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그러고 보니 오브리가도의 심문실에서도 이 같은 일이 있었다. 세 곳의 감시 카메라에 동시에 나타난 알탄훼아나는 각각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건 무슨 의미지?”
빈우 역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질문했다.
“서로가 서로의 선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대의 선택에 내가 반응하고, 나의 선택에 그대가 반응한다.”
“이제까지 이런 일은 없었어. 왜 너 하고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중요한 건 그대의 대답에 대한 나의 결정이지.”
그리고 알탄훼아나는 빈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투명한 푸른색 안구 안에는 금색 실타래가 뭉쳐져 일렁이며, 움직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건 피에르 라캉의 오르톨랑이 아냐. 난 진짜를 먹어봤어.”
정곡을 찔린 빈우가 대답한다.
“지금은 모르지. 하지만 내가 배로 올라간다면, 그의 안드로이드에게서 진짜 조리법을 알아낼 수 있어.”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그에게 인정받고, 그것을 대접받았느냐가 중요해.”
곤란해하며 다음 말을 고르던 빈우에게 알탄훼아나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케가미 소이치로의 건으로 빚진 것이 있지. 만일 그때, 그대가 아니었으면 나는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하지 못했을 거야.”
아마 빈우가 플라스마에 휩싸인 다음, 그녀는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를 한 모양이다.
“게다가 방금의 선택에서 일어난 메아리를 보면 나 또한 그대를 허투루 대해선 안 될 모양이다. 그러니 선을 넘지 않는 한, 그대에게만은 대답해 줄 수 있다. 오직 그대에게만.”
그러면서 알탄훼아나는 위장포를 제치며 바깥으로 나갔다.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다행이다. 빈우가 그녀를 인질로 잡고 나머지 샤다이를 죽일 필요는 없어졌다.
-부팀장, 통신을 잠시 끊습니다.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신호를 주십시오.
빈우는 신중하게 질문을 골랐다. 눈앞의 사실부터 시작해서, 워프 비스트에 이르기까지 질문할 것이 많다. 발 가르단 하스의 일도 물어볼 것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씸이 무엇이지?”
빈우의 질문을 들은 알탄훼아나는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음, 방금 뭐라고?”
라출노그의 전열함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고대 샤다이들은 씸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하지만 빈우가 알고 있는 샤다이 단어 중에 씸은 없었다. 아마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고대의 물건이나 의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호민관인 그녀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게다가 이 고대어는 워프 비스트 현상과 꽤 깊은 연관이 있으리란 게 빈우의 추측이었다. 그래서 재차 재촉했다.
“씸, 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지?”
그러나 지금 알탄훼아나의 반응을 본 빈우는 약간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조차 씸에 대해 모른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의 샤다이들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알탄훼아나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어어, 그건 아까 네가 말하지 않았나?”
“말했다고?”
“그래, 넌 말했다. 씸을. 으음, 그것을 무엇으로 번역해야 하지. 몇 가지 뜻이 있는데, 너희들도 자주 쓰잖아?”
“자주 쓴다고? 어떻게?”
“그것이, 우린 쓰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 그리고 너도 방금 그 단어를 말했는데 또 물어보는 것을 보면 뭔가 의미가 잘못 전달된 듯한데….”
그렇게 말한 알탄훼아나는 손으로 무언가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씸이라는 건, 이렇게. 이렇게.”
사각, 직각, 수평, 수직. 그 형태는 무언가의 수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빈우가 영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처럼 보이자, 주변을 둘러보던 알탄훼아나는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거다. 씸은 저것이다.”
알탄훼아나의 손가락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정확해. 씸은 옛말로 계단이다. 뭐야, 알고 있잖아.”
씸, 계단, 씸을 올라간 고대 샤다이들. 계단을 내려온 워프 비스트들.
빈우 속의 허탈함을 경악이 가득 채운다.
“알탄훼아나….”
빈우는 조심스레 단어를 골랐다.
“워프 비스트는… 너희들의 선조인가?”
그 말에 알탄훼아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오브리가도에서 그녀는 워프 비스트가 뭐냐고 묻는 빈우의 질문에 너무 젖은 자, 계단을 내려온 자라고 둘러서 표현했다.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래, 맞아.”
대답한 알탄훼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틀린 워프 비스트 시체들. 갈기갈기 찢긴 샤다이 육편들.
“이 선조들은 옛날 멸망해가는 우리 우주를 버리고 계단을 통해 다른 우주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이 우주로 돌아오고 있어. 그때 만들었던 계단을 통해서.”
다시 고개를 돌려 빈우를 바라보는 알탄훼아나의 시선엔 약간의 경멸감마저 느껴진다.
“헌데 너희 유에네스들은 그 계단을 무서움도 없이 쓰더군. 그 위험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것이 그대의 종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이야.”
알탄훼아나는 고개를 들어 궤도 엘리베이터를 쳐다보았다. 워프 비스트 함선과 싸우는 리퍼 함선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곳은 거기가 아니라 더 위였다.
빈우가 그 위험성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알탄훼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 위험성을 깨달은 이케가미 소이치로가 발 가르단 하스에게 부탁해 계단의 저쪽 너머를 파괴했다지. 그렇기에 그동안 선조들은 내려올 수 없었어. 하지만 그들은 저쪽에서부터 다시 계단을 만들어오고 있다. 부수려면 이케가미 소이치로처럼 해야 해. 너희들처럼 이쪽 계단만을 파괴하는 것은 소용이 없어.”
이케가미 의원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부쉈던 계단이 이토록 빨리 다시 만들어지다니 허망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째 알탄훼아나가 계단이라고 말한 단어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잠깐. 씸에, 계단이란 단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나?”
“의미라? 그래. 계단이란 단어는 시대에 따라 지칭하는 게 달라졌다. 원시 시절의 우리 샤다이들은 저것을 씸이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지.”
그녀가 가리킨 곳은 아까 예를 들었던 계단이었다. 물리적인 높이를 가진 건축물.
“허나 우리가 힘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저런 계단을 쓸 일이 없어졌지. 그때부터 계단은 위로 올라가는 구조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어. 그리고 선조들은 저것을, 아니 저 위치에 있던 것을….”
이번에 알탄훼아나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사라진 곳 끝, 점프 게이트가 있는 장소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저기에 있던 것 또한 옛말로 씸, 너희의 단어로 계단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말에 빈우는 저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질문했다. 확인을 위해서.
“그렇다면 씸이라고 하는, 계단이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 중에 혹시 점프 게이트도 포함된 건가?”
“점프? 어, 뛰는 것? 이렇게?”
그러면서 알탄훼아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보였다.
“아니. 비슷하지만 달라, 그것은….”
“알탄훼아나. 말 끊어서 미안해. 우리 종족은 인공위성을 놓고 공간 이동할 때 쓰는 것을 점프 게이트라고 한다. 그것도 씸인건가?”
“으음, 그렇지. 그것이 뛰는 문? 점프 게이트? 라고 한다면 씸이 맞다. 계단이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너희들은 옆으로 가기 위해 쓰더군. 함부로 계단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방금 말했었지? 너희들은 젖어버려. 계단을 쓰면 쓸수록 거기서 내려오는 자들에게 젖어버린다고.”
빈우의 머릿속을 다시금 경악이 채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방이 사용하고 있는 점프 게이트란 사실은 고대 샤다이가 만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워프 비스트들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빈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다시 회전시켰다.
“너는 워프 비스트를 젖어버린 자, 혹은 계단을 내려온 자라고 했었지.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야?”
“그것은 같은 동시에 전혀 다른 의미다. 계단을 내려온 자는 이 우주로 다시 떨어져 돌아온 우리 선조를 말하는 것이고, 젖어버린 자는 그들에게 몸을 빼앗긴 종족을 의미한다.”
알탄훼아나는 돌아서서 바닥에 떨어진 워프 비스트의 사체를 주워들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외계종족이 변한 워프 비스트다.
“과거 선조들은 다음 차원의 우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만들었고, 그것을 타고 올라갔다고 말했지. 그때 육신은 분해돼.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변한다. 별 심장의 불길로, 현자 발 가르단 하스처럼. 음, 피에르 라캉은 이것을 육신을 전자정보로 변형? 그, 상전이 시켰다고 했어. 그렇게 변한 선조들은 계단을 타고 올라갔고, 그 외에 남은 선조들은 이 우주와 함께 살아가고자 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워프 비스트의 얼굴을 알탄훼아나는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빈우는 질문했다.
“그런데 그 선조들은 왜 지금 돌아오는 것이지? 그리고 왜 워프 비스트 같은 괴물의 형태로 돌아오는 거야?”
“모든 선조들이 올라가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었어. 올라가는 데 실패한 선조들은 계단에서 방황했고, 다시금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바뀐 몸으로 이 우주에 존재하긴 힘들었어. 아무리 우리 샤다이라 해도 별 심장의 불길로 된 육신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신의 정보로 다른 종족을 적신다는 것이었다. 계단으로 들어오는 종족을.”
알탄훼아나는 손을 들어 궤도 엘리베이터 끝, 점프 게이트가-샤다이 말로는 계단이-있던 곳을 가리켰다. 빈우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샤다이는 위로 오르기 위해 썼지만, 다른 종족들은 옆으로 썼단 말인가.’
그녀가 말한 옆으로, 란 의미는 아마도 같은 우주에서 공간이동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미뤄보면, 씸이란 단어가 사어가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스스로 공중부양과 공간이동의 능력이 있는 샤다이들에게 계단 따윈 불필요할 것이고, 선조들이 뒤틀려서 내려오는 점프 게이트는 쓸모없는 데다가 불길한 것이겠지.
알탄훼아나의 설명이 이어진다.
“계단을 사용하는 자들이 선조들의 정보에 몸이 일정이상 젖어버리게 된다면, 몸 안에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생긴다. 그렇게 계단이 완성되면 선조들은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게 되고, 결국 젖어버린 자들은 몸을 빼앗기게 돼. 바로 이들처럼.”
빈우는 알탄훼아나가 들고 있는 워프 비스트의 사체를 보며 냉동 질소를 원샷한 것만 같은 한기를 느꼈다. 점프 항법은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그것이 있었기에 인류는 이렇게 발전했고,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점프를 하고 있다. 헌데 그것이 샤다이에게 몸을 빼앗기고, 워프 비스트가 되는 방법이라니. 위장 속으로 오한이 든다.
“그렇기에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대단한 것이다. 별 심장의 불길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몸 안에 계단을 열어달라고 했고,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계단을 부쉈다. 자신의 몸을 빼앗은 선조들에게 저항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계단을 부쉈다. 그가 발 가르단 하스로 간 이유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이고, 다른 누구에게 알리지 못하고 홀로 간 것은 아마도 이미 연방의 상층부에 인간의 몸을 빼앗은 샤다이들이 다수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인류가 워프 비스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점프 항법을 금지한다면? 행성 단위로 분리된 인류는 붕괴한다. 워프 비스트을 제대로 막으려면 어떻게든 계단을 부숴야 한다. 이케가미 소이치로처럼.
“잠깐, 이케가미 전 상원의장이 발 가르단 하스에게 부탁해 계단을 부쉈어. 그런데 그게 벌써 고쳐진 것인가?”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완전히 고쳐진 것이 아니야.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거지.”
알탄훼아나는 워프 비스트의 사체를 내밀어 보인다. 뉴 소노라를 침공한 녀석들이다. 이것들은 처음 보는 외계종족이 변이한 워프 비스트다.
“이 불쌍한 종족은 너희 유에네스 이전에 계단을 쓰다가 젖어버린 자들이다. 결국 종족 전체가 계단을 내려온 자들로 되어버렸지. 하지만 이것은 실패야. 몸을 빼앗은 선조들은 이성을 잃은 괴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계단 안에서 떠돌며 계단을 내려오는 선조들의 첨병이 되었지.”
알탄훼아나의 손끝이 머리 위를 향한다. 점프 게이트가 있는 쪽을.
“원래 이들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소동이 커지니까. 그러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계단에 숨어있던 선조들이 그만큼 급박하단 의미지. 저쪽의 계단이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이들을 보낸 것이다. 계단을 이쪽에서 만들기 위해.”
이건 중요한 내용이다. 아까 지하 창고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워프 비스트로 변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부서진 계단을 대신해 이쪽에서 다시 만들었다는 의미다.
“계단을 이쪽에서 만든다고? 어떻게?”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의 시선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