OS 또한 필요하며, 결정적으로 보안 인증을 받아야 한다. 즉 연방의 인간이란 뜻이다.
빈우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것이 없지만, 저 세 가지 조건이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빈우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억제하고 있다. 연방의 인공지능은 연방의 인간을 적대할 수 없다. 설령 상대가 범죄자라고 해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을 불러야 한다.
“이곳에 있는 인간으로서 질문하겠다. 넌 무엇을 위해 일하지?”
“질문입니까?”
대뜸 물어오는 빈우의 질문에 인공지능은 의문을 표한다. 경고를 먼저 해야 할지, 아니면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다. 하지만 빈우가 바깥에서 터미널을 통해 접속했다면 모를까, 관리자 인공지능이 만든 이곳 가상세계는 외부와 시간 흐름이 다르다. 게다가 지금 빈우는 입구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위험도는 낮다. 인공지능으로선 인간을 적당히 대접하다가 보안 인증만 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빈우로선 빨리 저 인공지능을 회유해서 제대로 된 인증을 받아야 한다. 아니면 저 녀석은 빈우를 강제로 추방하고 경보를 울리거나 인간 관리자를 부를 것이다.
그때 관리자가 대답했다.
“저는 연방과 연방의 시민을 위해 일합니다.”
정답. 해답이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에게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틈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키워나가는 게 정석이다.
“네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지?”
“이 서버의 데이터와 공장의 보안입니다.”
다음 질문에도 인공지능은 역시나 바로 대답했지만, 이번엔 빈우의 기대에 약간 빗나갔다.
“좋아,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 네가 본질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지?”
“공장의 시설들과 기밀입니다.”
그다음으로 인공지능의 대답은 없었다. 원래는 여기서 ‘연방의 영토와 평화’란 말이 나왔어야 한다. 예상과는 조금 다른 답이 나왔지만 빈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너에게 봉사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나는 너에게 안전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 긍정하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기 위해선 이 서류에 서명을 해주셔야 합니다.”
인공지능 사서가 빈우에게 방명록을 내밀었다. 저기에 서명을 하면 빈우는 접근 권한을 검사받게 된다. 바깥에서 홀로그램을 통해 접속하는 중이었다면 어떻게 속일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가상세계에서 직접 접촉 중이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관리자인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꽤나 서두르듯이 질문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 세계에서 행동하는 인공지능이라면 모를까, 가상세계에서의 시간 감각을 알고 있는 인공지능들은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흠… 어떡한다.’
현재 빈우가 가진 공격 프로그램들로 인공지능의 보안을 뚫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방법을 쓸 경우엔 자칫 서버에 흔적이 남을 우려가 있다. 빈우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 전에 한 번 더 떠보기로 했다.
“너는 어머니와 섹스해본 적이 있나?”
중년남성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빈우는 즉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다. 도주용 더미를 뿌리고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빈우는 가상세계로부터 정상적인 로그아웃을 한 것으로 나온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빈우가 별다른 소득이 없이 도망을 치자 찰리하나팔이 물어온다.
“인공지능이 아니야. 인간이다.”
빈우는 복도를 급히 달렸다.
-설마 인간 관리자인 겁니까? 정보국 요원인.
“인간이 서버에 가상세계 만들어 놓고 기다리진 않아. 저건 뇌를 빼서 만든 임베디드 시스템이다. 인간을 인공지능처럼 부려먹는 거지.”
벽을 훑고 있는 빈우의 손에선 아직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를 맡아도 아직은 그대로다. 빈우는 자신이 나왔던 덕트로 다시 들어갔다.
-혹시 허수아비 아닙니까?
“허수아비도 결국 인공지능이다. 내 질문에 그런 반응을 하거나, 인간 앞에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긴 힘들어.”
빈우는 포복으로 덕트를 기어가면서도 벽을 만져보거나 냄새를 맡았다. 진동에는 지금까지와 별다른 차이가 없고, 냄새에도 케트쿤에게 알리는 경보의 페로몬은 없었다.
-인간에게도 더미가 통해서 다행입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속이는 것이니까. 인공지능처럼 사용하기 위해 그런 것을 만들었겠지. 인공지능의 한계를 넘은 인공지능.”
-그 뇌. 사람일까요, 클론일까요.
찰리하나팔의 질문에 빈우도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뇌를 시스템 안에 집어넣는 것은 당사자의 동의가 없다면 불법이자 중죄다. 자아를 가진 클론을, 그리고 그 뇌를 만드는 것 또한 불법이다.
“클론이라면 내 질문에 그런 반응을 안 하겠지. 아마 인간일 거다.”
-클론이라면, 말인가요.
클론인 찰리하나팔이 그렇게 중얼댈 때, 빈우는 건물 밖의 환기구로 나오고 있었다.
-그거 혹시, ‘인간 관리자’ 아닐까요?
그 말에 빈우는 잠시 멈칫했다. 찰리하나팔이 말한 질문한 의미는 아까의 ‘인간’이란 의미가 아니었다. 클론 제조시설의 관리자로는 인공지능과 군사정보국에서 파견된 요원의 둘이 있다. 이 중 파견된 요원들은 여기 있는 동안 스스로의 정체를 잊고 새로운 신분으로 잠수하게 된다.
“모를 일이지.”
빈우가 알고 있는 군사정보국이라면 할지도 모른다. 아니,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어차피 군사정보국 요원들은 기억을 하지 못하니, 파견 당시의 기록을 잠가버리거나 지워버리면 보안상 깨끗하다.
건물 아래로 내려온 빈우는 다시 조심스레 이동했다. 순찰을 도는 노예계급 케트쿤들은 따돌리기 쉬웠으나, 가끔 감독관 같은 상위계급들은 신경 써서 대처해야 한다. 어느 정도 안전한 구역까지 포복으로 빠져나온 빈우는 그제서야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장님, 아까 질문 말입니다.
아까의 질문이라면 빈우가 인공지능에게 했던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한계 바깥에서 인간이 가진 권리로 질문해 녀석들을 설득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연방의 인공지능은 연방과 연방의 시민을 위해 일하고, 그 영토와 평화를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 인간이 묻는다면 인공지능들은 대답이라기보다는 증명에 가까운 해답을 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빈우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빈우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연방을 위해. 하지만 그것을 위한 방법이 다르다.
‘워프 비스트와 그 협조자를 찾고, 죽인다.’
지금 연방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 얼음 밑에는 인간의 인지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악의들이 꿈틀대고 있다. 게다가 얼음 위의 동료들 중에도 적들이 숨어있는 상황이다. 물 밑의 악마들이 올라와 인간 흉내를 내며 자신들의 세를 불리고 있다.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연락을 하거나 정보를 공개할 수도 없다. 오직 적들만 찾아 착실하게 죽일 뿐이다.
오직 빈우 혼자서.
조사를 시작한 빈우는 먼저 워프 비스트가 울토르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아냈다. 그래서 빈우가 노린 것은 전 상원의장인 이케가미 소이치로였다. 그는 울트로 프로젝트의 창안자였으니, 가지고 있는 정보도 핵심정보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당시 실각하고 재야로 내려왔던 터라 매우 매력적인 사냥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느 날 갑자기 이케가미 소이치로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노린 것이 그의 비서였던 마리 라캉이다. 그녀는 비서를 그만둔 다음에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연줄로 남편이 있던 보안국에 들어갔었다.
새로운 목표물인 마리 라캉을 조사하던 빈우는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자크 라캉이 워프 비스트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정체를 숨기고 마카로니로 갔다는 것을.
연방의 다른 시설이었다면 빈우가 접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치 행성 글림을 거쳐 개척 행성인 마카로니로 갔다. 골치 아픈 것은 얼마 후 마카로니에 울토르 중대가 온다는 것. 그래서 빈우는 서둘러 마카로니로 갔고, 임무를 마친 다음엔 다시 글림으로 돌아가 마카로니에 울토르 중대가 온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필연이 겹쳐져 우연이 생길 뿐. 마카로니에 샤다이가 있었고, 라캉 모자 또한 있었다. 샤다이는 왜 마카로니에 갔지? 개척민을 위해? 아니면 마리 라캉을 위해? 그리고 울토르 중대와 진압함대. 진압함대의 전술은 대 샤다이용이었다. 연방군은 이미 마카로니에 샤다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빈우는 뒤늦게 자신을 노리는 적들의 시선을 느꼈다. 클론 제조시설을 나왔기에 방심했던 탓일까. 그는 몸을 숨기기보단 속도를 위해 이동하고 있었고, 케트쿤들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도 반대 파벌이군요.
찰리하나팔의 말대로 모습을 드러낸 케트쿤들은 연방에 복속된 동맹 파벌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의복과 표식으로 미루어 보아 연방과의 동맹을 반대하는 세력들이다.
-아니 잠깐. 이거 불행히도, 라고 해야 합니까?
찰리하나팔이 알려줄 필요도 없다. 놈들의 적대적인 페로몬은 이미 빈우도 감지했다. 또 대강 해석도 가능했다.
-연방의 공장에서 나온 연방 놈이다.
-침략자다. 껍질 없는 놈을 찢어버려라.
대화를 시도해보려 했지만 달려오는 적들의 무리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빈우는 사태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투박한 화약식 리볼버다. 거기에 쓰이는 장약은 케트쿤들이 쓰는 생체 폭약이고, 탄두는 케트쿤들의 이빨을 갈아서 만든 것이다. 현지조달이라기보다는 증거인멸을 위한 방안이다.
덤벼오는 케트쿤들을 향해 라이트를 비추자 움찔한다. 교란용 최루가스를 뿌리자 놈들의 더듬이가 오그라든다. 그리고 빈우는 권총을 쏴 놈들의 신경절과 관절을 노렸다. 케트쿤의 체액이 흩날리고 팔다리가 떨어진다.
따지고 보면 놈들의 목적도 빈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침략자를 죽인다. 응원할만하다. 빈우와 선 자리가 반대만 아니었어도 빈우는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잔인한 곳이다. 이겨서 살아남는 쪽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빈우는 이기기 위해 총을 쐈고, 살아남기 위해 놈들의 팔다리를 집어 들었으며, 목적달성을 위해서 그것을 휘둘러 케트쿤들의 목을 잘랐다.
-흥분하지 마세요. 병사 계급은 없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이에요.
찰리하나팔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빈우는 그것을 무시했다. 케트쿤들의 껍질이 깨지고 빈우의 공격이 춤춘다.
침략자를 죽이기 위해 리볼버를 쏘자, 침략자를 죽이려는 자의 호흡관이 뜯겨 나간다.
고향을 지키려고 집게를 벌려보았지만, 고향을 지키려는 자는 그것을 뜯어 주인의 머리에 꽂아 넣었다.
살기 위해 더듬이로 페로몬을 뿜어보아도, 살아남으려는 자는 그저 짓밟을 뿐이다.
전투는 끝났고 우주는 결정을 내려주었다. 이번에도 빈우는 목적을 달성하는 쪽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