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블랙 랜스는 뉴 소노라의 강하 궤도까지 내려갔다. 이제 여기서 빈우와 아나스타샤는 대기권 강하용 셔틀을 타고 지상의 공항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팀장님, 연방의 구축함이 이렇게 궤도 근처까지 와도 괜찮을까요?”
위르겐이 걱정스레 물었다. 반 연방파인 녹색 연맹의 입김이 강하다고 판명된 상황에서 뉴 소노라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혹시 이들을 자극하지 않을까 생각된 것이다.
“괜찮아. 우리는 블랙 랜스가 롱훅 프로젝트의 최신예 개조 전투함임을 알고 있지만, 외부에선 다르게 보인다. 우주 어딜 가나 보이는 구형 탄호이저급이고, 공식적인 방문 목적도 순찰 임무 중 보급과 휴가야. 만약 녹색 연맹 쪽에서 수상하게 봤다면 진작에 시비를 걸어왔겠지.”
빈우의 설명대로 녹색 연맹 쪽에선 궤도로 다가오는 블랙 랜스를 보고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무리 반 연방의 사상을 부르짖는다고 해도 궤도 엘리베이터나 점프 게이트, 연방의 보호 등은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따가 보자.”
현지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빈우와 아나스타샤가 셔틀에 탔다. 곧이어 출발한 셔틀은 대기권으로 강하해 진입했다. 뉴 소노라의 하늘을 날고 있는 셔틀 안에서 아나스타샤는 바깥의 경치를 구경했다.
“와, 저긴 꼭 우리 고향 같네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목적지인 글림의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녹색 평원이었다. 넓게 펼쳐진 녹색의 평야는 한눈에 봐도 농업지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쪽을 본 빈우도 같은 생각을 했다. 고향의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보리싹들이 떠오른다.
“파사트구나. 원래는 글림과 제법 괜찮은 관계를 가진 곳이었는데, 식량을 무기로 해서 글림을 공격해 반 연방 쪽으로 회유했대.”
“어머나.”
“그리고 글림은 마카로니에 스콜피온 전차를 팔았지. 서류상으로는 농기구 사양 2대를 팔았다고 했지만, 예비용 부품 등으로 위장해 전차 사양 24대를 팔았다고 해. 마커스 말로는 상층부가 이걸로 목줄을 잡아당길지, 아니면 모른 척하고 입마개까지 달아 버릴지 생각 중이란다.”
빈우의 설명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아샤, 왜 그래. 불안해?”
“아니요. 이렇게 맨살이 드러난 건 오랜만이어서 조금 어색하네요.”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푹 파인 민소매 티와 속옷으로 보일만치 짧은 핫팬츠였다. 게다가 브래지어는 없고 그 대신 빛나는 니플 패치를 하고 있다. 누가 봐도 글림의 유흥가에서 죽치고 있는 현지인이다.
“하긴 아샤 너, 옛날에 농장일 할 때나 그렇게 입었었지. 응, 똑같애.”
농장의 일은 대부분 로봇들이나 농기계가 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이 있었고, 그럴 때면 빈우네 가족들이 나섰다.
“이렇게는 아니고, 이거 비슷하게 짧게 입었죠. 물론! 속옷은 제대로 입었고요.”
“누가 뭐랬나, 왜 이래.”
발끈하는 아나스타샤를 빈우가 장난스레 실실 웃으며 달랬다.
“그때 마님께선 피부가 안 타는 제가 부럽다고 하셨어요. 대신 저는 땀이 안 나서 일하면서 종종 물을 뿌려야 했고요. 참, 그건 도련님 역할이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아나스타샤는 마치 추궁하듯 가늘게 뜬 눈을 빈우의 얼굴에 바짝 갖다 댔고, 빈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아샤 힘들까 봐 얼마나 열심히 물을 뿌려줬는데.”
“너어무 열.심.히. 뿌리셨죠. 제발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제가 흠뻑 젖을 때까지 계속 뿌렸지요.”
“고마워.”
능글맞은 주인의 대답에 메이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곤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그리고는 울상을 하며 자신의 주먹을 감싸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파, 너무 아파.”
강화 군인의 신체는 겉보기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생체 방탄 섬유로 변한 근육은 마치 타이어처럼 질겨서 때린 사람이 오히려 아플 지경이다.
“아이고, 바보야.”
빈우는 피식 웃고는 아나스타샤의 아픈 주먹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호호 불어준다. 마치 예전에 자기가 다쳤을 때 아나스타샤가 해줬던 것처럼. 어머니의 흉내를 냈던 것처럼.
“저어, 주인님.”
자신의 손에 입김을 부는 주인을 보던 안드로이드가 우물쭈물 말문을 열려고 했다.
“그래, 시간이 나면 고향에 한 번 들리자.”
하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주인이 선수를 쳤다. 그녀의 손을 놓고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기회를 놓쳐버린 아나스타샤는 고향에 가보자는 말을 다시 꺼낼 수가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셔틀은 공항에 도착했고, 둘은 글림의 시가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살인 장소인가요?”
빈우가 모는 오토바이의 뒷좌석에서 아나스타샤가 질문했다.
“그래, 거기서 오토바이의 흔적이 이 공항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범인은 사라졌고. 아마 신분을 위장하거나 화물로 숨어서 이곳을 떴겠지. 우린 일단 살인 현장부터 먼저 조사한다.”
도착한 곳은 유흥가 변두리의 큰길이었다. 군데군데 대형화물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폐차 직전의 낡은 차들도 가끔 보인다.
-여기다.
빈우가 통신회선으로 말한 곳은 살인 현장이다. 남자 둘이 서로를 찔러 죽이고, 여자 하나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사건.
-일단은 절묘하게 위장했네요.
아나스타샤 역시 주인처럼 통신으로 대답했다. 마카로니라면 모를까, 이곳은 주변에 눈과 귀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현장은 경찰에 의한 청소가 되어 아무런 증거가 없지만, 군사정보국이 보내온 자료는 가상현실처럼 두 사람의 시야에만 보이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단순한 메이드가 아니라, 빈우의 사무 도우미이기도 해서 군사정보국의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고, 해당 교육도 받았다.
-지문도 마카로니에서 발견된 것과 같아요.
주사기와 두 남자의 손에 난 지문, 마카로니의 마리 라캉의 집에 있는 지문들은 모두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알아볼 수 없고 별다른 유전 정보 또한 없다.
특기할 만한 정보는 하나였다. 바로 강화 병사의 손바닥에 들어간 미끄럼 방지 무늬가 보인다는 것.
-별도의 식별번호나, 일련번호도 없어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동일 모델 같아요. 하지만 위장을 하려면 아예 무늬를 지우는 게 나을 텐데 왜 이랬을까요?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지금 범인의 일 처리는 뭔가 어수룩하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엔.
-인간을 마치 외계인 다루듯이 했어. 완전히 증거를 인멸하거나, 아니면 안 치우거나. 하지만 어디서 들은 가락이 있는지 기본적인 뒤처리는 해놓았어. 그 방법도 점차 세련되어지고 있고.
둘의 시선에 당시 현장의 사진이 겹쳐 보인다. 야구모자와 후드티를 입은 청년 둘은 서로를 죽였다. 야구모자는 후드티의 목을 졸랐고, 후드티는 야구모자의 배를 칼로 갈랐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붉은 원피스는 약을 세 개나 하고 죽었다.
-흐음, 그냥 보기엔 약물을 놓고 다투다 죽은 것처럼 해놨네요.
-그래, 하지만 문제는 여기선 약물 과다가 있을 수 없단 거지.
만약 그게 없었으면 현지 경찰은 이 일을 흔한 살인 사건 중 하나로 봤을 것이다.
-두 남자의 신체 강화는 현지 기술의 사이버네틱스에 의한 것이고, 일반인은 확실히 뛰어넘는 신체 능력이다. 하지만 범인은 그것을 아이처럼 다루듯이 했지. 일체의 저항이나 반격을 허락지 않고 이렇게 현장을 꾸밀 정도로.
-그래서 범인이 연방의 신체 강화를 한 군인일 것으로 보는군요.
-범인의 신장과 체중, 보여준 폭력. 지금까지 찾은 증거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으니까.
-음 그런데….
스캐너로 주변을 훑던 아나스타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현장이 너무 많이 훼손되었어요. 이래선 조사가 힘든데….
그녀의 말대로 세 사람의 시신이 발견된 곳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찰들이 청소를 했지만, 그 뒤로 여러 가지가 현장을 덮고 있었다.
추모를 위한 술과 술병, 아예 술을 부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얼룩에선 아직도 술 냄새가 난다. 그리고 죽은 자를 기리는 그래피티와 복수를 다짐하는 글귀들. 초, 꽃다발, 알 수 없는 현지 갱단의 표식과 그것을 훼손한 상대 갱단들의 암호들.
-더 이상 조사는 못 하겠군.
범인은 여기서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지만 그 이전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다. 당시 글림에선 신년 축제를 하고 있던 터라, 인파가 너무 많아 족적이나 그 외의 증거가 될만한 것들이 모조리 묻혀버린 것이다.
-군사정보국이나 보안국에서 보낸 정보도 이게 다예요. 주인님.
아나스타샤가 보여주는 자료는 이미 빈우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때 갑자기 빈우의 손이 아나스타샤의 목덜미로 향했다. 오른손이 붉은색과 녹색으로 얼룩진 금발을 쓰다듬을 때, 왼손은 그녀의 엉덩이로 향한다. 짧은 바지의 속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쓰다듬던 손이 다시 나와 그녀의 가슴께로 향하더니, 옷 속에서 니플 패치를 떼려고 꼼지락댄다.
“어머, 여기서?”
아나스타샤가 몸을 돌리며 깔깔대자 빈우는 그녀를 냉큼 들어 올렸다.
“꺅.”
빈우는 웃으며 바둥대는 아나스타샤를 안고 목덜미를 핥은 다음, 화물차 너머의 골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반대편에 있던 폐차 안에서 거지 하나가 슬그머니 나와 둘이 사라진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거지는 손에 든 술병을 골목에 대어보는 시늉을 하다가 서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길목 어귀에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때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서 빈우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거지의 멱살을 잡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거지는 필사적으로 저항해봤지만, 군인인 빈우의 힘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빈우는 한 손으로는 거지의 멱살을, 다른 손으론 거지의 술병을 들고 빼앗는다. 그리고 그 술병을 벽에 쳐서 깨트리자 안에 있던 카메라와 청음기가 드러난다.
아까 아나스타샤와 통신하던 빈우는 누군가 자신들을 탐지하는 것을 느끼고, 만약을 대비해 아나스타샤의 목덜미에 있는 단자에 유선으로 접속해 메시지를 전달했었다.
‘감시당하고 있다. 유인한다.’
명색이 정보 사령본부 소속 안드로이드인 아나스탸샤다. 이것저것 배운 가락이 있어 주인의 행동에 맞장구를 쳐주었고, 골목 안에서는 진득한 신음소리까지 낸 것이다.
“이 새끼가.”
빈우가 발끈한 척, 거지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
“이 거지새끼가. 너 뭐야, 누군데 이런 개 같은 짓을 해 이 씨발놈이!”
적당히 발로 주물러 주자 거지는 피와 이빨을 토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빈우에게 가르쳐주었다. 두뇌 칩 반응 없음. 숨기고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이 정도 충격이나 고통, 그리고 빈우가 보내는 통신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일단 이 거지에게 두뇌 칩은 없다.
다음, 일체의 강화도 없고 맨몸이란 점.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우주 생활용 강화조차 없다. 여기까지 드러난 사실로 보면 이 거지가 연방 직할령의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즉, 군사정보국이나 연방수사국의 조사원은 아니란 것이다.
게다가 현지의 사이버네틱스 수술도 없다는 점으로 보아 돈이 없는 거지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고가의 감시장비를 쓰고 있다는 점이 수상하다.
-누군가의 끄나풀 같군. 근처에 다른 놈은 없나?
-주변에 다른 감시자는 없어요.
빈우가 보낸 통신에 아나스타샤는 스캐너로 이 주변 일대를 다시 한번 훑었다.
“재미 좀 보려는데 어디서 이 새끼가 방해질이야!”
빈우는 다시 큰소리로 을러댔다. 그는 이 거지가 어떤 갱단의 정보꾼이나 조사역을 맡은 놈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건 현장에 갱단들의 표식이 있었으니, 피해자들은 어떤 조직에 속해있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조직은 자기 조직원이 죽자 독자적으로 조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범인을 찾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