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내 이럴 줄 알았지.”
예상이 들어맞자 빈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 오브리가도의 사령관실에서 멱살 잡힌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다시 쳐들어오다니. 정말 이노우에 고토다웠다. 그리고 그가 이처럼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건, 저번과 달리 정식 명령을 거쳐 왔다는 의미다. 그것도 특수전 사령부의 레드우드 사령관이나 상원의원인 히토미 의원의 뒷배를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명령을.
“용건이 뭡니까?”
퉁명스레 물어보는 빈우에게 이노우에 국장은 살갑게 말을 붙인다.
-역시 김 소령, 바로 본론이라니.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조사를 좀 해줘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이야. 응? 이 회선….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이노우에 국장이 레드우드의 화면 쪽으로 시선을 흘깃 던진다.
-이 통신 회선, 김 소령이 관리자군요.
아직 정식 명령이 내려오지 않은 이상 김빈우 소령은 태스크 포스 373의 팀장이고, 작전 중에 한해선 특수전 사령부 사령관인 조지 레드우드 중장의 전권 대리인이 된다. 즉 저번 오스카 스테이션 때처럼 이노우에 국장이 연락을 해도 씹을지 말지를 정할 수 있고, 지금도 마음에 안 들면 그를 회선에서 추방할 수도 있다.
-아직 그는 김 ‘팀장’일세.
레드우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저번에 호되게 당하고 쫓겨난 군사정보국장이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굳이 자신이 블랙 랜스에 있는 빈우에게 연락을 넣은 것이다. 늘 하던 대로 자신의 사무실로 그를 부르지 않고서.
이렇게 블랙 랜스에 타고 있는 팀장 빈우에게 레드우드가 연락을 하고, 그 회선에 정보국장을 추가하면 회선의 관리자는 빈우가 되어, 고토가 수작 부리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렇지요. 아직은, 팀장이지요.
이노우에 국장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한 방 먹었다는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꺼냈다.
-김 소령, 자네를 42 전단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심각한 사안을 자네가 맡아줘야 하기 때문이야.
“그거 설마 저번에 저한테 턱 잡혔을 때 말하려던 내용입니까?”
-잘 아는구만.
툭툭 던져지는 빈우의 말을 능글능글 받는 이노우에 국장. 레드우드 사령관은 이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빈우도 그날 이노우에 국장을 내쫓으며 언젠가 그가 다시 오리라 예측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그리고 이렇게 강수를 두면서 올 줄은 몰랐다.
-그럼 내 그날 못다 한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만.
그 말에 빈우는 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노우에 국장이 보여주는 자료는 빈우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서 그때 무리해서 깽판을 친 것인데,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일단 이 자료들부터 보게.
이노우에 국장이 띄운 자료화면을 보던 빈우는 의아한 듯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속으로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엔 조잡한 부엌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중년 여인의 시신이 있었다. 시신은 훼손이 심했지만 빈우는 몇 가지 특징으로 그녀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리 라캉?”
-맞아. 피에르 라캉 중령의 아내인 마리 라캉일세.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피에르 라캉 중령은 빈우에게 자신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지막에 갔던 곳은 개척 행성 마카로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카로니는 빈우와 울토르 중대에 의해 철저하게 쓸려나갔다. 당시 마리 라캉은 두뇌 칩을 빼고 있었으니, 두뇌 칩의 여부로 인간을 판단하는 클론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날 빈우는 라캉 중령에게 그리 좋은 대답을 해주지 못했었다.
빈우는 즉시 관리자의 권한으로 이노우에 국장이 제공한 자료 중에서 숨겨진 부분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경악했다.
“이 날짜는….”
마리 라캉이 사망한 곳은 역시나 개척 행성 마카로니다. 이 점은 놀랍지 않다. 빈우가 놀란 점은 마리 라캉의 사망 추정시간이 울토르 중대가 강하하기 이틀 전이란 부분이었다. 그녀는 울토르 중대가 아닌 다른 자의 손에 이미 죽어있던 것이다.
“자크 라캉은 어디에 있습니까?”
빈우는 자신을 잘 따르던 소년의 행방을 찾아보았지만, 이노우에 국장이 제공한 자료에 자크 라캉의 자료는 없었다.
-마리 라캉은 이 가사도우미 로봇을 아들인 자크 라캉으로 여기고 있었다는군.
이노우에 국장이 지적한 것은 부엌 식탁 위에 잘게 해체된 로봇의 부품이었다. 빈우는 로봇부품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뇌도, 두뇌 칩도 없는 로봇이다.
-정황상 허수아비로 추측돼.
자크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또 마리는 어째서 저 로봇을 아들처럼 여긴 것일까. 부엌 현장을 천천히 살펴보던 빈우는 불편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고문하고 죽인 솜씨, 그 솜씨가 매우 낯익었다.
“군사정보국이 연관되어있는 겁니까?”
빈우의 질문에 이노우에 국장이 손사래를 쳤다.
-넘겨짚지 말게. 그걸 밝혀내는 게 자네의 일이야.
도주한 보안국 요원이 울토르 중대가 쳐들어가기 직전의 개척 행성에서 군사정보국의 솜씨로 살해당했다. 이노우에 국장의 말로는 이 사건을 밝혀내는 게 빈우의 일이라고 한다.
“이런 건 보안국이나 연방 중앙정보부가 나설 일이지, 군사정보국 파견 요원인 제가 맡을 일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만.”
-일의 규모가 꽤나 커져서 말일세. 이것도 좀 보게. 의심스러운 항로가 있어 역추적을 했더니 이런 게 나왔어. 이 역시 동일범으로 추정되네.
이어서 이노우에 국장은 다른 자료들도 보여주었다. 글림에서 죽은 세 사람. 서로 마약을 다투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사이보그를 이토록 손쉽게 농락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은 연방의 강화 병사일 가능성이 크다.
-자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노우에 국장의 말에 빈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런가요? 생각이 좀 많아져서 말입니다.”
그리고 빈우는 다시 영상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정보분석국의 리처드 허드슨과 엘리자베트 허드슨의 사망 사건이다.
‘엘리자베트 허드슨.’
빈우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만나보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아이다. 그런데 빈우는 방금 전의 꿈속에서 엘리자베트를 만났다. 얼굴도, 이름도 똑같다.
‘내가 어떻게 저 아이를 알고 있지?’
빈우는 내색하지 않으며 이노우에 국장이 보내준 자료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생각이 많다라….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화면 너머의 군사정보국장의 눈매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틈이 보이면 바로 파고들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엘리자베트 허드슨에겐 워프 비스트의 징조가 있군요.”
침대에 누워 잠자듯 죽어있는 엘리자베트의 얼굴 한쪽은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화상이나 다른 부상의 흉터가 아니라, 워프 비스트로 변하는 도중의 모습이다.
빈우는 워프 비스트와 직접 싸워본 적이 있다. 인간에서 워프 비스트로 변하는 과정도 그때 보았다.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워프 비스트로 변이되고 있었다고.
-그래, 인간에서 워프 비스트로 변하는 도중에 멈췄어. 샤다이의 공격이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치료가 있었는지는 아직 몰라.
빈우는 이노우에 국장이 왜 굳이 자신을 이런 조사 임무에 집어넣으려는 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세 사건의 범인은 동일범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군사정보국의 요원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또한 살해당한 자 중에는 보안국과 정보분석국의 요원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트 허드슨. 이 아이는 워프 비스트로 변하려다 멈춘 인간이었다.
-이제 알겠나. 왜 이런 살인사건 수사에 굳이 자네를 집어넣으려는 지를.
이노우에 국장이 원하는 인재상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우선 피해자의 신원이 신원인 만큼 수사 인력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울토르 프로젝트와 워프 비스트가 엮인 이상, 수사는 기밀 속에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군사정보국의 방식에 능통한 범인을 추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군사정보국은 주로 외계종족을 대상으로 정보전을 하지 같은 부류를 추적하진 않는다. 이런 것은 주로 보안국의 전문이다. 즉 양쪽의 방식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하다. 덧붙여 혹시 모를 범인과의 물리적 마찰에서 밀리지 않을 육체적 능력, 즉 군사 강화를 한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인물이 없네요.”
빈우의 투덜거림에 이노우에 국장이 짐짓 상처 입은 척을 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내 눈앞에 있지 않나. 이 수사를 맡길만한 최적의 인재가,
저 능글맞은 정보국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수사를 빈우에게 맡길 속셈인 듯싶었다.
-물론 자네를 외부파견 요원으로 내쳤다가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니 모양새는 좋지 않겠지. 하지만 말일세, 이번 일엔 체면 따윈 필요 없다네. 물론 알고 있지. 42 전단의 일도 중요하단 것을. 그러나 김 소령 자네가 수사해 줘야 할 사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네. 울토르 프로젝트와 워프 비스트가 엮인 사건이야.
42 전단이 샤다이에게 반격을 가하는 작전이라면, 이 수사는 연방 내부에서 암약하는 적을 상대로 벌이는 첩보전이다. 원 출신을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이 빈우에게 더 맞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한다.’
빈우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노우에 국장이 빠져나갈 틈이 없도록 판을 짜서 왔겠지만, 그로선 빠져나갈 구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에서 이길 수 없으면 그 판을 엎도록 가르친 게 이노우에 고토였고, 또한 빈우는 그런 방법을 아주 잘 배웠다.
여기서 정보국의 명령을 받아들이면 빈우는 다시 군사정보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머릿속의 트리니티 프로그램이 풀릴 때까지 굴려질 것이고, 프로그램이 해제되고 나면 높은 확률로 그 기록이 지워질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정확히는 거절하기 위해 빈우가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한다면, 그 후폭풍이 만만찮을 것이다. 레드우드 사령관이 그간의 정으로 뒤를 봐주려 하겠지만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빈우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바로 그때, 빈우에게 영 엉뚱한 인물로부터의 연락이 왔다. 그 인물은 지금 빈우가 하고 있는 통신에 끼어들려 하고 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엉뚱한 인물은 아니다. 앞으로의 일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빈우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 요청을 받아들여 관리자 권한으로 회의에 참여시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준비를 할 게 조금 있어서 말이지요.
통신 회선에 들어온 것은 오다 히토미 상원의원이었다. 지금 그녀는 사람 좋고 겁 많은 히토미가 아니었다. 연방의 상원의원인 오다 의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다 의원님.
이노우에 국장이 평소처럼 능글능글 웃지 않고, 굳은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는 것은 지금 그가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의미다.
-아닛! 이것은 실제 오다 의원님 아니십니까. 회의에 열중한다고 오시는 것을 몰랐읍니다.
레드우드 사령관이 저렇게 과장되게 굽신거리고 있다는 건, 오다 의원의 출현에 그가 꽤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고 했던가. 못된 부하로부터 못된 짓을 배운 노병의 연기에 빈우는 작게 킬킬거리며 스스로의 미련함을 탓했다. 자신에게 회선의 관리자 권한을 주고 ‘이런 회의’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긴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실례지만 의원님. 지금은 기밀 작전에 대한 회의 중입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지금 이노우에 국장은 히토미에게 부드럽게 축객령을 권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회선 관리자였다면 오다 의원은 통신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노우에 고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원의원의 참가를 거절했을 게 뻔하다. 군사정보국은 보안국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오다 의원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녀의 먹이를 뺏어와야 하는 입장에선 껄끄러운 것이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나직하게 으르릉거리는 오다 의원의 모습은 아버지인 이케가미 소이치로를 쏙 빼닮아 있었다. 언젠가 이케가미 소이치로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빈우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보안국을 구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길래 나한테 총구 들이민 그년을 놔줬더니, 그 은혜를 이딴 식으로 보답해?
오다 의원은 태스크 포스 373의 감사에 앞선 조사역으로 왔다. 실제 목적은 연방 사회에 침투한 비밀 세력의 색출이고, 이를 위해 감사 대상인 태스크 포스 373과 손을 잡은 상황이지만 대외적으론 저렇게 되어있다.
그런데 감사 대상인 태스크 포스 373을 해산시키고, 그 팀장은 다시 군사정보국 소속으로 돌려보낸다? 상원의원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빡쳐서 자리를 뒤집어엎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할 상황이다.
그리고 빈우는 지금 참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