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일단은 캐시로부터 먼저 귀띔이 왔다. 42 전단이 창설되는데 군사정보국의 입김이 닿아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연락을 받자마자 오다 의원께 알렸지.
“저보다도 오다 의원님께 먼저요?”
빈우는 레드우드의 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드우드는 자신의 부하보다, 부하를 조사하는 오다 의원에게 먼저 알린 것이다. 힐난 섞인 빈우의 질문에 레드우드는 쌍심지로 대답했다.
-…나도 되도록 평화적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말이다. 네놈, 이번 일에는 오다 의원님을 부르지 않으려고 했으렷다? 확 엎어버리려고 말이다.
“뭐, 그야. 이노우에 국장이 하는 걸 봐서요.”
-개 쌍노무 새끼가.
하긴 레드우드의 말마따나 방금의 통신에서 오다 의원이 오지 않았더라면, 빈우는 오다 의원에게 달리 알리지 않고 군사정보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거하게 깽판을 쳤을 것이다.
-그건 됐고. 의원님도 자기 쪽 라인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더라고. 그러더니 나보고 잠시 시간을 벌어달라고 하시더라. 그사이 명령서를 받아오신 모양이야. 아마 그쪽 파벌의 의사가 그런 듯한데. 뭐 그 덕에 일단 일이 잘 해결되었지만 말이다.
오다 의원의 파벌은 연방 내의 비밀 세력을 노리고는 있지만, 아직은 대상을 확정하지 못해서 일단은 태스크 포스 373을 방해하는 쪽을 조사하는 중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엇갈리는 명령서가 나온 모양이다.
“일단이고 이단이고 우리 위쪽으로는 삼단분리 개판 난 거 같습니다만.”
빈우의 비아냥에 레드우드도 표정이 썩는다.
상위 부서끼리 손발이 안 맞으면 하위 부서가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리다. 그리고 여기는 군대라 몸이 아니라 모가지로 때워야 한다.
-어쨌든 태스크 포스 373이 존속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놈들의 목적이 좌초되었으니까.
“본격적으로 파벌싸움이 일어나는 겁니까? 42 전단을 샤다이 앞마당에 꼬라박기도 전에.”
-그건 아닐 거다. 캐시의 말로는 합참 내부에선 별다른 이견이 없다는군. 42 전단의 재창설에는 아주 호의적이었다더라.
샤다이의 기술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태스크 포스 373에는 방해를 놓고, 샤다이에게 전면공세를 하는 42 전단에는 아무런 터치도 없다니 이상하다.
-42 전단은 통합작전사령부에서 직접 진행하는 거니까, 엇나갔다간 박살 나지. 그래서 숨죽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아주 숙인 건 아니니까 조심해라.
“네, 뒤통수야 언제나 조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레드우드와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빈우는 약속대로-라기보다는 명령받은 대로-오다 의원의 방으로 갔다. 그녀의 방문 앞에서 인터폰으로 도착을 알리자 히토미는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의원님?”
그러나 방안에 히토미는 없었다.
“곧 나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의외로 그녀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자신은 씻고 있다니 이건 무슨 매너냐고 물을 상황이지만, 지금 빈우는 그럴 입장이 아니라 얌전히 기다릴 뿐이다.
잠시 후 히토미는 목욕 가운을 걸친 채 거실로 나왔다. 현재 연방의 평균에서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는 그녀의 가슴은 지금 풍성한 가운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고, 히토미 본인도 꽤 키가 큰 편이라 비율상 그다지 두드러지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빈우에겐 딱히 눈에 차는 사이즈도 아니기도 했고.
“오셨군요, 김 팀장. 이런 모습으로 실례 좀 할게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실례라고 한들, 오다 히토미는 조사차 나온 상원의원이고 빈우는 일개 소령이다. 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맥주?”
그녀는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빈우에게 권한다.
“감사합니다.”
취하지 않는 몸이지만 빈우는 보리 발효음료를 감사히 받았다. 히토미를 따라 맥주를 마신 빈우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우왁, 이거 도수 의원님이 조정하신 겁니까?”
맥주를 즐기지 않는 빈우지만 알콜 도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안다. 오다 의원은 생성기로 맥주를 만들 때부터 꽤 도수를 높여놓은 것 같다.
“네, 지금은 조금 취하고 싶어서요.”
히토미의 잔은 어느새 반이나 사라진 상태고, 얼굴도 꽤 붉어져 있다. 샤워의 여파인지 맥주의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뭔가 일지도.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상원의원 오다 히토미의 것이다.
“제가 이런 모습으로 김 팀장을 맞이했는데 전혀 동요가 없네요.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엄청난 가슴을 자랑하는 묘령의 여인이 샤워 후에 가운만 입고 술을 마시자는데도, 혈기 왕성한 남자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잘 안다.
“선친의 버릇 말씀입니까?”
“네, 아버진 더러운 일을 하고 오면 일단 샤워부터 하셨죠. 딸한테 나쁜 게 옮는다고 말이에요.”
빈우의 기록에도 있다.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한차례 회의를 치르고 나면 마치 목욕재계라도 할 셈인지 바로 씻으러 갔다. 그리고 가운을 걸친 채 자작하며 빈우에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연방의 미래와 프로젝트들에 관해서. 그러나 딸의 이야기는 없었다.
“아시는 것을 보니 전 상원의장… 과는 꽤 각별한 사이었나 봐요?”
굳이 아버지를 전 상원의장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의장님께선 언제나 주변 사람을 각별히 대하셨습니다.”
“…가족은 빼고 말이죠.”
뾰로통해서 맥주를 들이켜는 히토미에게 빈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정도면 취할 테지만 알콜 분해효소를 주입하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히토미는 마신 맥주만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인데… 닮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히토미는 잔 안에 남은 맥주를 빙글빙글 돌리며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선 시선을 빈우 쪽으로 돌렸다.
“저와 제 아버지의 사이가 어떤지는 알고 계시죠?”
“아뇨.”
“…네?”
잠시 그녀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제가 이케가미 전 상원의장님과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긴 했지만, 그건 일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사적인 얘기는 거의 안 하던 분이셨고요. 게다가 지금의 저는 감사대상이라 감사역을 맡은 의원님의 정보에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하, 그랬군요.”
약간 민망한지 히토미가 계면쩍게 웃는다.
“뭐어, 의원님의 행동을 보아 대강 짐작은 하지만 말입니다.”
빈우의 대답에 살짝 올려다보는 히토미의 시선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없이 자라고, 아버지는 연방의 상원의원이라 바쁘죠. 게다가 나중에는 상원의장까지 되셨으니, 더욱 바빠지셨을 겁니다. 행복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의원님껜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맞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양반은 얼굴도 안 내비쳤죠. 의장이 된 다음부터는 경호를 이유로 저를 안전저택에 가둬놓았고요. 제 곁에는 경호원과 안드로이드뿐이었어요. 그 영향 때문인지 저는 일찍 집을 나갔고, 성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죠.”
그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언짢아지는지 히토미는 잔을 콸콸 채웠다.
“선친께서 반대는 안 하시던가요? 상원의장쯤 되시면 사위에 대해서도 꽤 신경을 쓰실 건데 말입니다.”
“당시 아버지의 머릿속엔 울토르 프로젝트밖에 없었으니까요. 연락도 안 했고요.”
“서둘러 결혼하셨다면 상대는 어떻게 고르셨습니까?”
빈우의 질문에 히토미는 가슴 앞섶을 가볍게 팔랑거렸다.
“이거면 그냥 넘어가던데요?”
“…그것만 보고 넘어갔으면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닐 텐데요.”
빈우의 때늦은 충고에 히토미는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헤어진 것은 서로를 배려해서였죠. 각자의 미래를 위해서.”
말을 멈추고 추억을 되새기는 히토미의 눈가에 맴도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은 먼저 떠나더군요. 야속하게도.”
“가슴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지요.”
냉큼 따라붙는 빈우의 아첨에 하마터면 히토미는 웃으며 맥주를 뿜을 뻔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맥주를 간신히 삼킨 히토미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콜록, 더구나 제가 상원의원이 되려고 한 것도 조금 불손하달까요.”
“우리 아버지 모가지는 내가 자른다?”
“정답.”
씩 웃으며 맥주잔으로 빈우를 삿대질하던 히토미가 사레들린 목을 다스리려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잔을 탁 내려놓은 그녀의 눈은 서서히 변해갔다. 다시 사냥꾼의 눈으로.
“이쯤하고. 제가 김 팀장을 따로 부른 건, 그리고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건 뭐랄까. 김 팀장님과 좀 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특별하지 않습니까?”
빈우의 말에 히토미가 다시 웃었다. 조사원과 조사대상의 오월동주는 꽤 특별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싫어했던 아버지와 닮았다고 했다. 빈우가 봐도 확실히 닮았다. 특히 눈매가.
지금 히토미는 샤워를 하고, 가운을 걸치고, 술을 마셔 얼굴이 불콰해져 있지만, 게다가 빈우의 농담에 웃고 있지만, 눈만큼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이케가미 소이치로처럼.
“왜 그 사건을 받아들였죠?”
히토미가 지금 그 사건이라고 한 것은 군사정보국의 의뢰다.
“그야 요청이 왔지 않습니까? 제 팀도 해체된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죠.”
히토미가 빈우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거짓말.”
낮지만 박력 있는 목소리다. 히토미는 어깨를 으쓱하는 빈우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중력에 의해 흐트러진 가운 앞섶을 여미며 바로 앉았다.
“제가 아는 김 팀장은 남이 시키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맘에 안 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깃장을 놓고 말지. 안 그래요?”
히토미는 빈우와 만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지만 아주 밀도 깊은 시간을 보냈던 터라, 2추가 닉스 레벨 3의 썅놈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솔직해서 좋군요. 기뻐요. 자아, 그럼 더 솔직해지세요.”
히토미는 빈우의 잔에 맥주를 가득 첨잔해주었다. 그리고 첨언한다.
“왜 이노우에 국장이 직접 왔죠? 그는 당신이 이 일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온 걸 테죠?”
절로 입안이 말라가는 기분에 빈우는 맥주를 꿀꺽 마셨다.
“의원님 추측대로입니다. 이노우에 국장은 아주 잘 알고 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리란 것을 말이죠.”
“그가 김 팀장의 약점을 잡고 있나요?”
그렇게 묻는 히토미의 눈은 빈우를 협력자이자 동시에 조사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자신의 가정사를 밝혔으니, 빈우도 밝혀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제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것은 알고 계시죠?”
“네, 자료에서 봤어요.”
“어머닌 맥주 공장을 만드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저런.”
잠시 일상의 눈으로 돌아온 그녀는 맥주를 권한 자신을 탓하려고 잔을 내려놓지만 빈우가 만류했다.
“아뇨. 어릴 적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납니다. 괜찮아요.”
잊을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기억을 억누르며, 이번엔 빈우가 히토미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오늘은 이걸로 참으시고, 다음번엔 제 농장 보리로 만든 진짜 맥주를 맛보여드리죠.”
“어머나아, 그거 기대되는데요.”
맥주 한잔으로 분위기를 환기 시킨 빈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안 계셨으니 그때부터 아나스타샤가 우리 남매의 후견인이 되어서 고생해가며 키웠습니다. 아실 테지만 안드로이드의 권한은 그다지 높지가 않아서 농장경영에 꽤나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야 꽤 풍족하게 자랐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그걸 기억해내고 요즘도 미안해하지요.”
“하긴, 아나스타샤는 쿠델카 모델이죠. 괴로웠을 거예요.”
“그리고 저와 제 형제자매들도 물질적으론 모자람이 없었지만, 정신적으론….”
“네, 그렇죠. 저도 그 마음 알아요.”
히토미도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연방을 위해 일한다고 가정을 소홀히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빈우의 유년기를 짐작하고, 동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군에 들어간 것도 가족을 위해서고요.”
빈우는 잔을 마저 비우고 내려놓았다. 히토미는 그녀의 빈 잔을 채워주려 하다가 문득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잠시 멈췄다. 그의 눈에 가득 찬 것은 공허였다.
“이노우에 국장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엄마와 아들의 죽음을, 아빠와 딸의 죽음을 결코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을요.”
이 역시 히토미는 이해했다. 그녀 자신도 물질적으론 풍부했으나 정신적으론 빈곤했던 유년기를 보냈던 터라, 다른 가족의 위기를 보면 가만있지 못했다. 상원의원이란 신분이 오다 히토미란 이름의 의원에게 냉정한 균형을 강요하지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김 팀장의 옛일을 끄집어내려 한 것은 아니었어요.”
“별말씀을. 우린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요?”
빈우의 말에 히토미가 쓰게 웃으며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고, 둘은 작게 건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