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실처럼 가늘게 뽑힌 플라스마가 여러 가닥으로 뻗어 나와 티모시 1078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육체를 고온으로 분해해 들어간 것이다. 바깥으로 열을 발산하지 않는 플라스마지만 육체와 접촉하자 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말단부 신경계부터 차례차례 잠식해 나갔다.
비명은 없었다. 그저 폐에 있던 공기들이 폭발하듯 입 밖으로 터져 나왔을 뿐이다. 헉헉거리고, 컥컥거리고, 이어서 침이 입을 흐른다. 고개를 홱홱 돌리다가 팔다리를 버둥대며 발작한다. 산채로 신경계가 분해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빈우는 아이의 몸을 놓치지 않았다.
빈우는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아이 또래였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고향에서 동생들과 보리 농장에서 놀았을 것이다. 놀고,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나스타샤가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아나스타샤가 있어서 행복했다. 가족이 있어서 행복했다.
또한 빈우에게 있어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에게 이상한 속옷을 사주고, 껴안고 침대로 넘어지고, 군에 지원한 것도 이 나이대였다.
돌이켜 보면 행복한 추억들이다.
하지만 티모시 1078에게 있어 삶은 차라리 포기할 정도로 힘든 것이었다. 왜 이 아이는 이렇게 살아야 했을까. 왜 장애를 안고 태어나야 했고, 치료도 받지 못했고, 부모를 잃어버리고, 동생과 둘이서 하루하루 고통에 겨워 살았을까.
“오빠아아아!”
그때 혀짧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티모시 1079가, 눈앞에서 타 죽어가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 아이를 맡아 준다던 여자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줄행랑쳤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눈앞의 사태에 놀라 저 멀리 도망쳤다.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이곳을 쳐다볼 뿐이다.
“오빠 아프지마아아.”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누가 이 아이를 데려가 주세요.”
아이의 눈에 가족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여줄 수는 없다. 빈우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누가, 누가 저 아이의 눈을 가려주세요.”
그러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숨죽인 채 침묵했다.
도움의 손길을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이 산채로 타죽는 광경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엄마아아아.’
눈앞에서 엄마가 죽어가던 광경이 떠오른다. 샤프트에 끼어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엄마를 보며 빈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티모시 1079처럼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 불쌍한 아이는 오빠를 잃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때 빈우에게 환상이 보였다. 환청 또한 들린다. 자신의 주변을 감싼 존재들을 느꼈다.
‘조심해라, 김빈우. 정신을 붙잡아라.’
알탄훼아나의 말이 보인다. 그녀의 얼굴이 들린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다른 감각들도 서로 뒤죽박죽 섞여 무언가 다른 감각이 되었다.
‘뭐지 이건.’
‘그대도 느껴지는가. 설마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했던 영향인가. 아니면 나와 선택을 나누는 자라서 같이 느끼는 것인가.’
발 가르단 하스 때와 비슷하게 머릿속으로 알탄훼아나의 말이 직접 느껴진다.
빈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있는 것은 자신과 티모시 1078, 알탄훼아나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지하 대피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티모시 1078의 안쪽에서 무언가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그것이 선조들의 계단이다.’
‘이것이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그것은 계단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닦개였다. 바깥에서 돌아왔을 때 신발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기 위한 두텁고 질긴 천.
그러나 그 천을 만든 실이 문제다. 놈들은 인간의 마음, 부서진 마음의 틈에서 실을 뽑아낸다. 찢어진 마음의 조각으로 실을 잣는다. 그렇게 인간의 공포를 씨실로, 고통을 날실로 삼아 천을 직조한다. 악의로 만든 베틀에 적의로 가득한 북이 날아간다. 그렇게 천이 짜이면 그것이 발 받침이 되어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된다. 고대 샤다이들의 정보로 적셔진 육체에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완성되면, 인간의 자아가 사라지고, 놈들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그대에겐 이렇게 느껴지는가. 하긴 이것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계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편의에 의한 것이고, 지금 그대가 보는 것은 그대의 심상에 반영된 형상이겠지.’
알탄훼아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실을 따라간다. 실을 잡고 거꾸로 훑을 때마다 그녀 또한 공포와 고통에 휩싸였다. 알탄훼아나는 휘청거리면서도 베틀을 잡았다. 그리고 그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베틀과 북에 몸이 짓이겨지며 그녀는 선조들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빠, 오빠. 오빠아아아!”
아이의 울음소리에 빈우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손안에 있는 티모시 1078은 산채로 분해되고 있었다. 신경계만이 플라스마로 교체되어 남아있을 뿐 몸의 대부분은 이미 증발했다. 노란색 플라스마로 일렁거리는 인간의 신경계는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으윽-”
알탄훼아나가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그리고 티모시 1078의 신경계였던 플라스마는 허공에서 사라졌다. 빈우의 손안에 남아있던 소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알탄훼아나.”
빈우가 달려가 그녀를 부축한다. 안아 든 알탄훼아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혀있다. 마치 발 가르단 하스에서의 이케가미 소이치로처럼.
“김빈우. 성공이다. 계단을 파괴했다. 이제 선조들은 내려오지 못해. 당분간은.”
“그런가. 다시 재발할 가능성은?”
“오늘처럼? 저쪽에서 계단을 만들고 이쪽에 마지막 발판을 만드는 방법을 다시? 글쎄, 쉽진 않을 거야. 유에네스를 대량으로 납치해서 고문하고 겁박해 그들의 마음을 부수려면, 실제 육체를 가진 자들이 필요하지. 하지만 오늘 실패한 존재들을 많이 잃었다. 또 두 번이나 무너진 저쪽의 계단을 다시 세우려면 꽤 시간이 걸릴 거야.”
한숨 돌린 빈우는 지친 그녀를 눕힌 다음, 티모시 1079에게로 다가갔다.
“아아아! 아아악!”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던 세 살배기 여자아이는 다가오는 장갑복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넘어져 바닥에 구른다. 자기를 안아주려는 빈우의 모습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그 눈마저 가린다.
“오빠! 오빠, 오빠! 오빠아아아. 나 아파. 나 아파.”
여동생은 사라져버린 오빠에게 도움을 구한다. 닿을 리 없는 구원요청이다. 빈우는 오빠의 죽음을 보고 우는 여동생에게 다가가 안아서 들어 올렸다.
“아아앙, 놔줘요. 놔줘요, 오빠아아.”
아이는 빈우의 품 안에서 손과 발로 그를 밀고 내려오려고 한다. 이래선 안 된다. 누가 이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빈우가 고개를 돌려 피난민들을 향했다.
“누가 이 아이를 잠시 동안 맡아 주실 분 안 계십니까? 전투가 끝나면 데리러 오겠습니다.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그때 저기서 한 여자가 달려왔다. 아까 빈우가 티모시 1079를 맡겼던 여자다. 겁에 질려 아이를 팽개치고 도망갔지만, 지금 다시 아이를 맡으려고 달려와 주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너무 무서워서….”
“괜찮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는 티모시 1079를 받아서 들어 어르고 달랬다.
“아가, 아가. 괜찮아. 이제 괜찮아.”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어루만져도 티모시 1079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치지 않겠지. 그리고 오늘 일은 언제까지고 눈앞에 남아있을 것이다.
메마른 눈으로 그 광경을 보던 빈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알탄훼아나. 이제 이것으로 오늘 너의 목적은 이룬 것인가?”
“그래. 이루었다. 선조의 귀환을 막았다. 도움에 감사한다.”
둘 다 지친 목소리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그럼 마무리를 지어야지.”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바깥에는 워프 비스트들이 득시글대고 있다.
“그래, 실패한 자들을 몰아내야 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도록.”
힘겹게 일어나는 샤다이를 인간이 부축해 준다. 둘이 걸어가자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길을 만든다. 그런 그들을 향해 빈우가 약속한다.
“바깥이 안전해지면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빈우와 알탄훼아나는 겁에 질린 시민들을 뒤로한 채 지하 대피소를 나섰다. 대피소의 문을 닫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알탄훼아나가 부아가 치미는 얼굴로 불평을 터트렸다.
“김빈우. 그대는 왜 저런 자들을 지키는 것이냐.”
뜬금없는 질문에 빈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냐니. 난 군인이야. 연방의 시민들을 지키는 게 내 의무다.”
그런 빈우를 바라보는 알탄훼아나의 눈에는 측은함과 한심함이 뒤섞여있다.
“저들의 추악한 본성을 못 보았나? 그대가 지켜야 할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냔 말이다.”
“추악해? 저들이?”
“방금 보지 않았더냐. 자기들을 지키러 온 그대를 어찌 대하던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어린 자는 또 어찌 대했고? 그러다가 무서운 모습을 보고선 다시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라니. 한심하다.”
어찌 보면 알탄훼아나의 반응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강자의 입장에 서 있으니까 그러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빈우는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강자에게 숙이고, 약자를 짓밟는 것이 한심한가?”
“당연하지.”
“그래. 그래서 나 같은 자들이 있는 것 아니냐. 한심하지 않도록 약자를 지켜주는 존재가.”
“읏, 그렇다 한들 그런 대접을 받고도,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괜찮은가?”
빈우는 지금까지 죽자고 싸워왔던 샤다이에게 오히려 걱정을 받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뭐, 섭섭하지. 가끔 억울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군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외적으로부터 연방을 지키기 위해 택한 길이지. 그러니까 대접이 어떤가는 상관없어. 아주 없진 않지만, 그래도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름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알탄훼아나는 뚱한 표정이다. 아마 그녀에겐 원하던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괜찮지 않은 것은 방금 티모시 1078의 죽음 같은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시민들. 필사적으로 발악해도 손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들. 주변에서 빈우를 얼마든지 조롱하고 모욕해도 상관없었다. 익숙하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무력함에 사람들이 죽는 것이었다. 이건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서두르자.”
마음을 다잡은 빈우가 걸음을 빨리해 앞장섰다.
“그, 그렇지.”
그 모습에 알탄훼아나도 바닥에 발을 붙이고 따라 걸었다.
“날지 않나?”
“조금 지쳐서.”
둘은 서둘러 각자의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궤도 상의 전투는 리퍼 전투함과 지원 온 42 전단의 순양함들 덕에 쉽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지상의 워프 비스트만 처리하면 오늘의 일은 마무리된다.
태스크 포스 373의 지상팀과 알탄훼아나의 호위병들이 임시로 협동전선을 벌인 곳은 의외로 조용했다. 수많은 워프 비스트들의 시체가 쌓여있다. 코일건과 미사일에 터져 죽은 놈들, 고온의 플라스마에 증발하다 남은 조각들.
“벌써 끝났나?”
호위병들과 합류한 알탄훼아나가 주변들 돌아본다. 그들은 호민관과 같이 온 빈우를 보고 경계는 했지만 적의를 보내진 않았다.
“아니.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어.”
팀원들과 우지로부터 시가지 상황을 공유받은 빈우가 알탄훼아나에게 알려준다.
“기다린다고?”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샤다이들은 정보전에서 편차가 크다. 어떤 점에선 연방을 아득히 초월하지만, 또 어떤 점에선 걸음마 수준이다.
“그래. 궤도 상은 정리가 되었는데 지상은 아직 덜 끝났군.”
빈우의 말대로 뉴 소노라의 궤도는 거의 정리가 되었다. 리퍼 전투함과 42 전단, 그리고 블랙 랜스의 절묘한 협동에 워프 비스트들은 손도 못 쓰고 당했다. 놈들의 강력한 플라스마 공격은 중간에서 리퍼들이 막아주었고, 플라스마에만 방어력을 지닌 생체 전함들은 42 전단의 질량탄 공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지상전이 언제나 좆같아. 질질 끌거든.”
빈우의 설명에 373 지상팀들이 자조하며 키득거린다. 지상에 숨어든 잔당 소탕에는 궤도포격이 직빵이지만, 이런 유인 행성에서는 꿈도 못 꾼다. 마지막 한 마리를 조질 때까진 지상 병력으로 샅샅이 훑는 수밖에 없다.
-어, 이것들 쫄아서 안 오는 걸까요?
옥상 위에서는 파트리샤가 레일건을 저격 모드로 해서 놈들의 전선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빈우에게 영상을 공유한다.
-팀장님, 뭐해요?
그녀의 재촉에 빈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 지하 대피소로 갈 때는 혹시나 해서 통신을 끊어놓고 갔었다. 더러운 일이라면 빈우 혼자서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더러운 일이 있었다. 그것을 팀원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걱정하던 차에 파트리샤가 훅 들어왔다.
-음, 이 새끼들 짐승 같긴 한데, 머리가 없지는 않았잖아?
-그렇죠.
-암만 봐도 이쪽을 노리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데 말이야.
-에이, 그거야 보면 알죠. 근데 저 정도 병력이면 우리하고 저 불편한 동맹군한테 녹을 건데요. 지금 제우권도 우리가 먹었으니까 우지 불러서 쓸어버리라고 하는 게 어때요?
하긴 롱소드 불러서 대가리 위부터 조지면 접근전만 하는 워프 비스트 놈들은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