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지금 빈우는 적당히 힘 조절을 하고 있지만, 일반인 기준으로는 상당히 아플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거지는 비명 대신 말을 토했다.
“이, 이노, 컥! 이노우에 고토 씨.”
거지가 부른 것은 빈우가 입성할 때 제출했던 가명이다. 그렇다면 이 거지는 빈우에 대한 정보를 받고 감시를 명령받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명령자는 뉴 소노라의 입성관리국과도 연줄이 닿아있는 자임이 분명하다.
빈우가 발을 잠시 멈추자 거지는 허둥지둥 손을 휘두르며 일어났다.
“이야기, 헉헉. 이야기, 얘기를 좀 합시다. 전할 말이 있어요.”
거지는 맞은 곳을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사실은 선생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우가 슬쩍 발을 들자 거지가 손사래를 친다.
“악, 그만 하세요. 선생님도 아는 분이에요. 만나면 아는 사람이라고요.”
그 말에 빈우는 발을 슬그머니 내렸다.
‘만나면 아는 사람이라… 누굴까. 이노우에 고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일까, 김빈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일까.’
이노우에 고토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이 제법 많다. 이 이름을 지닌 자가 연방군 정보 사령본부 산하의 군사정보국장이라는 것 정도는 대외적으로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빈우와는 얼굴이 다르고 동명이인이란 설정이다.
만일 명령자가 김빈우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거라면 문제는 조금 심각해진다. 일단 빈우는 군사정보국의 요원이라 신상이 극비다. 물론 외부로 노출된 것은 피자 타이거의 사원이나 모델이지만, 그것도 활동 안 한 지 제법 되고 이노우에 고토란 이름으로 활동하지도 않았다.
빈우는 머릿속에 있는 가설에 퍼즐이 준비돼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안내해.”
* * *
거지가 빈우와 아나스타샤를 안내한 곳은 유흥가에서 조금 떨어진 큰길 뒤의 좁은 골목이었다. 그리고 거지는 한 건물의 지하 계단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그 말을 한 거지는 허둥지둥 도망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빈우는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이 있고 그 옆엔 스위치가 있다. 먼저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잠겨있다. 스위치를 세 번쯤 눌렀을 때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 장사 안 해요.”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다시 스위치를 누르자 문의 작은 창이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얼굴을 보인다.
“가게는 밤 열 시부터예요. 그때 오세요.”
그때 뒤에서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손님이야. 들어오시게 해.”
그러자 여자는 문을 열었고, 빈우와 아나스타샤는 안으로 들어갔다. 탁한 공기의 어두운 실내. 주변 인테리어로 보아 연주를 하는 술집처럼 보인다.
가게 안쪽 구석에는 한 남자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 남자의 용모는 마커스로부터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글림의 정보상. 가격만 맞으면 도시 연합의 정보를 누구에게든 파는 사나이. 글림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조금 들볶였다고 했고, 빈우도 이번 조사 때 그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빈우를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기다려.”
빈우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한 다음 정보상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빈우를 흘깃 보더니 다시 시선을 접시 쪽으로 돌렸다.
“오랜만이군. 이노우에 고토 씨, 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저 남자는 빈우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빈우는 뉴 소노라에 온 적이 없다. 최근에는 태스크 포스 373의 일로 바빴고, 그전에는 울토르 중대에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잠수를 하고 온 적이 있을까? 아니지. 그것보다 더 확률이 높은 게 있잖아.’
빈우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일부러 가게를 휘휘 둘러본다.
“오랜만이라, 그래. 신년 축제 때였지.”
빈우가 말한 것은 글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추정시간이다. 그리고 남자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는 빈우의 외모를 알고 있다.
이것으로 퍼즐이 짜 맞춰졌다. 그날 이곳에서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은 빈우의 클론이다. 아직 명확한 연결고리는 없지만, 정황증거가 너무 명백하다. 글림의 신년 축제 당시 빈우와 같은 신체를 가진 군용 클론이 글림에 있었고, 피해자들은 연방의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범인과 클론을 동일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날 찾았지?”
빈우의 질문에 사내는 대답 대신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씹었다. 잠시 우물거리던 그는 커피를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그날, 당신이지?”
돌아온 건 해답이 아닌 질문이다. 앞뒤가 다 잘렸지만,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빈우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가게를 나가고 다음 날 아침, 젊은이 셋이 죽었더군. 압도적인 폭력과 아주 어수룩한 방법으로.”
그가 말한 어수룩한 방법이란 현지인에게 들키는 방법으로 위장한 현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약간 세게 내려놓은 커피잔의 소리가 정보상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림은 엉망이 됐어. 조직원을 잃은 갱단의 폭주, 적대세력과의 싸움. 이어서 연방수사국의 간섭까지.”
침착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선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다. 자치 행성의 살인 사건에 갑자기 연방수사국이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들쑤시니 황당했을 것이다. 글림은 마카로니에 스콜피온 전차를 팔았었다. 주변 도시의 협박을 받았다, 농기구를 판 것이다 따위의 변명은 안 통했겠지. 아마 보안국의 부탁을 받은 연방수사국은 이번 살인 사건을 빌미로 글림을 조지려 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클론의 살인이고, 이 정보상은 그와 거래를 했었다.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빈우가 글림으로 돌아왔으니 급작스럽게 감시를 붙였겠지.
“그날 내게서 정보를 사 간 사람이 연방의 군인일 줄이야. 아니, 중앙정보국 사람인가? 그날 왜 나와 거래를 한 거지?”
정보상은 빈우의 신원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동과 거래한 정보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하던 빈우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바에 서 있는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불렀다.
“여기 주문. 그때하고 같은 거로.”
아마 당시의 클론은 인간처럼 행동하기 위해 뭔가 주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거대한 사고를 쳤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가 그날 저녁에 받은 주문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는 잠시 뒤로 사라지더니 곧 잔과 맥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빈우의 앞에 놓고 맥주를 따라주었다.
‘맥주라….’
빈우는 클론들에게 딱히 기호품에 대한 설정은 하지 않았었다. 아마 주변의 상황을 보며 대강시켰겠지.
“내가 그때 이걸 마셨던가?”
빈우의 물음에 안드로이드가 흠칫 놀란다. 외형뿐만이 아니라 행동까지 인간을 흉내 낸 고급형이다.
“아뇨, 그날은 맥주 아무거나 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준비 중이어서 그때랑 같은 맥주는 아직….”
말끝을 흐리는 안드로이드에게 빈우는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맥주로 목을 축인 다음 대답했다.
“그날 내가 얻은 정보는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 그리고 죽은 놈들은 죽을 짓을 해서 죽은 것뿐이야.”
정보상이 딱히 반박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빈우의 추측이 맞은 것 같다. 빈우가 예상했던 대로 피해자인 갱들의 평소 행동은 엉망진창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날 클론이 얻은 정보인데.’
한번 물었던 정보를 다시 물어본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을 잘 골라야 한다. 정면 돌파를 하든, 아니면 우회를 하든.
“하지만 내가 한 일로 인해 피해가 왔다면 내가 마무리 지어주지. 앞으로도 좋은 거래를 하고 싶거든.”
빈우의 말에 정보상의 눈빛이 변한다. 그에게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돈만 주면 정보를 팔 뿐이다. 정보를 가져오면 돈을 지불할 뿐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걱정인 것은 연방수사국이 휘젓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그러니 원인이 된 그가 사태를 마무리 지어주겠다고 하니 솔깃할 수밖에.
“단, 공짜는 아니지.”
사고를 친 사람이 사고를 수습하겠다는데 돈을 내놓으라는 격이다. 정보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난 공짜로는 거래 안 해.”
칼자루는 빈우가 쥐고 있지만, 정보상은 단호했다. 지금까지 정보상이 혼란한 녹색연맹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정함이다. 거래에는 반드시 지불을 하고 거래대상은 가리지 않는다. 만약 빈우에게 다른 전례가 생긴다면 그다음이 생길 것이고, 정보상은 더 이상 장사를 못 하게 된다.
“물론, 나도 대가는 지불해. 내가 거는 것은 다른 거야.”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빈우가 말을 이었다.
“함구령이지.”
즉 빈우는 정보상에게 무언가를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보상이 알고 있는 정보일 수도 있고, 빈우가 그와 거래를 했다는 내역일 수도 있다.
“나하고 거래를 한 것을 비밀로 할 순 없어. 이미 다른 놈들이 사 갔으니까.”
빈우의 거래조건을 어림짐작한 정보상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거래대상의 정보도 팔아넘기는가?”
“보통은 아니지.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일의 여파가 보통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금액도 보통이 아니었고.”
“아하.”
작게 웃는 빈우에게 정보상이 이상한 시선을 던진다.
“왜 그래?”
“아니, 그때와는 인상이 너무 달라 보여서.”
그러면서 정보상은 아나스타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마 당시의 클론과 지금의 빈우가 생김새는 같아도 하는 행동이 달라서 가진 의문일 것이다. 빈우도 짐작할 수 있다. 신년 축젯날은 무표정한 살인 기계로 돌아다니더니, 지금은 헐벗은 여자를 하나 끼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일이니까.”
그렇게 말을 돌리는 빈우의 귀에 뭔가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달려오는 소리. 남자들의 거친 발소리다. 그들은 이곳 지하 클럽으로 향하고 있다. 이어서 우당탕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거세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문 열어!”
고함소리와 함께 벨이 시끄럽게 울린다. 세게 두들겨지는 문이 삐걱거린다.
“문 열라고!”
바에 있던 여성형 안드로이드가 서둘러 문가로 달려간다. 그리고 작은 창을 열었다.
“누구세요?”
“영감 있지? 문 열어.”
아마도 서로 안면이 있는지 안드로이드는 문을 열었고, 한 무리의 깡패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놈들의 시선은 곧 빈우와 정보상 쪽으로 향했다.
“저기, 저 사람이에요.”
깡패들에게 끌려 나온 사람은 아까 빈우에게 두들겨 맞은 거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빈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뒤이어 무리들이 따라 몰려온다.
“영감.”
테이블 앞에 선 사내가 거칠게, 그러나 자제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이 형씨. 누구요.”
정보상은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꽤나 곤란한 듯 보였다.
“손님이야.”
그 대답에 두목은 잠시 생각했다. 정보상은 그의 구역에 있지만 중립이다. 이 도시 글림 뿐만 아니라 녹색연맹, 아니 연방 직할령에까지 손이 닿는 거물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정보상에게 몇 번 신세를 진 터라 지금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우하고 있는 것이다.
두목은 잠시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폐 한 뭉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툭 던진다.
“하나 물읍시다. 이 형씨가 그날 내 새끼들을 회 친 놈이오?”
클론은 나름 뒤처리를 한다고 했지만, 말 그대로 어수룩했다. 뒤이어 연방수사국까지 와서 들쑤셔 놓으니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대답은 영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저놈 저거!”
무리 안쪽에서 남자 한 명이 나왔다.
“신년 축젯날 거리에서 술을 파는데, 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놈이 있었슴다. 직할령에서 온 것 같이 보였기에 아직 기억합죠. 저놈이에요.”
아마 클론의 서툰 행동이 그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나도 나도! 나 저 오빠 기억나.”
이번엔 젊은 여자가 나섰다.
“나 그날 존나 열심히 손님 끌었거든? 다른 손님들은 다들 발딱발딱하는데, 저 오빠만 생까고 가더라. 지금 보니까 기억나.”
클론은 나름 주변의 시선을 안 끌려고 노력한 모양이지만, 오히려 그게 이들의 시선을 끈 모양이다. 다시 두목이 나섰다.
“영감님, 다시 한번 물읍시다. 이 새끼가 그날 내 동생들 담근 놈이냐고?”
정보상의 곤란함이 빈우에게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빈우는 그 곤란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