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빈우는 헬멧을 벗고 일어났다. 그리고 건물 옥상의 가장자리로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알탄훼아나!”
아래에서 리퍼들이 조준하는 게 보인다. 두뇌 통신으로 팀원들이 놈들을 조준하는 것 또한 느껴진다. 그러나 알탄훼아나가 손을 들어 자신들의 동료를 제지했다. 그리고 푸른 눈으로 빈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김빈우.”
“다행히 기억하고 있네. 발 가르단 하스 이후 처음이지?”
빈우의 인사에 알탄훼아나는 대답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부하들은 어디 있나?”
그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마주 보며 빈우는 히죽 웃었다.
“숨어서 너희들을 노리고 있지. 나를 공격하면 바로 반격하도록.”
리퍼들의 자세가 낮아지는 게 전투를 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탄훼아나는 참과 거짓을 구분한다고 했다. 모든 샤다이가 그런지, 그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능력이란 것은 쓰기 나름이다. 자신이든 남이든.
“안심해라. 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너와 대화를 하러 온 것이지.”
빈우는 진실을 말했지만 알탄훼아나의 눈에선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빈우는 다시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제껏 난 너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다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 나머지는 네가 병신같이 착각해서 벌인 일이다.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팀장님, 지금 대화하자는 것 맞죠?
조준을 하고 있는 파트리샤가 낮게 이가는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래서 빈우는 그녀에게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잖냐.
팀원들의 두뇌 통신으로 탄식이 흐른다. 잠시 후 밑에서 알탄훼아나가 주변의 동료들에게 눈짓을 했고, 리퍼들이 무장을 내렸다.
“좋아. 그럼 내 차례군.”
빈우가 손짓하자 매복해 있던 373 지상팀과 무인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퍼들 중 몇몇은 움찔했지만 싸우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빈우의 컨커러가 뛰어내렸다.
“난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너 또한 그렇지 않나?”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의 눈초리가 좁아졌다. 그녀는 발 가르단 하스에서 이케가미 의원이 얻은 대화 기회를 양보받았었다.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에게 휘말렸기 때문에 그녀가 대화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그 기회를 꽤 중요시했던 걸 봤기 때문에, 그전에 있었던 이케가미 의원과의 일을 궁금히 여길 수도 있다 판단 내린 것이다.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어떻게 되었나?”
질문은 다짜고짜 그녀가 먼저 했다. 상관없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저쪽이 대화의 장에 선 것이다. 그래서 빈우는 솔직하게, 가감 없이 대답했다.
“발 가르단 하스에게 계단을 내려오는 자로부터 동족을 구할 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알아낸 방법을 실행해달라고 했다.”
여기까지 말한 빈우는 한 템포 쉬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다. 알탄훼아나는 빈우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자, 워프 비스트와 싸우고 있는 그녀라면 당연히 흥미를 가지겠지. 빈우는 그녀의 반응을 자세히 살피며 다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계단을 발 가르단 하스에게 부숴달라고 했다.”
그 말에 알탄훼아나는 움찔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더니 질문했다.
“너, 너희 종족은 별 심장의 불길을 다룰 수 없지 않나?”
샤다이들은 플라스마를 별 심장의 불길이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항성 안에 가득 찬 것은 고온의 플라스마니까.
“그래, 다룰 수 없지.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타죽었다. 내 눈앞에서. 나는 그를 구하지 못했다.”
이 말에 알탄훼아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마치 뜻을 같이하는 자를 잃었을 때의 표정처럼 보였다. 진영은 달라도 같은 뜻을 가진 자를.
“그랬군, 역시. 그 덕분에 잠시나마 저쪽의 계단이 무너진 거였어. 그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알탄훼아나는 하나의 응어리가 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빈우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젠 내 차례군.”
그 말에 알탄훼아나는 고개를 들어 빈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먼저 말했다.
“잠깐, 혹시 그대가 물어볼 일이 오늘 이 행성에서 일어난 일과 발 가르단 하스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인가?”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
그녀의 얼굴에서 곤란함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대가 질문할 것은 우리 종족의 중대사다.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알려줄 순 없어.”
“뭔 개소리야. 난 네 질문에 대답했어.”
퉁명스런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가 쩔쩔맨다.
“안다. 다른 것은 안 될까? 그대에게도 다른 종족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지 않나?”
하긴 빈우에게도 절대 발설할 수 없는 군사 기밀들이 있다. 만약 빈우가 질문하려는 것이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알탄훼아나의 반응이 이해는 간다. 그래도 빈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알탄훼아나가 문득 생각난 듯 서둘러 질문해 온다.
“맞아. 너는 유에네스의 전투담당 계급이지 않나?”
“지금까지 죽자고 치고받았으며 새삼 무슨 소리냐.”
빈우의 한숨 섞인 말투에 알탄훼아나는 발끈했다.
“기껏 친절을 베풀어 주려는데, 무례한 자가.”
그리고 그녀는 다음에 나올 말이 중요한 말인 듯,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한 번 둘러 본 다음 말했다.
“혹시 그대는 동족의 전투 계급 중에서 피에르 라캉이란 자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있나. 피에르 라캉. 보안국의 중령. 빈우와 함께 울토르 프로젝트를 진행한 자. 가족을 잃고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죽은 자. 워프 비스트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눈앞에 있던 알탄훼아나에게 죽은 자.
‘그녀는 왜 자신이 죽인 자에 대해 묻는 것일까.’
“물론 알지.”
빈우의 대답에 알탄훼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군. 그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동족의 군인에게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묻는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특히 당시 라캉 중령이 처했던 상황을 보면 더더욱.
“…아군.”
“내 말은 단순히 한 패냐, 아니면 그의 동료라 불릴 만한 사이냐는 것이다.”
“한때나마 동료였고, 너에게 죽기 바로 전 그는 내게 의지했다.”
“아니, 그것은….”
알탄훼아나는 빈우의 말에 뭐라 말하려 했지만, 먼저 그 말의 진위부터 파악했다. 그리고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좋아, 그렇다면 오르톨랑에 대해 알려다오.”
“뭐?”
생뚱맞은 질문에 빈우는 당황했다. 왜 갑자기 오르톨랑이 대화의 주제로 튀어나올 것일까. 헌데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뭔가의 조건 같다. 마치 빈우가 질문하려는 것에 대해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일단 빈우는 아는 것부터 천천히 말했다.
“오르톨랑은… 새 요리다. 조리법이 조금 독특하지.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지?”
“그대가 피에르 라캉과 동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빈우의 머릿속이 번뜩인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죽은 피에르 라캉. 그리고 그날 빈우에게 온 그의 허수아비 아를르캥. 아를르캥에겐 자기 주인의 레시피가 있고, 빈우는 그것이 피에르 라캉이 숨긴 워프 비스트에 대한 자료를 찾는 단서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추측이 전제부터 완전히 틀렸다는 걸. 그 열쇠는 숨긴 장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향하는 문의 열쇠였던 것이다.
“내가 피에르 라캉과 같은 동료여야 한다고? 네가 죽인 자와?”
빈우의 중얼거림에 알탄훼아나는 뜨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그 날 나는 피에르 라캉을 도울 수 없었다. 그의 몸 안에 있는 계단이 너무 컸고, 나는 실력이 미진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만든 별 심장의 불길에 죽었고, 나는 다시 발 가르단 하스를 찾았다. 계단을 부술 방법을 배우기 위해.”
피에르 라캉은 평온한 표정으로 죽었다. 빈우는 그것이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그 말은 알탄훼아나, 너와 피에르 라캉이 협력 관계였다는 의미인가?”
“그래. 각자 자신의 동족에게 들키면 큰일이 나겠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당부한 것이 있었다. 만일 자신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나를 찾아온 동료에게 자신이 가졌던 정보를 전해달라고. 그러니 만약 그대가. 김빈우, 그대가 피에르 라캉의 믿을만한 동료라면 오늘 일에 대해 물어볼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피에르 라캉이 알고 있는 정보가 오늘 일과도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야 물론.”
그 대답에 빈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피에르 라캉이 워프 비스트에 대한 자료를 숨긴 곳은 알탄훼아나였다. 정확히는 숨겼다기보다는 근원이겠지만.
만약 빈우가 정상적으로 그녀에게 도달하려 했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를르캥이 가진 레시피 속에서 단서를 찾고, 그것을 실행해 샤다이 호민관에게 추리가 도달하려면 중간에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하지만 빈우는 우연히도 오늘 그녀와 만남으로써 그 중간과정을 다 생략할 수 있었다.
“차암 빨리도 말한다. 썅년.”
인간의 한숨에 샤다이가 발끈한다. 그녀와 마주친 건 오늘까지 벌써 네 번째다. 오스카 스테이션, 오브리가도, 발 가르단 하스. 뉴 소노라. 네 번째가 돼서야 그녀는 빈우에게 피에르 라캉과의 관계를 물어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처음엔 난 그대의 속임수에 속아 사로잡혔고, 다음 발 가르단 하스에선 피차 제대로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선 서로 적으로 인식했었고, 오브리가도에선 워프 비스트에 관해 물었지만, 적지에서 심문을 한 셈이니 제대로 말을 꺼낼 리가 없다. 또 발 가르단 하스에서 만났을 땐 이케가미 의원을 놓고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좋아. 그런데 왜 오르톨랑이지?”
“피에르 라캉이 말했다. 자신이 오르톨랑을 대접했던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와 피에르 라캉은 믿을 수 있는 사이야. 아군이자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동료인 데다가 죽기 바로 직전 그는 나에게 의지해왔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지만, 그것은 온전히 너의 생각이지. 피에르 라캉은 김빈우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좆됐네.’
빈우는 피에르 라캉에게 오르톨랑을 대접받은 기록이 없다. 행여 있다 해도 지금은 잠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일단 아는 만큼만 조심스레 말했다.
“오르톨랑은… 같은 이름의 새를 특별한 방법으로 조리한 요리다. 야행성 새를 잡아 어두운 곳에 가두고, 아니면 눈을 뽑아 활동량을 줄인다. 그런 다음 새에게 먹이를 주어 살을 찌우고, 마지막엔 과일을 발효해 만든 증류주에 담가 익사시킨다. 그러면 비대해진 몸은 술을 가득 머금게 되고, 그것을 요리해 한입 깨물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지.”
어릴 적 아나스타샤와 요리를 하면서 들었던 요리법이다. 하도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빈우의 대답을 듣고 있는 알탄훼아나의 표정은 꽤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빈우가 말한 것은 오르톨랑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피에르 라캉의 독자적인 레시피와는 다를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먹지?”
알탄훼아나의 물음에 빈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등의 백팩에서 위장포를 꺼냈다.
“과거 사람들은 이 요리가 맛있지만 잔인하단 것을 알았어. 그래서 신의 눈으로부터 피한다는 의미로 천으로 머리를 가렸지. 실제로는 사방으로 풍기는 요리의 향을 가둔다는 의미였지만 말이야.”
별다른 반응이 없던 알탄훼아나는 빈우가 위장포를 꺼내자 천천히 다가왔다.
“이 천을 어떻게 쓰는 거지?”
빈우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알탄훼아나가 위장포를 만져보며 질문했다.
“이렇게.”
빈우는 천천히 위장포를 머리 위로 덮어썼다. 그때 사방을 가린 천 아래로 알탄훼아나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앞에서, 그리고 오른쪽에서 동시에.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빈우는 놀랐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빈우의 눈앞에만 있었다.
“역시.”
알탄훼아나가 의미심장한 푸른 눈으로 빈우의 눈을 쳐다본다.
“놀라지 마, 그때도 말했지. 이건 내가 보여준 게 아냐. 그대가 본 것이지. 방금 그대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한 선택의 흔적을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