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1차로 점프해 온 것은 전열함과 모니터함, 2차로는 리퍼 전투함이 다수였다. 빈우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저 둘은 다른 세력인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연방을 속이기 위해 미끼로 선발대를 따로 보낸 것일까.
-리퍼, 계속해서 점프해 들어옵니다.
디안머 궤도로 들어오는 샤다이 함선은 한두 척이 아니었다. 잘 다듬어진 리퍼 전투함이 무려 47척이나 쳐들어온 것이다. 화력도, 숫자도 압도적인 열세에서 디안머 징수 함대는 분전했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이거 곤란하군. 이래서 내가 서두르라고 했건만.
-뭐 하는 거요. 비홀더 전대도 도우시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가한 이 전대장과 필사적인 무스후리 함대 사령관의 대비는 마치 연극 속의 한 장면 같아 보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만, 저 낙오자의 사생아들은 당연히 죽일 것이오. 다만 내가 주겠다고 한 보상은 당신들과 저 행성에 사는 것들의 생존이외다.
이 섬의 말은 오만하다. 말의 문맥상 낙오자의 사생아란 샤다이를 뜻하는 단어일 것이다. 빈우는 생각해 보았다, 과거의 과학 기술을 잃어버린 샤다이를 낙오자의 사생아라 부른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홀더 전대는 바로 샤다이를 공격하지도, 디안머를 보호하지도 않았다. 디안머 게이트를 오고 간 함선 정보를 거래대상으로 삼아 간을 보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니, 절박한 것은 연방 쪽이었다. 제국 측은 언제나 태연했다.
마침내 비홀더 전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단 한 척. 돌격 순양함 그리폰 단 한 척으로 이뤄진 비홀더 1전대는 지금까지 계속 맞고만 있다가-가렵지도 않다는 듯이 가만히 있다가-드디어 공격을 시작했다.
징수 함대의 필사적인 공격에도 끄떡없던, 솔리드 베타의 공격에도 상처 하나 없던 리퍼 전투함이 그리폰의 공격 한 번에 사라진다.
“저거! 공간 붕괴에요.”
모니카는 화면에 나타난 그리폰의 공격이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공간 붕괴라면 장갑이고 방어막이고 소용없다. 존재 자체가 일그러지는 공격이다. 이어서 반물질 어뢰가 날아가자 빛과 함께 리퍼 전투함들이 소멸한다.
-함장님, 디안머가 위험합니다.
징수 함대의 기함 아프사라스에서 부장을 맡은 인공지능 바바라가 경고한다. 그리폰이 가한 공격은 실로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우주 공간이라면 모를까, 행성 궤도에서 일어나자 디안머에 가해지는 피해는 막심했다. 중력파가 행성 자기장과 대기권 대를 날려버리고, 뒤이어 엄청난 양의 방사선들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행성 지표면으로 쏟아져 내려간다.
-당신은 지구제국의 군인 아니오. 같은 인류를 구해야 하지 않소!
어떻게든 디안머의 인간들을 구하려는 무스후리 소장.
-외계종족과 들러붙은 잡종들이? 입에 담기도 더러운 저것들이 같은 인류라고?
그리고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이 전대장. 회의실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구제국이 연방과 외계종족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리폰의 공격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징수 함대가 휘말리건 말건 전혀 개의치 않고 공격을 퍼부어댔다. 방금 전만 해도 일방적으로 유리하던 리퍼 함대가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다.
-알탄훼아나 호민관은 어디 있나. 알려주는 자에겐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는 죽음을 하사하겠다.
비홀더 1 전대장은 리퍼 함선과 열린 차원 통로로 들어가 학살하고 있었다. 리퍼들과 직접 싸워본 태스크 포스 373대원들은 놈들의 무서움을 잘 안다. 발 가르단 하스에서 아차 하는 순간에 위르겐과 모니카, 파트리샤가 제압당했었다. 만약 그때 놈이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 세 명은 그날 죽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광경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섬은 그 리퍼들을 그냥 잡아 뜯고, 후려갈길 뿐이다. 반 토막 난 놈이 무중력에 떠올라 버둥거려도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상대를 잡아채 으깨고 있었다. 그리고 리퍼들의 공격에 아프사라스의 전투지휘실이 쑥대밭이 되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학살을 계속할 뿐이었다.
‘알탄훼아나라….’
빈우는 그 이름을 잘 안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빈우와 태스크 포스 373에게 사로잡혔던, 오브리가도 특수전 사령부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한, 그리고 발 가르단 하스에서 만났던 그 여성형 샤다이의 이름이다.
이 섬은 디안머 게이트를 오고 간 함선 목록을 원했고, 알탄훼아나를 찾고 있었다. 서서히 교집합이 나온다. 태스크 포스 373과 알탄훼아나. 둘 다 발 가르단 하스에 있었던 자들이다.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를 했었고, 그다음 일은 모르지만 알탄훼아나도 기회를 얻었으니 아마 대화를 했을 것이다.
‘놈은 설마 나와 알탄훼아나를 찾는 건가? 그런데 알탄훼아나는 왜 디안머에 온 것이고, 이 섬은 또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을까?’
빈우가 생각하던 사이 전투는 끝났다. 아프사라스 안의 승조원들은 전원 사망. 이 전대장은 차원 통로 너머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전율하고 있는 팀원들 사이로 사령관 조지 레드우드의 말이 들려온다.
-일단 리퍼는 퇴치되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 함대가 움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샤다이 함선 47척이라고 해도 연방에 비상이 떨어지는 판국에, 리퍼 전투함 47척이라면 전례 없는 대형 사건이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통합사령부에서 42 전단을 재구성하기로 했다.”
“호오.”
그 말에 빈우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감탄사를 터트리는 것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인류에게 있어 42는 보통 수가 아니다.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바로 42다. 그래서 예전부터 인류는, 제국과 연방은 문제가 닥치면 그 해결방안으로 42를 내세웠다.
제국의 마지막 시절. 비홀더 전대에서 최고를 뽑아 만든 42 전단은 외계종족 연합과 맞붙어 승리를 쟁취했었다. 연방의 초창기에도 42 전단을 창설해 혼란에 빠진 인류의 세력권을 지켜냈다. 그리고 연방은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42 전단을 재창설해 문제해결에 나섰다.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를 리퍼의 대규모 준동을 42 전단으로 상대하잔 겁니까?”
파트리샤가 조금 떨떠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42 전단이라면 연방의 히든카드이자 조커이긴 한데, 그녀로선 조금 석연찮은 것 같다. 하긴 이 정도 규모의 리퍼 전투함대가 나타났다면 연방의 내로라할 중앙함대들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중앙 정규함대의 규모는 보통 4~50척 정도. 아까 보였던 리퍼 전투함대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3개 함대는 나서야 한다.
하지만 42 전단은 역사적으로 대개 보급함이나 지원함을 빼고 순수 전투함만으로 구성된 소수정예의 고속기동타격 전단이었다. 그 규모는 20척을 넘지 않는다. 샤다이와의 기술 차를 고려하면 조금 걱정이 된다. 더구나 전투 실력이 뛰어난 리퍼가 나온 지금으로선 더더욱.
-42 전단으로 맞상대를? 아니야. 지금은 묵직한 방패가 아니라 날카로운 창이 필요할 때다. 다만 지금까진 어디에다가 창을 던져야 할지를 몰랐을 뿐이지.
레드우드의 말에 373 팀원들은 42 전단이 무슨 역할을 할지 대충 감을 잡았다. 사령관의 말대로 연방은 최근까지도 샤다이가 어디서 오는지 몰랐다. 그러나 요근래 태스크 포스 373이 수집한 정보들 덕분에, 샤다이가 통일되지 않고 우주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 독립적인 행성 국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젠 달라. 42 전단은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토대로, 샤다이가 있는 행성들을 하나하나 찾아 선제공격을 할 예정이다. 이전부터 샤다이 본성 공격에 관해선 이야기 정도만 오고 갔었지. 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선 뜬구름 잡기였으니까.
레드우드는 살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털리고, 리퍼들이 떼를 지어 모이는 상황이 된 데다가, 결정적으로 너희들이 일을 잘해준 덕분에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이런 요인들을 종합해서 42 전단으로 역공을 가하기로 결정이 났다. 아마도 캐시가 힘을 실어준 모양이다.
캐시라면 캐서린 시슬 대장, 특수전 사령부의 전임 사령관이다. 지난번 샤다이의 공격 때 정신공격을 받고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합동참모본부로 갔는데, 42 전단의 창설에 꽤 노력한 모양이다.
“잠시만요. 우리가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 하나하나 찍어내는 건 좋은데 방어는 어떻게 합니까?”
빈우의 질문은 연방의 공격에 자극받은 샤다이가 발악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다.
-중앙함대에 의한 기동방어다.
예상했던 모범답안이다.
“그러니까 거점을 방어하는 중앙함대를 연방 전 영토로 돌리면서 방어를 하고, 소수정예로 적들의 거점을 하나씩 제거한다는 작전이군요.”
-그래.
“하지만 이 정도 수의 리퍼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위험할 텐데요? 50척에 달하는 리퍼 전투함이면 중앙함대 두셋이 달라붙어도 장담 못 합니다.”
-그래서 함대 사령본부에선 순양함만으로 구성된 기동방어 함대를 따로 편성한다고 했다. 이제 생산에 들어갈 거야.
뒤에서 모니카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와, 미친 듯이 찍어내겠네.’
순양함이라면 자체적으로 점프를 할 수 있는 함선이다. 보통의 점프가 게이트에서 게이트로 하는 것이라면, 순양함은 자체적으로 게이트를 만들어 그걸 타고 게이트 이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순양함이 점프를 하기 위해선 몇 시간은 걸리고 들어가는 동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점프한 이후에 전투가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함대 사령본부에서 운용하기로 맡았으니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빈우의 질문에 레드우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란 그 말에 373 팀원들은 앞으로 나올 ‘우리가 신경 쓸 일’을 기대했다. 팀장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42 전단이 샤댜이의 거점을 타격하는 부대라면 당연히 장갑 보병도 필요하겠지요. 샤다이와의 전투경험이 많은 연방 최고의 팀이.”
팀장 빈우의 말에 태스크 포스 373의 팀원은 한껏 기대했다. 물론 일개 분대에 달하는 팀으론 아무것도 못 한다. 373이 쌓은 경험으로 새로운 정예부대를 꾸릴 게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빈우는 사령관인 레드우드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그는 뭔가 꺼리고 있었다. 우주에서 무서울 게 없는 천하의 조지 레드우드가.
-…그래, 김 팀장의 말이 맞아. 태스크 포스 373은 이 시간부로 해산, 앞으로 구성될 42 전단의 장갑 보병팀에 새로이 편성된다. 아니지, 이제부터 너희들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연방 최고의 샤다이 사냥부대를.
레드우드의 말에 아룹은 씩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파트리샤는 의자 뒤로 기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위르겐은 신이 나서 발을 쿵쿵 굴러대고 우지는 굳게 미소를 짓는다. 모니카마저 각오를 다지는 표정이다.
하지만 빈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화면 속의 레드우드 사령관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부팀장인 아룹이었고, 그 분위기는 순식간에 팀원 전원에게 번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빈우 소령은 지금부터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된다.
레드우드 사령관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새로운 임무라면 42 전단이 아니란 얘기다. 지금까지 태스크 포스 373을 잘 이끌어 왔던 빈우를 여기서 제외한다고 하니 팀원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그의 지휘가 없었다면 373은 이런 전과를 이뤄낼 수 없었다는 것을 팀원 전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빈우가 42 전단에 가지 않는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사령관님. 이런 중요한 얘기를 이렇게 통신으로 한 건 혹시 설마 우리한테 맞아 죽을까 봐 그런 거예요?”
파트리샤가 해맑게 웃으며 이죽거리자 레드우드는 쓰게 웃으며 받았다.
-나도 너희들하고 거하게 치고받았으면 속이라도 시원하겠다.
빈우는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뭔가 레드우드의 뒤에서, 아니 위에서 움직였다는 것을.
“팀장님.”
위르겐이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나는 것을 빈우가 제지한다.
“자, 다들 진정해.”
어수선한 팀원들을 진정시키며 빈우가 말을 꺼냈다.
“42 전단의 장갑 보병 부대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맡게 될 임무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단 것을 잘 알겠지?”
42 전단은 샤다이의 본거지를 찾아가며 공격할 정예 함대다. 빈우가 앞으로 할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에 버금간다고 하니, 팀원들은 억지로나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김 팀장만 잠시 남게. 그 외엔 모두 해산. 돌아가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팀원들은 툴툴대면서도 자리에 일어섰지만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뭐해, 나도 뭘 할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있다가 보자. 부팀장, 애들 좀 챙겨요.”
그 말은 지금부터 레드우드와 빈우가 다른 팀원들은 알아선 안 될 기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란 의미다. 그제야 팀원들은 회의실에서 나갔고 이젠 빈우 혼자만 레드우드와 통신화면을 맞대고 있었다.
직속 상관과의 통신, 그러나 빈우가 있는 곳은 아직은 그가 팀장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블랙 랜스의 회의실이다. 빈우는 왜 레드우드가 이런 일을 직접 만나지 않고 굳이 통신으로 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배려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김 소령, 오랜만이야.
통신 회선에 새로이 등장한 인물은 군사정보국의 이노우에 고토 국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