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오다 히토미는 눈앞의 수프가 정말 고마웠다. 붉은색 국물에 잘게 다져진 야채와 고기가 넉넉하게 들어있어서 박살 난 그녀의 속을 잘 달래주었다.
“의원님, 보르시는 입에 맞으시나요?”
“응, 고마워. 이제 좀 살 것 같아.”
지금 태스크 포스 373 전원과 히토미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만취한 히토미는 다음날 점심까지 꼬박 잤고, 속을 부여잡은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한 것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나스타샤였다.
일어나보니 옆에 아나스타샤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목욕 가운만 입고 있단 걸 깨달은 히토미는 불안한 마음에 안드로이드 메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혹시 자기가 또 저질렀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나스타샤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작게 가로저어 주었다.
히토미는 그녀의 배려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를 표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요리를 잘하는구나.”
“어머, 아니에요. 이 보르시는 쿠델카 모델들의 기본 레시피인걸요.”
“겸손하긴. 나도 쿠델카들의 요릴 먹어봤어. 하지만 이건 아나스타샤의 개인 요리라고 불러도 될 만큼 손질을 많이 했는데?”
태스크 포스 373은 소규모 팀이기 때문에 팀장인 빈우부터 일반 팀원인 위르겐까지 같은 식당을 쓴다. 함장인 오르는 식사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식당에서 맛을 즐기는 정도는 했다.
그런 식당에 지금은 히토미와 아나스타샤 둘뿐이다. 다른 팀원들은 전부 회의를 하는 중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나 봐?”
그러면서 히토미는 옆에 있던 피로시키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두툼하게 구운 만두피 속에 든 촉촉한 고기소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네, 아무래도 태스크 포스 373의 앞날에 관한 거니까요.”
빈우가 팀원들과 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어제 새벽에 히토미와 나누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나 혼자 먹어도 될까?”
씹던 것을 꿀꺽 삼킨 히토미가 조심스레 물어본다.
“별걱정을 다하세요. 지금 이 배에서 의원님께 뭐랄 사람이 누가 있다고요. 그리고 이 팀의 식당은 자율이용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보르시 더 드릴까요?”
“응, 이번엔 마요네즈 듬뿍 넣어서.”
“네에, 여기요.”
히토미가 두 번째 보르시를 반쯤 먹었을 무렵, 빈우와 팀원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빈우를 뺀 팀원들은 들어오자마자 전부 우르르 달려와 히토미를 에워쌌다. 졸지에 험악한 인간 흉기들에게 둘러싸인 히토미는 겁에 질려 눈이 동그래졌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영문 모를 감사 인사였다.
“하마터면 공중분해 될 뻔한 저희 팀을 지켜주셨다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팀장인 아룹이 사람 좋은 미소로 감사를 표한다.
“아하하, 그거 말이죠.”
히토미는 빈우와 이야기하던 중에 도수 높은 술을 마구 마시다가 뻗어버렸다. 그녀가 자고 있는 사이 빈우가 좋게 이야기를 해놓은 것 같았다.
“감사로 오셨으면서도 저흴 도와주시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처음엔 가슴만 더럽게 큰 재수 없는 꼰대인 줄 알았는데 다시 봤어요.”
“잠깐, 방금 누구죠? 누가 말한 거예요?”
밥 먹던 히토미 주변에서 팀원들이 떠들어대니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그런 팀원들을 재끼고 빈우가 다가왔다.
“의원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아, 네. 어젠 실례했어요.”
히토미는 어제 대화 중 마지막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얼버무렸다.
“그리고 어제의 일을 바탕으로 팀 회의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모두 원만히 해결되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팀의 존속은 그렇다 치고, 팀의 목표가 샤다이 기술 회수에서 암살자 추적으로 바뀌었는데 군말 없이 따라간다고 하니, 빈우에 대한 팀원들의 신뢰가 상당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신뢰가 집중된 김빈우 팀장은 상당히 의심을 살만한 눈초리로 히토미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불안하게시리.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흠흠, 의원님께서 주무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아,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응?”
빈우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팀원들이 전부 자리를 비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히토미 주변에 졸졸 붙어서 감사 인사를 하다가 팀장의 말에 잽싸게 사라져 버리니 불안하다. 여기에서 히토미는 빈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대강 눈치챘다.
“잠깐만요. 설마 지금 이 배, 블랙 랜스가 출항한 건가요?”
“네. 의원님 말씀대로입니다.”
빈우는 그녀의 불안을 상큼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아마도 목적지는 마카로니겠지요.”
“그것도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42 전단에 합류하기 전에 한 번 가봐야지요.”
“하아아.”
히토미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 배 블랙 랜스는 태스크 포스 373의 모함이고, 팀의 작전에 따라 움직인다. 히토미는 상원 의원에 조사역이라 작전에 대한 권한은 일절 없다. 게다가 이 배에 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히토미 자신이니 뭐라 할 건수 또한 없다. 그리고 빈우의 말대로 서둘러야 할 이유도 있었다.
‘또 나는 술에 취해 잠만 잤으니까.’
하지만 벌써 이번이 두 번째다. 저번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오열하고 있었는데 냅다 출동해버렸고, 지금은 잠자고 있는데 출동을 해버린 것이다.
반쯤 체념한 히토미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메이드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 네 주인 원래 이러시니?”
“네, 원래 이래요. 피로시키 더 드릴까요?”
슬픈 미소를 띤 아나스타샤가 따뜻한 피로시키를 접시에 올려주었다.
* * *
태스크 포스 373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 행성 마카로니 4에 도착했다. 궤도 상에 선 블랙 랜스에서 위르겐은 마카로니의 지표를 훑어보았다. 어느 정도 개척된 땅과 짓다 만 도시들이 보인다. 파괴된 도시들이다.
그걸 보는 위르겐의 마음은 무거웠다. 방금 알게 된 진실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클론에 의한 학살이라….’
아침의 회의는 단순히 팀의 향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빈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부팀장인 아룹과 파트리샤에게만 알려주었던 그 비밀을 팀원 전원에게 공개했다. 울토르 프로젝트와 워프 비스트, 그리고 마카로니와 발 가르단 하스에서 있었던 일까지.
역시나 후폭풍은 컸다.
위르겐이 속했던 뱅가드 연대는 특수전 사령부 소속이라고 하지만 단검뿔 토끼나 실리콘 나이트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저 둘이 특수 기밀 임무 부대인 반면 뱅가드는 신속 타격부대에 해당한다. 맡는 임무는 거의 정규전이고, 가끔씩 대민봉사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일에는 영 젬병이었다.
우지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척 행성의 민간인이었다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모니카가 의연하게 받아들인 편이다. 비록 그녀가 마음이 연약하다고 하지만-어디까지나 주변 인물 중에서지만-엄연히 정보 사령본부 소속의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군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해왔던 터라 약간 놀랐을 뿐, 즉시 받아들였다.
함장인 오르 소령이야 이미 한쪽 발을 어두운 쪽에 놓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후회되냐, 위르겐?”
“오셨습니까, 팀장님.”
어느새 빈우가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택한 길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아까의 회의에서 빈우는 분명히 말했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태스크 포스 373을 나와 42 전단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연방의 어두운 면을 보고 나서 함께 가시밭길을 갈 것인지. 다만 한번 알게 되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고 누차 경고까지 했었다.
“원래대로라면 너와 우지, 모니카는 빼려고 했었다.”
위르겐은 뱅가드를 제대한 뒤 대학으로 돌아가 인공지능 개발자가 될 계획이었다. 그리고 모니카는 임무와 크게 상관이 없는 연구직, 우지는 철없는 햇병아리. 빈우가 앞으로 맡아야 할 더러운 일과는 인연이 없는 게 좋았다. 그래서 그들에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표적이 태스크 포스 373 자체로 옮겨오자 빈우는 생각을 바꾸었다. 팀원들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도 행여 놈들의 마수가 다가오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편을 확실히 해야 한다. 중간이 아니라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적어도 오다 의원 쪽이 속한 파벌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뭐, 그야 조금 충격받았습니다만.”
자신이 믿었던 연방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된 위르겐은 착잡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자 영 거북했다.
“어떻게 할래? 아직 늦진 않았다.”
“아닙니다. 저는 팀장님과 함께하겠습니다.”
부하의 우렁찬 대답에 빈우는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좋다. 이번엔 네가 나하고 같이 간다. 따라와.”
“네?”
“이 새끼 뱅가드 맞나? 마카로니로 강하한다고.”
위르겐 도른베르거는 자신이 따르겠다고 한 상관의 성격을 잠시 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대답한 지 일 분도 채 안 되어 빈우와 함께 마카로니로 내려가게 됐다.
“맨몸으로 셔틀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은 묘하네요.”
뱅가드 소속인 그가 행성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강하 포드 타고 처박거나, 셔틀을 타고 처박거나, 군함 타고 처박거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처박는 건 매한가지였고 그럴 땐 언제나 장갑복을 입었다. 이번처럼 간편한 복장에 관광을 하듯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슬픈 새끼. 사회로 돌아가면 고생 좀 하겠다.”
두 인간 흉기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사이 셔틀은 마카로니의 지면에 도착했다. 셔틀이 도착한 곳은 마리 라캉의 집 근처였다. 그렇게 빈우는 마카로니로 다시 돌아왔다.
-주변은 깨끗합니다. 개척화도 그대로라 그냥 호흡해도 되고요.
먼저 내려온 파트리샤가 위장을 한 채 정찰 보고를 했다. 셔틀을 나온 위르겐과 빈우는 일반 전투복에 기본무장, 그리고 조사용 장비만 갖추고 있었다.
“깨끗한데요?”
위르겐의 말대로 마카로니는 깨끗했다. 학살의 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청소했으니까.”
빈우는 천천히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파괴되고 불탄 흔적은 있지만, 시신들은 다 수거했다. 황량한 마카로니 시내를 두 사내가 걸었다.
독립을 원했던 마카로니의 배후에는 개척 행성의 연합체인 녹색연맹이 있었다. 이들은 연방의 시민들을 퇴거시키고 무단으로 마카로니를 점거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국세청과 영토관리부에선 법무팀을 출동시켰고, 이들은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우악스레 쥐어짰다. 그리고 마치 실리카겔을 짜내어 폭포를 만들 듯 돈을 뜯어 갔다. 그럼에도 마카로니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던 중에 연방 중앙정보국은 마카로니에 샤다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강력한 해결책을 원했다. 그래서 연방 국세청과 영토관리부에 진압함대를 만들자고 바람을 넣었다. 이에 함대 사령본부에선 징수 함대 마냥 압박을 줄 요량으로 진압함대를 꾸려 보냈다. 물론 샤다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충분한 대비를 하고.
연방 중앙정보국의 다음 행보는 군사정보국에 울토르 부대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난전 중에 인간은 죽이지 않고 외계인만 죽일 히든카드. 그래서 포말하우트 게이트 안에서 리퍼에게 습격당한 다음 우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울토르 중대가 마카로니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물론 머릿속은 넝마가 된 채로.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카로니 사건이 터졌다.
진압함대는 할 일을 제대로 했다. 울토르 클론들이 대형 사고를 쳐서 그렇지. 인간을 빼고 샤다이만 죽여야 할 클론들이 보이는 것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그 결과, 진상을 모르는 군사정보국과 주변 부서들만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클론들이 인간들을 죽였다는 대형 사고는 의외로 쉽게 덮였다. 일단 마카로니에 죽은 사람 중에 연방의 시민이 없었다. 목숨을 잃은 것은 철저하게 샤다이와 개척민들뿐이었다. 그래서 윗선에선 마카로니의 개척민들이 샤다이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울토르 중대가 강하하기 전 마리 라캉이 여기서 죽었다.’
길을 걷던 빈우는 고개를 들어 개척민용 7층 주택을 보았다. 마리 라캉은 5층에서 살았다고 했다. 지금 빈우는 그곳으로 가는 중이다. 그녀를 죽인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허, 팀장님 저것 보십쇼. 고래기름 마가린이랍니다.”
부하의 말에 빈우의 고개가 급히 그리로 향한다. 위르겐이 가리킨 곳은 식료품 가게였다. 가게 창문의 전단지에는 새로 입고된 상품들이 선전 삼아 적혀있었다.
“옥수수로 만든 설탕, 치커리 뿌리를 볶아 만든 커피, 무로 만든 빵? 무로 빵도 만든답니까?”
헛웃음을 짓는 위르겐과 달리 빈우의 표정은 굳어만 갔다. 그리고 식료품 가게로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