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서둘러서 처리해. B조가 자리 잡으면 바로 이동한다.
빈우와 파트리샤, 그리고 무인 어벤져들은 건물 옥상에서 죽어가는 워프 비스트들의 숨통을 끊었다. 강하한 지 10시간이 지났으나 웨이블의 상황은 비교적 양호하다 할 수 있었다. 대피할 사람들은 이미 대피했으니 아군 빼고 다 죽이면 되는 일이다.
다만 그 죽여야 할 놈들이 하늘에서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게 첫 번째 문제고, 보급이 간당간당하다는 게 두 번째 문제였다.
-저 새끼들, 역시 제대로 된 대기권 돌입 능력이 없었구나.
궤도 상에선 그렇게나 많았던 놈들이 지상에서 적었던 이유가 있었다. 소형 함선 형태의 놈들에겐 대기권 돌입이나 중력권 내 비행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상으로 내려오다가 중간에 타 죽거나 땅에 떨어져 죽는 비율이 꽤 되었고, 그것 때문에 궤도 엘리베이터에 집착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워프 비스트들의 지상 침공은 이곳 웨이블로 집중되고 있었다. 다른 도시로도 소규모 침공이 몇 차례 있었지만, 지상까지 도달한 놈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한 모양이다.
-일단 이곳 웨이블의 대피는 얼추 끝난 모양인데, 어쩌실 겁니까?
파트리샤의 질문에 빈우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현재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워프 비스트들은 더 이상 희생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지하 벙커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일단 시민들의 대피가 끝났으니 지상팀이 철수해도 되겠지만, 일이 또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가 없었다.
빈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일단 닫힌 게이트가 열릴 기미는 없어 보인다. 워프 비스트가 열든, 아군이 열든 아직 별다른 반응은 없다.
하지만 궤도 상의 워프 비스트들은 계속해서 낙하하거나,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침공 초기에는 뉴 소노라 곳곳으로 소형정들이 내려왔지만, 손실이 컸는지 다시 궤도 엘리베이터로 모이는 것이다. 저 내려오는 놈들이 다시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면 그건 또 골치 아픈 일이다.
-저걸 아예 날려버릴까요?
파트리샤가 툴툴거린다. 구름 위로 올라간 궤도 엘리베이터에 워프 비스트 함선들이 모인 것을 보면 그럴 마음이 들 법도 하다.
-참아라, 무게추 밑의 하부 구조물은 중력에 잡혀있어. 부수면 바로 지상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지하 벙커에 피신했다 한들 저 정도 구조물이 지상으로 낙하하면 피해가 꽤 클 것이다. 다른 도시에도 파편이 떨어질 터였다.
아까 빈우는 유선통신으로 다른 도시 상황들을 살펴보았는데, 몇몇 곳은 아예 승전보를 울리고 있었다. 심지어 사살한 워프 비스트의 시신을 앞세워 퍼레이드를 하는 도시도 있었다. 빈우가 필사적으로 대피하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는다.
만약 터미널을 봉쇄하고 있는 373팀이 철수하면 놈들은 그리로 몰려갈 것이고, 녹색 연맹의 자치군은 착각 속에 익사하기 전에 동포의 피바다에 익사할 것이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틴다. 터미널로 밀고 내려와 여기까지 뚫리면 대참사다.
그러면서 빈우는 코일건의 탄창을 점검했다. 놈들에겐 과거 목타하를 잡았던 탄두 세팅이 유효했다. 단단한 외피를 부순 다음 안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복잡한 세팅이라 탄두 생성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그러나 재료가 부족하다.
-파트리샤. 탄두는 넉넉하냐?
-글쎄요. 한두 번은 버티겠네요.
블랙 랜스에서 보급품을 뿌려주긴 했지만 모자라다. 이미 챙길만한 곳에선 다 챙겼기 때문에, 남은 보급 포드가 있는 곳은 워프 비스트들이 바글거리는 곳들뿐이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373팀은 지상에서 쓸만한 자재들을 모아 탄두 생성기에 재료로 넣었다. 전용 자재에 비하면 질이 떨어지지만, 방어력이 뛰어난 놈들은 아니라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이었다.
동력은 이곳 웨이블의 전력을 훔쳐 쓰는 중이다. 궤도 엘리베이터에는 행성 자전력을 이용하는 발전기가 있다. 그 전력은 도시 여러 군데로, 심지어는 인근 도시로까지 뻗어 나가 있어, 지상팀이 쓰기엔 차고 넘친다.
대원들도 문제없다. 강화한 군인들은 사나흘 정도는 쉬지도 자지도 않고 전투가 가능하다. 강화 신체용 연료나 마카롱 또한 넉넉하게 챙겨와서 에너지 걱정도 없다.
문제는 장갑복의 점검이다. 손상을 입은 장갑 부위는 그렇다고 쳐도 테스트용 반푼이 장갑복인 빈우의 컨커러는 10시간 이상 쓸 물건이 아니다. 그라인더나 인필트레이터도 기본 설정으로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장시간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 둘은 야전에서 응급처리를 하거나 정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컨커러를 손보려면 장갑복 정비창과 전용 정비기사인 모니카가 필요하다.
-팀장님은 괜찮으세요?
-아까부터 컨커러 자체 방어막이 맛이 갔다. 기체는 억지로나마 기동이 가능해. 문제는 스핑크스하고 입자 가속 포야.
빈우의 무장인 스핑크스는 테스트 무기다. 접었다 폈다, 폈다 접었다, 뽀대는 나는데 이 지랄 하다가 가끔씩 컨커러의 화기 제어시스템과 충돌이 나서 먹통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등에 달린 입자 가속 포는 블랙 랜스의 부포를 그대로 뗀 다음 포신을 접어놓은 무식한 병기다. 절륜한 위력만큼 부작용 또한 초절하다.
-스핑크스 못 쓰면 입자 가속 포도 못쓰죠?
-쓸 수야 있지. 내가 뒤지니까 문제지만.
-문제없네. 쏠 때 나한테서 머얼리 떨어져서 쏘세요.
-썅년이.
대기권 내에서 입자 가속 포를 쏘면 발사된 아광속의 입자와 대기 중의 입자가 충돌해서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컨커러의 방어막이 골로 간 지금 스핑크스의 방패 상태까지 작동하지 않으면 쌩으로 쏴야 하는데, 아무리 빈우라 해도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근데 정말 괜찮아요?
파트리샤가 괜찮냐는 질문을 또 한다. 아마 다른 이유겠지.
-괜찮아. 걱정하지 마.
빈우는 덤덤하게 답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둘 모두 알고 있다. 질문이 묻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인간이 변한 워프 비스트와 워프 비스트로 변해가는 인간, 그리고 아직 변하지 않은 인간. 빈우는 이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렸다.
팀원들도 안다. 그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빈우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는 것 또한 안다.
워프 비스트에 대한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모른다. 해결책은 단 한 가지. 빈우는 그것을 실행했을 뿐이다.
빈우가 소이탄을 터트렸을 때, 창고 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대인용이 아니라 대물용 소이탄이라 장갑복에도 꽤 큰 피해가 준다. 하지만 컨커러의 방어막이 작동해 화염을 막는다.
빈우는 입구를 향해 걸었다. 화염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워프 비스트의 목에 칼을 꽂고, 서로 부둥켜안고 바닥을 뒹구는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준다. 불에 타 근육이 굽어 쪼그라드는 시체들 사이로 빈우는 걸었다. 불현듯 마카로니에서 자신이 쏜 총탄에 불타 죽는 전차병이 떠오른다.
-B조가 자리 잡았다. 이동.
빈우는 멀리서 아룹의 B조가 건물 옥상에서 사격을 퍼붓는 것을 보고 잡념을 떨친 뒤, 명령을 내렸다. 지금 태스크 포스 373의 지상팀은 서로 번갈아 공격지점을 잡고 이동하면서 워프 비스트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이놈들 점점 머리를 씁니다.
아룹의 경고대로 워프 비스트들은 점차 초보적인 전술을 쓰는 중이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것도 이전처럼 마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숫자를 모아서 돌진한다. 이에 질세라 시가지에 있던 놈들도 합세하고 있다.
이번에 빈우가 자리 잡은 곳이 그랬다. A조가 터미널 입구에 교차 사격을 하러 건물로 올라갔는데, 시가지에 있던 워프 비스트들이 그 건물로 몰려든 것이다. 수가 적어서 망정이지 제대로 몰려왔다면 앞뒤로 포위돼 위험할 뻔했다.
-워오~ 팀장님. 우지가 선물 가져옵니다.
파트리샤의 말에 빈우는 고개를 들어 센서를 확대해 본다. 저 멀리 대기권 바깥에서 롱소드가 날아오는 게 보인다. 기체 밑에는 보급물자가 대롱대롱 달려 있고, 뒤로는 워프 비스트들이 주렁주렁 딸려 온다.
-새끼, 욕본다. 파트리샤 신호 보내.
뉴 소노라 전체에 전파방해가 있는 지금은 레이저 통신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파트리샤는 우지에게 낙하 장소에 대한 정보를 보내 주었고, 겸사겸사 블랙 랜스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들었다.
-자꾸 이쪽 상공으로 모인다는데요? 따로 떨어진 거 보이는 족족 잘라먹었더니 얘들이 한데 모여서 다닌답니다.
-그래? 어찌 보면 다행이군.
태스크 포스 373으론 행성 하나를 절대 커버 못 한다. 혼자서 뉴 소노라 말아먹을 방법에 대해서는 논문을 쓰겠지만, 지키는 입장에선 쪽수가 딸리면 죽도 밥도 안된다. 그래서 워프 비스트들이 행성 전체로 퍼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는데, 이렇게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모여주면 한숨 돌릴 수 있다.
-이런 씨바랄! 근처에 점프 반응이 있었답니다.
갑자기 터지는 파트리샤의 비명에 빈우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종족 중에서 게이트도 없이 점프하는 놈은 샤다이 뿐이다.
-어디?
-뉴 소노라로부터 42만km 외곽, 정지 궤도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에요. 리퍼함 최소 세 척이 점프해 온 다음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잠깐, 함장님이 퇴각에 대해 의견을 물어본다는데요?
-우주 엘프 씹새들이!
워프 비스트가 샤다이의 병기라면 이것을 선발대로 보내놓고, 자신들이 뒤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워프 비스트들이 근접전에서 고기 방패를 하고, 샤다이가 뒤에서 플라스마 사격을 가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은 리퍼함 세 척이지만 이후에 얼마나 더 올지 모르는 상황. 오르 함장의 말대로 후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고엔 ‘최소’라고 했다. 샤다이가 숨어버리면 인류의 기술로는 찾기가 힘들고, 대규모 전파방해가 있는 상황이라 정찰기를 쓰기도 힘들다. 그 말인즉슨 실제론 적함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단 소리였다.
-부팀장, 들었습니까?
-네, 상황이 안 좋군요.
워프 비스트 함선과 샤다이 함선의 차이는 명확하다. 만약 궤도에 같은 수의 샤다이 함선이 있었다면 블랙 랜스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부팀장.
-말씀하십시오.
잠시 생각을 하던 빈우는 조심스레 작전을 설명했다.
-벙커를 꺼내 궤도 엘리베이터로 실어 쏘아 올리는 건 어떨까요.
-흐음.
만약 샤다이의 지상 병력이 뉴 소노라에 내려온다면 끝장이다. 지하 벙커 따윈 놈들에게 종잇장과 다를 바가 없다. 373이 후퇴하게 되면 사람들은 벙커 안에 든 채로 불탈 것이다.
하지만 뉴 소노라의 벙커 중 절반 정도는 연방의 규격품이다. 유사시에 궤도 엘리베이터에 실어 대피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벙커 하나 들고 움직이는 데는 일개 분대면 충분하고, 궤도 엘리베이터도 하부 부분은 남았으니 가능은 합니다만….
빈우는 말끝을 흐린 아룹이 어딜 보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도 같은 방향을 보았다. 다시금 궤도 엘리베이터 터미널에서 쏟아져 나오는 워프 비스트들과 상공에 깔린 놈들의 함대가 보인다. 암울하다.
아룹 말대로 벙커를 꺼내서 옮기기는 쉽다. 문제는 쏟아지는 워프 비스트들과 싸워가며 벙커를 궤도 엘리베이터에 실어 쏴 올려야 하고, 벙커가 궤도 위로 올라간 다음엔 블랙 랜스가 놈들의 함선을 비집고 들어와 챙겨가야 한다. 플라스마 포격에 격추되기 전에.
-…힘들겠군요.
-역시 그렇겠죠. 일단 다른 도시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립시다. 빨리 대피령을 내리세요. 우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니 웨이블의 시장을 통해 알리도록 합시다.
뉴 소노라의 시민 중 태스크 포스 373의 대피 지시에 따른 도시와 시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반 연방 정서가 강해 뻣뻣이 서 있다가 죽어갔다. 하지만 같은 녹색 연맹의 시장이 하는 말이라면 달리 들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벙커로 가서 방송을 하라고 알리겠습니다. 흡!
마지막에 아룹이 숨을 들이쉰 것은 무언가 놀랄만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우도 그것을 보았다. 태스크 포스 373의 전원은 같은 것을 보고 놀라며, 경악하고, 욕을 했다.
-씨팔.
샤다이 전열함 한 척이 대기권 안으로 점프해 들어온 것이다. 위치는 웨이블의 궤도 엘리베이터 옆. 태스크 포스 373의 바로 머리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