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팀장님?”
갑자기 빈우가 가게로 걸어가자 위르겐이 의아해한다. 그러나 이내 팀장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상사가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쓰러진 매대 근처에는 상품 파편들이 있었다. 커피와 설탕, 빵과 버터 등의 식료품들이 썩어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진짜는 없다. 전부 척박한 개척 행성의 대용 식품 들이다.
-어? 빈우 아저씨?
-너 혹시 자크니? 많이 컸구나.
-어머, 빈우 씨.
-오랜만입니다. 라캉 부인.
이 가게를 보자 예전에 꾸었던 악몽의 기억이 떠오른다. 꿈속에서 나왔던 대화도 떠오른다. 그러나 그때의 악몽에는 기억과 기록이 혼재되어 있었다. 빈우가 자크 라캉, 마리 라캉과 했던 대화는 우연히 화성에서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다. 기록에도 분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악몽 속에선 장소가 마카로니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빈우는 마카로니에서의 충격 때문에 그런 개꿈을 꾸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똑같다.’
하지만 악몽 속의 가게가 지금 빈우의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다. 구조와 가구 등도 꿈속에서 보았던 그대로다. 물건 종류와 그림, 상호까지 똑같다.
‘하지만 난 여기에 온 적이 없어.’
작년 12월 27일의 빈우는 클론으로 위장한 상태였고, 이곳 마카로니에서 샤다이와 싸운 다음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 장소에는 온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건 데자뷔 같은 게 아니다. 다만 부서진 바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마리 라캉이 들렸었지.’
문득 정신을 차린 빈우는 군사정보국에서 받았던 데이터를 이곳에 겹쳐보았다. 그러자 증거가 보인다.
“위르겐, 이걸 봐라.”
“구두 자국입니까?”
빈우가 발견한 것은 희미한 구두 자국이다. 강화된 군인의 시각과 조사용 스캐너 덕분에, 그리고 이곳이 잘 보존된 덕분에 빈우는 마리 라캉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마리 라캉의 족적이다. 따라가자.”
두 사람은 가게를 나서 발자국을 따라갔다.
* * *
“여기서 만났군.”
마리 라캉이 누군가와 만난 곳에서 빈우와 위르겐은 멈췄다.
“가사 도우미 로봇인 것 같습니다.”
위르겐의 말마따나 마리 라캉의 앞에는 바퀴 자국이 있었다. 발자국과 바퀴 자국을 살피던 빈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타미룩스 사의 보급형 가사 도우미 로봇이다. 감정 모듈 같은 게 없는 모델인데, 마치 즐거워서 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군.”
마리의 발자국 앞에서 왔다 갔다 한 바퀴 자국은 마치 애완용 로봇의 같이 보였다.
“추가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것을 밝히러 우리가 온 거다.”
빈우와 위르겐은 발자국과 바퀴 자국을 따라 마리의 집까지 도착했다. 여기서 빈우는 다시 멈춰 서서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팀장님, 로봇의 바퀴 자국이 갑자기 계단에서 끊깁니다.”
“아마 마리 라캉이 안고 올라갔을 거다. 그리고 이 로봇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계단을 내려왔어.”
계단에서 빈우는 로봇이 내려오도록 도운 그 ‘누군가’의 발자국을 찾았다. 이 자는 아래에서 걸어 올라가 로봇을 안고 내려왔다. 빈우와 함께 증거를 수집하던 위르겐이 그것을 어깨너머로 보며 중얼거렸다.
“로봇이 주인을 마중하러 가려는데 엘리베이터는 고장. 그래서 계단으로 내려가기 위해 지나가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 것, 입니까?”
“잘했다, 위르겐. 그런데 한 가지 더 있다.”
빈우는 로봇을 안고 내려온 자의 발자국을 보여주었다. 발 사이즈는 빈우나 위르겐과 비슷하다. 문제는 걷는 방식이었다.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쏠려있어. 특히 발가락 쪽으로.”
그 말에 위르겐은 인상을 굳혔다.
“설마 장갑 보병이란 말씀입니까?”
장갑 보병들은 장갑복을 입었을 때 기동성과 탄력을 살리기 위해, 무게 중심을 앞으로 놓고 발끝으로 스치듯이 걷는다. 여차하면 바로 가속해서 날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걷는 버릇을 가진 자가 연방의 장갑 보병 외에 누가 있겠냐. 그리고 잘 봐라. 이 자는 이 건물을 두 번이나 올라갔다.”
“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빈우는 자신이 찾아낸 증거를 위르겐에게 보냈다.
“첫 번째는 로봇을 내려주기 위해 한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헤어진 다음엔 저 모퉁이 뒤로 가서 숨었다. 위르겐, 스캐너를 따라가 봐라.”
위르겐은 스캐너가 찾아주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 높여 외쳤다.
“맞습니다, 팀장님. 로봇과 헤어진 다음 여기에 숨어있던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그 건물 쪽으로 따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쓰레기통이 있는데 뒤집니까?”
“그러니까 널 거기 보낸 거다.”
위르겐은 툴툴거리며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었다. 지금 그의 시각은 빈우와 공유되어 있어서 위르겐이 보는 것은 빈우도 볼 수 있다.
“팀장님, 이거 빈 겁니다.”
그 말에 빈우는 군사정보국이 조사한 데이터를 열람해 보았다. 군사정보국 역시 발자국을 따라 조사하면서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모조리 수거해 간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나중에 찾아보면 된다.
“좋아. 날 따라와라.”
빈우와 위르겐은 다시 계단 앞에 섰다.
“이게 두 번째 발자국이다. 스캐너를 잘 보고 첫 번째 발자국과 비교를 해봐.”
두 사람은 발자국들을 스캔하며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4층쯤 갔을 때, 내려오는 발자국을 스캔한 스캐너가 새로운 정보를 띄웠다.
“혈흔, 이군요.”
“마리 라캉의 피다.”
즉 이 자는 로봇을 안고 내려온 뒤 건물 모퉁이에 숨었고, 로봇과 마리가 돌아오자 따라 올라가 마리를 죽인 것이다. 발자국을 따라 마리의 집 앞까지 간 빈우는 발자국 주변을 몇 번이고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팀장님?”
“이상해. 이 자, 범인은 여기서 망설였어. 죽이려고 사전준비는 다 한 것 같은데 바로 실행하지 않았다. 뭔가의 이유로 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인 것처럼 보여.”
“아니 발자국만으로도 그런 게 보입니까?”
“교육과 경험 덕이지. 보다 보면 보이는 거다.”
빈우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흔적을 보면 마리와 로봇이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바로 이어 침입자도 따라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로봇이 나온다.
“로봇의 움직임이 뭐랄까, 갈팡질팡합니다?”
빈우의 말대로 보다 보면 보이는지, 팀장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조사하는 위르겐의 눈에도 도우미 로봇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 원래 가사 도우미 로봇은 손님이 오면 인사하거나, 침입자가 오면 경고를 한다. 그런데 이 바퀴 자국은 어느 것도 아냐. 침입자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흠, 일반적인 행동 알고리즘은 아닌데, 커스텀 제품인가? 그렇다면 바퀴는 또 왜 순정 그대로 놔둔 거지?”
“어라? 잠시만요. 발자국대로라면 이 침입자는, 그러니까 범인은 아까 로봇을 안고 내려간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왜 로봇이 못 알아본 겁니까? 혹시 다른 사람일까요? 거기서 바꿔치기했다거나.”
“아니, 군사정보국이 수집한 쓰레기통의 자료를 보면 간단한 변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로봇이 못 알아봤겠지.”
먼저 로봇을 안고 내려오고, 그다음 모퉁이에서 잠복하다가 변장을 한 다음, 다시 마리와 로봇을 따라 집까지 따라 올라갔다는 얘기다. 좀 이상하다.
“범인은 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요?”
“글쎄다, 왜일까? 변장을 했다면 자신을 숨기기 위한 것도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있지. 후자라면 변장이 아니라 분장이 되겠지만. 아니면 처음에는 변장을 하고 만났다가 나중에 푼 건가? 아무튼 이상해.”
화장실에서 나와 로봇의 바퀴 자국은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앞에 선 침입자의 발자국 또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무게 중심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침입자의 발걸음이라기보다는 손님 같기도 한데….”
범인은 집안으로 들어와 잠시 주변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갑자기 바닥에 강한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서 갑자기 범인이 로봇을 걷어찬 것이다.
“여기다, 위르겐.”
한 가지를 깨달은 빈우는 침입자가 집 안으로 들어온 최초의 위치에 섰다.
“침입자는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마리와 로봇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된 거지.”
방으로 들어온 침입자는 로봇이 보인 반응에서 행동을 결정한 것 같다. 마치 로봇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발로 찬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겁에 질린 마리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쥐어 잡았군.”
군사정보국의 자료에 의하면 여기서 마리의 머리카락을 회수했다고 한다.
“다음은 식탁에서… 어이쿠, 이거 완전히 두들겨 팬 거 같은데요?”
박살 난 주방의 모습에 위르겐이 질색을 한다. 스캐너와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범인이 마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위르겐, 옆을 봐라. 망가진 로봇이 기어온 자국이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로봇이 걷어차여 날아간 곳에서 마리 라캉의 심문 장소까지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다. 타미룩스 사의 로봇팔 흔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강하게 패인 자국이 있다.
“이거 설마 짓밟은 겁니까?”
“자국 보면 뻔하잖아. 그리고 여기서 고문, 심문을 하다가….”
빈우는 일어서서 오븐 쪽으로 걸어갔다. 가스 발사식 화살총에 망가진 오븐이다.
“여기 오븐에 로봇을 집어넣었다.”
“로봇을 오븐에요? 으엑, 왜죠?”
위르겐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빈우는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아마도 그 모습으로 마리를 고문하기 위해서였겠지. 로봇이 구워지는 모습을 보며 마리가 괴로워하고 굴복하게끔.”
“그러니까 아끼는 로봇을 오븐에 넣어 굽는 모습으로 마리 라캉을 괴롭혔다는 겁니까?”
위르겐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로봇을 아껴야 그렇게 될까 싶은 것이다.
“그래, 그러려면 보통 사이로는 안 돼. 때문에 이 로봇과 마리는 아주 각별한 사이로 추측된다. 흡사 가족 같군.”
그때 빈우의 머릿속으로 마리의 가족이 떠오른다. 남편이 피에르와 아들인 자크다.
‘아를르캥을 데려올 걸 그랬나.’
피에르 라캉의 허수아비인 아를르캥은 현재 마카로니 4의 궤도 상에 있다. 데려왔으면 혹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여기서 모은 정보를 보여주면 될 일이다.
“으음, 그러니까. 이놈은 라캉 여사를 고문하고, 가족 같은 로봇을 오븐에 넣어 굽다가, 결국엔 총으로 쏴 죽였다는 겁니까? 이 새끼 뭐 하는 새끼지?”
침입자의 잔인한 행동에 위르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글쎄, 여기서 고문을 좀 더 하다가…. 아니. 총은 마리가 쐈다. 시신의 손에서 가스 반응이 나왔다고 해.”
빈우의 말에 위르겐이 허탈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마리가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와 로봇이 죽은 오븐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욕을 했다.
“지독한 새끼.”
잔뜩 찌푸린 위르겐의 얼굴과는 달리 빈우는 무표정했다.
“전형적인 군사정보국 방식이다. 포로를 잡아놓고 다른 포로를 고문하는 거지. 아주 진하게. 그리고 멀쩡한 놈에게 고문받던 놈을 죽이라고 하는 거야. 고통을 덜어서 편하게 해주라고. 정신을 아주 갈아버리는 거지. 그런데 저건 로봇이잖아?”
얼마나 각별했으면 이런 방법을 썼을까, 하고 생각하던 빈우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범인은 마리 라캉과 이 로봇 간의 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입구에서 망설이는 범인, 이놈은 마리와 로봇의 관계를 잘 안다. 이 경우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료를 보면 마리는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총을 입에 넣고 쏘려고 했다는데, 아쉽게도 오븐 속의 로봇을 쏘느라 화살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기껏해야 앞니 두 개만 부러뜨린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범인은 마리의 목뼈를 부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