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근데 좀 불길하시다? 저 새끼들 뭔가 기다리고 있어. 지원군이라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명령받고 대기하는 건가?
빈우의 예사롭지 않은 예측을 들은 팀원들은 즉시 시발거리기 시작했다. 팀장의 예언은 이전부터 잘 맞는 편이었다. 좋든 나쁘든.
-기다려봐. 내가 그쪽을 잘 알고 있는 사람하고 안면을 텄어. 물어볼게.
그리고 빈우는 안면을 튼 사람을 불렀다.
“어이, 집정관.”
“호민관이다!”
슬쩍 떠본 빈우의 호명에 알탄훼아나가 버럭 화를 냈다. 이건 또 나름 중요한 정보다. 인류와 다른 종족인 샤다이가 호민관과 집정관에 대응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닮은 게 겉모습뿐만이 아니란 의미다. 그리고 또 방금의 과민 반응에는 뭔가가 있다.
“으음. 집정관이나 호민관은 둘 다 우리 인류에게 있어 과거 직책인데, 왜 그리 화를 내지?”
상대가 참과 거짓을 구분한다면 진실만을 가지고 속이면 된다. 분을 삭인 알탄훼아나가 조곤조곤 설명을 한다.
“호민관이란 시민들을 대표하여 이끄는 자이고, 집정관이란 귀족의 수장으로-”
“아니, 그건 아는데 왜 그리 화를 내는 거냐고.”
설명을 중간에 끊긴 알탄훼아나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끊겨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대답이 궁해졌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같은 집합에 있는 것끼리 묶어서 물어보면 된다. 먼저 싫어하는 것 둘.
“혹시 그대가 선친이라 부르는 아버지가 집정관인 건가?”
달리 대답하지 않아도 표정과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호칭을 틀리게 부른 것을 사과하지.”
한번 치면 한번 빠져야 하는 법. 그러나 빈우의 사과에 알탄훼아나는 푸른 눈으로 이쪽을 지그시 쳐다볼 뿐이다.
“왜 그래? 나 뭐 잘못했나?”
“그대가 또 무슨 수작질을 하는 것 같아서.”
근거 있는 추궁에 빈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집정관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았다.
“아까 이케가미 의원의 일로 빚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서로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적을 보는 중요한 상대라면서, 선을 넘지 않는 한 알려줄 수 있다고 했잖아.”
그때 알탄훼아나가 빈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번 일은 선을 넘는 것이다. 이 이상은 알려줄 수 없어.”
그녀의 거절에 빈우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이왕 연을 맺었으면 뿌리까지 쪽쪽 빨아먹어야 한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하다 중단된 화제로 다시 돌렸다.
“그럼 이야기를 되돌리지. 저 실패한 선조라고 했나? 저 워프 비스트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그런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그야 제 명령을 기다리고 있지요, 김빈우 중대장.”
빈우와 알탄훼아나의 삼각점을 이루는 곳에 젊은 샤다이 남성이 말하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다. 그를 본 알탄훼아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체메트디오프 집정관!”
이름을 불린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알탄훼아나 호민관. 나의 딸.”
이자가 바로 샤다이의 집정관이자, 알탄훼아나로부터 증오에 가까운 적의를 받고 있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호위병들마저 체메트디오프라 불린 샤다이에게 무기를 겨누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으음? 왜들 그러십니까. 제가 여기에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체메트디오프는 주변의 소란을 진정시키려는 듯 자중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서로 간의 반응으로 보아 이것은 홀로그램 같은 일종의 통신수단 같아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탄훼아나, 현자 발 가르단 하스로부터 계단을 부수는 방법을 배우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당신에게 축하받을 일은 없어.”
아버지의 다정한 축하에 딸은 매몰차게 답했다. 그러건 말건 집정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호민관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여기 있는 김빈우의 덕이 크겠지요. 아니면 피에르 라캉? 그도 아니면 이케가미 소이치로?”
샤다이의 집정관은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는 이번엔 빈우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 친근하게.
“이런,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김빈우 중대장.”
그러나 빈우는 이자를 만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샤다이가 아는 척을 한다면, 또한 중대장이라 부른다면 짚이는 것은 있다. 바로 포말하우트 게이트다. 울토르 중대는 포말하우트 게이트의 점프 공간 안에서 리퍼들에게 습격을 당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은 빈우에게 없다.
일단 빈우는 떠보듯이 대답했다.
“포말하우트에선 신세 졌소.”
“그야 피차 마찬가지지요.”
확실하다. 저 체메트디오프란 샤다이 집정관이 바로 포말하우트 게이트에서 울토르 중대를 습격한 자였다. 그러나 사건의 원흉을 만났어도, 빈우 머릿속에 있는 트리니티 패턴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빈우를 바라보는 알탄훼아나의 시선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자와 아는 사이라는 그럴 수밖에.
“예전에. 그리 좋은 만남은 아니었지.”
빈우는 사태가 엇나가지 않도록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알탄훼아나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생각보다 두 사람의 골이 꽤 깊은 것 같다.
“전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탄훼아나. 서로의 관계는 좋고 싫고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생겨나야 합니다. 지금 당신과 김 소령의 관계 또한 그런 것이지요.”
“당신은 닥쳐. 그 필요란 것이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 아니던가.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아버지 쪽의 골은 깊어 보이진 않지만 딸 쪽이 혼자서 두 배는 족히 파고 있는 모양이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딸로부터 축객령을 받은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시 뵙지요.”
체메트디오프는 빈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부팀장 아룹의 통신이 들어왔다.
-팀장님. 워프 비스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쪽을 향해 몰려옵니다.
“호민관, 너희들의 실패한 선조들이 다시 덤빈단다. 준비해.”
빈우가 경고했지만 샤다이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때 갑자기 알탄훼아나의 호위병이 고함을 질렀다.
“호민관, 함대들이! 함대들이 들어옵니다. 집정관의 함대입니다.”
그들 반응으로 봐서 집정관의 다시, 라는 관점은 일반 샤다이들과 꽤 다른 듯했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알탄훼아나는 이를 악물고 위를 쳐다보았고, 빈우도 그 시선을 따랐다. 그런 그에게 궤도 상의 블랜 랜스로부터 경고 통신이 들어온다.
-팀장님, 지금 샤다이들의 점프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퍼 전투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24척. 모두 리퍼 전투함으로, 저 정도 수라면 뉴 소노라 따위는 순식간에 녹여 유리구슬로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주변에는 워프 비스트 함선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를 보아 뉴 소노라를 침공한 워프 비스트는, 샤다이의 집정관과 모종의 협력관계에 있는 것 같았다.
“네 이놈! 체메트디오프!”
알탄훼아나의 증오 어린 시선이 방금 나타난 리퍼 전투함들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다. 헌데 그 전투함들의 함체에 새겨진 문양은 빈우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울토르 중대 시절 빈우의 어벤져 전투복과 솔리드 베타에서 회수한 기록에 있던 리퍼 전투함의 문양과 같았다.
즉 지금 모습을 드러낸 함선들은, 포말하우트 게이트에서 울토르 중대의 솔리드 베타를 공격한 함과 같은 세력이란 뜻이다. 방금 체메트디오프와의 대화에 따르면 아예 동일한 함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42 전단의 분함대로부터도 통신이 왔다.
-김 팀장! 타이런트입니다. 현재 궤도 상으로 샤다이의 대규모 점프가 감지되었습니다. 이건…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부장인 AI 펑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뉴 소노라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샤다이 함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열함과 모니터함을 비롯해서 리퍼 전투함, 그리고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샤다이 함선들까지. 수십 단위로 계속해서 점프해오고 있다.
-오 시발.
백, 이백을 넘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숫자에, 워프 비스트들과 싸우고 있는 부팀장 아룹이 허탈한 탄식을 터트렸다. 아까의 워프 비스트 함대들이 애교로 보일 지경이다.
“이봐 호민관, 이거 설명이 필요한데?”
빈우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알탄훼아나 호민관은 지금 겁에 질려있었다.
“서, 설마?”
당황해하는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리기가 무섭게 샤다이들의 함선들은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그만둬!”
알탄훼아나가 비명을 질렀다. 수백 척은 넘는 샤다이 함대가 엉망으로 뒤섞인 채 전투를 벌인다. 엄청난 규모의 플라스마 함포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딱히 서로에게 유효한 피해는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샤다이들은 서로 맞부딪혀 가며 치열하게 난전한다.
“나, 나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었다.”
“무슨 일이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빈우가 다급하게 물어보지만 알탄훼아나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오열할 뿐이었다. 대답은 옆에 있던 호위병의 수장인 펠훼단이 대신해주었다.
“우리 종족의 파벌들이… 마침내 싸움을 시작했다.”
“설마 파벌이란 게 선조 귀환 찬성파와 반대파 말하는 거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펠훼단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동포의 추태를 적에게 보이는 격이니 당연하겠지.
“그런데 여기서 왜? 다른 곳을 놔두고 굳이 왜 여기서?”
그때 눈물을 닦아낸 알탄훼아나가 이를 악물고 답했다.
“내가 계단을 부쉈기 때문이다. 내가 발 가르단 하스로부터 계단을 부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 알려지자, 두 파벌의 대립은 극심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귀환의 찬성파와 반대파가 맞서고 있을 때, 반대파에서 귀환을 막는 방법을 알아냈다면 찬성파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가증스러운…. 애초에 실패한 선조들이 이곳으로 온 것도 집정관의 술책임이 분명해. 내가 계단을 부수도록 오늘의 일을 꾸미고, 각 파벌들에게 연락을 넣어 이곳에 모이도록 했을 것이다. 그들이 계단이 부서지는 광경을 직접 보도록 말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집정관은 워프 비스트들을 뉴 소노라에 침공하게 한 뒤 호민관 세력을 유인했고, 은밀히 동족들을 불러 계단이 부서지는 걸 보게 해 분란을 일으키는 계략을 세웠단 거였다.
“그런데 왜? 왜 하필 뉴 소노라이고, 왜 동족끼리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지?”
빈우의 질문에 대꾸는 없었다. 다만 충고가 돌아왔다.
“어서 이곳을 떠나라. 잠시나마 같이 싸웠던 그대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내가 연락을 하면 우리 세력은 그대들을 공격하지 않을 터. 우리 종족의 추한 싸움에 그대들이 말려들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넙죽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빈우는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다. 한 가지 위화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다가 싹을 틔웠다.
“아니, 알탄훼아나 잠깐. 그런데 집정관의 계책이 설마 이걸로 끝인가?”
“무슨 의미지?”
“저 싸움을 봐라. 저게 진정 싸움이라 부를만한 것일까?”
궤도 상의 샤다이 간 전투는 치열한 만큼 지리멸렬했다. 대형 따윈 없이 자기들 가문끼리 뭉쳐서 포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사된 포격은 중간에서 사라진다. 맞부딪힌 함선에서 스팸들이 튀어나와 우격다짐으로 맞붙고 있다.
덕분에 42 전단 분함대와 블랙 랜스는 무사히 빠져나와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대들 유에네스의 관점으로 보기에, 우리의 전투 실력은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서로 유효타가 없어. 너희들의 주 무기는 플라스마, 별 심장의 불길이다. 동시에 너희들은 플라스마에 대해 엄청난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지.”
빈우의 설명에 알탄훼아나의 눈빛이 이채를 띤다.
“싸움을 하게 했다면 서로 죽고 다쳐야 해. 너희들의 집정관이 아무도 다치지 않을 전투를 벌일 사람이야? 반대 파벌들을 여기서 모이게 한 다음 투닥거리게 해서 화해를 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일까?”
“그렇다면 다른 계책이 있단 말인가?”
빈우가 알탄훼아나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 워프 비스트들에게 공격받으며 점프해 들어왔다가, 알탄훼아나와 42 전단의 합동 공격에 격침당한 샤다이 함선들이다.
“저 흔적들을 봐라. 반물질에 당한 것이다.”
격침당한 함체에는 깨끗이 잘려나간 흔적들이 있었다. 물질소멸, 쌍소멸에 의한 흔적이다.
그것을 본 알탄훼아나는 자신이 깨달은 사실에 경악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서, 설마.”
“그래. 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들의 집정관은 두 파벌을 한 곳에 불러모아 싸움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죽게 만들겠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정답은 바로 공개되었다. 이번에는 비홀더 전단의 그리폰 순양함들이 샤다이 대함대를 둘러싸듯 점프해 들어온 것이다. 오백 척은 족히 넘는 샤다이들의 아비규환 바깥으로, 스무 척이 안 되는 지구제국의 함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결과는 명확했다. 샤다이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소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다이들의 공격은 안쪽뿐만이 아니라 바깥쪽으로도 쏘아졌다.
“개판 오 분 전이네.”
궤도 상에서 난무하는 포격을 본 빈우의 정직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