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비홀더 1전대의 기함인 돌격형 순양함 그리폰의 격납고에서, 전대장인 이 섬은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카이사르급이라, 노골적인 이름인데.”
1 전대장은 상대편의, 한때 전우였던 자들의 전함을 보았다. 카이사르급이라 불린 저 전함들은 기존의 그리폰 급들에서 한층 전투력을 강화한 전함들이다. 원래 설계상으론 그래야 했을 것이다.
“1번 함 율리우스 카이사르, 3번 함 이성계, 7번 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름에 담긴 염원만큼은 대단하군.”
비웃고 있는 전대장의 옆에서 낭소로호가 거들었다.
“얼마나 허기가 졌으면 익지도 않은 밥솥을 열었을까요?”
재미있는 비유다. 카이사르급은 언젠가는 자신들, 비홀더 전대에게 주어질 전함들이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는 자들에겐 계도가 필요하다.
“오늘 제법 손맛 좀 보겠습니다?”
요시오는 간만에 호적수라 불릴 자들과 싸우게 되었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우주에서 비홀더 전대와 싸울 수 있는 존재들은, 같은 비홀더 전대밖에 없기 때문이다.
루비콘 라인 바깥으로 나간 17개의 비홀더 전대 중 남은 것은 현재 12개 전대. 둘은 연이은 전투에 수가 줄어 다른 전대에 합쳐졌고, 둘은 불미스러운 일로 숙청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13전대다.
13전대는 더 이상 죽일만한 종족이 없자-죽일 만한 기분이 들 만한 종족은 이미 다 죽였으니-스스로 적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먹잇감을 찾아 헤매던 이들은 과거 우주를 호령했던 종족인 샤다이의 선조들을 쫓아 금지된 계단을 올라갔고, 그 후 이 우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른 전대들은 황제의 명을 어긴 자들에게 당연한 벌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마 전, 13전대는 이 우주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구로 귀환하자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귀환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일에는 시기가 있는 법. 다른 전대들은 13전대의 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무시하거나 거절했다.
하지만 13전대가 카이사르급들로 구성된 귀환 함대를 미리 건조하기 시작하자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1전대가 이 자리에 선 것이다.
“흐음, 13전대는 오늘 화력시험을 한다고 합니다만?”
낭소로호 중위가 사전에 받은 연락을 다시 훑어보며 비웃고 있었다.
“가당찮은 짓거리를.”
이 섬에겐 코웃음 칠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얼마 전부터 샤다이들이 이 행성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정보는 다른 전대의 귀에도 들어갔다. 온 우주에 흩어져 숨어 살던 놈들을 한곳에서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다는 정보는 꽤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섬은 딱히 나서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정보가 노골적으로 쉽게 들어오면 필시 뒤가 구린 법이다. 하지만 13전대가 나선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다른 전대에게는 나서지 말라고 한 후, 오늘 1전대가 13전대를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이 섬에게 낭소로호의 말이 들려온다.
“전대장님. 13전대에서 통신이 들어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연결해.”
격납고에 홀로그램이 뜬다. 한 사내의 영상, 13전대장 아흐메드 후세인 대령이다.
-오랜만일세. 이 준위.
“여러모로 오래간만입니다. 대령님.”
잠시 이쪽의 기색을 살피던 후세인 전대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네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나의 대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고 봐도 되겠는가?
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달리 반대 의사가 없자 13 전대장은 설명을 계속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루비콘 라인 바깥으로 떠난 것은 인류를 위해서였다네.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종족을 처단해, 그 앞길을 안전하게 밝혀주는 것이지. 허나 이제 우리 앞에 위협이 남아있던가? 있다면 눈앞에 있는 쓰레기들뿐, 오늘 저것들을 쓸어버리고 지구로 귀환해 황제를 다시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러나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섬이 그 말을 끊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고작 저 낙오자들의 사생아 따위를 죽이고자 귀환 함대를 만들었단 말이냐?”
1 전대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요점만 간단히 말했다.
“반역자들을 죽여라!”
그리폰의 격납고는 전대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지구제국의 어썰트급 장갑복들이 저마다의 무장을 하늘로 휘두른다. 그렇게 통신이 끊기고 비홀더 1전대와 13전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대장님, 저들은 어쩌실 겁니까?”
낭소로호 중위가 가리킨 것은 비홀더 전대 사이에서 졸렬하게 싸워대는 샤다이들이었다. 서로에게 통하지 않는 무장으로 죽어라 싸워대는 꼴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싸우다 보면 알아서 죽겠지.”
호적수를 만난 지금의 그에겐 눈에 안 차는 대상들이다. 내버려 둬도 비홀더 전대끼리의 싸움에 끼이면 저절로 스러질 버러지들에 불과하다.
오늘의 무대를 꾸민 집정관 체메트디오프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조차도 굳이 찾아가 죽일 필요는 없다. 죽음이란 개념이 희미한 놈을 족쳐봐야 시간 낭비다. 더구나 지금으로선 눈앞에 놓인 13전대만큼 중요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허면 또 저들은?”
이번에 낭소로호의 손가락은 행성 궤도에서 방어진형을 편 연방 함대들로 향했다. 그가 가리키는 대상엔 뒤에 있는 자치 행성도 포함될 터였다. 저 빈약한 연방의 전투함들은,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해 자신과 행성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반역자들일세. 저따위 것들에게 신경 쓰지 말게.”
“따르겠습니다.”
중위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쌍방 간의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반물질 어뢰들이 날아가다 사선에 끼어든 샤다이들에게 명중한다. 이 재수 없는 놈들은 맞자마자 빛과 함께 사라졌고, 그 사이를 비집고 중력 쐐기들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쏘아져 간다.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제국의 병사들이 날아서 쇄도한다.
이제까지 적을 꿰뚫었던 창이 오늘은 튕겨 나간다. 지금까지 적의 공격을 막았던 방패가 손쉽게 뚫리고 있다. 같은 기술력, 같은 전투기술을 가졌기에 싸움은 호각세를 보인다.
그리폰이 타키온 감속기를 작동시키자, 갑자기 감속되어 현재 시간대에 광속으로 존재하게 된 허수 질량 입자는 주변의 질량과 맹렬하게 반응해 중력붕괴를 일으켰다. 카이사르급 1번 함 카이사르의 1차 장갑이 파손되고, 거기로 중력 쐐기에 밀린 장갑 보병들이 스며들어 간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육중하면서도 빠른 어썰트급 장갑복 무리들이 카이사르의 장갑 위로 안착했고, 이를 맞이한 것은 같은 어썰트급이었다. 13전대의 장갑 보병들이다. 그 선두에선 자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인류를 위하-
하지만 그의 말을 거기서 끝이었다. 이 섬의 검이 그의 목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맞은 부위는 전자 간 결합이 끊기는 바람에 빛이 통과해 희미하게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가슴까지 일렁거리며 소멸했다.
이미 말은 필요 없는 상황. 한때 아군이었던 두 무리가 격돌했다.
* * *
-나이스! 우지.
위르겐이 환호성을 질렀다. 롱소드가 쓸고 지나간 곳에는 불타 녹아내리는 무언가만 남아있을 뿐이다.
-팀장님, 좀 더 오른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선회하는 롱소드에서 아쉬워하는 우지의 말이 들려온다. 이제까지 도망만 치다가 제대로 싸워볼 기회가 오자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밑에 대피소가 있는데 같이 날려버리게?
-어이쿠.
빈우의 핀잔에 우지는 찔끔하더니 지정된 위치로만 포격을 날렸다. 공중에서 지원이 오자 대공 능력이 없는 워프 비스트들은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좋았어. 대충 큰 무리들은 잡았다. 이제 마무리하자.
워프 비스트들은 마지막 발악으로 덤벼들었지만, 지상팀은 건물을 무너뜨려 진입로를 차단한 다음 화력을 집중해 차례차례 제거했다. 이어서 상공에서 롱소드를 불러 뒤에 있던 무리들도 조각내 버렸다. 이젠 흩어진 놈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설 차례다.
그런데 지금까지 같이 싸워왔던 샤다이들의 행태가 수상하다. 놈들은 자기들이 타고 왔던 배로 돌아가고 있었다.
“야, 너희들 어디 가냐?”
자신들의 전투함에 타러 올라가는 샤다이들을 빈우가 붙잡는다. 알탄훼아나가 돌아서서 대답한다.
“면목 없다. 우리는 동포들의 상잔을 막으러 가야 한다. 그리고 구해야 한다.”
지금 샤다이들은 뉴 소노라의 궤도 상에서 저들끼리 치고받고 있으며, 지구제국도 자기들끼리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비홀더 전대의 주목표는 맞은편의 비홀더 전대로 추측되는데, 동급의 적을 상대하느라 아낌없이 화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 바람에 궤도 상에선 난리가 났다. 순양함들이 방어막을 쳐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곳도 디안머 꼴이 날 뻔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샤다이들은 더했다. 애먼 화망 사이에 끼어 아차 하는 사이에 쓸려나가는 것이다.
호민관인 알탄훼아나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세운 계획이었고, 거기에 시동 건 것은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샤다이들의 사정이다. 빈우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인류다.
“너희들이 싸지른 똥은 너희들이 치워야지.”
빈우가 낮고 험악하게 말했다. 뉴 소노라에 온 워프 비스트는 체메트디오프 집정관의 짓, 즉 샤다이의 짓이다. 알탄훼아나가 계단을 부순 공이 있다 해도 계단을 만든 것 역시 샤다이다. 마지막까지 뒤처리를 해준다면 못 이기는 척 눈감아 줄 수 있다지만, 이렇게 도망치는 것은 봐줄 수 없다.
대답은 머뭇거리는 알탄훼아나 대신 다른 샤다이가 했다.
“다로, 유에네스.”
대충 꺼지라는 뜻이다. 개중에 젊어 보이는 샤다이 호위병이 한 말이다. 빈우도 그에 맞게 대답해주었다.
“요힌 다로인 스하나.”
빈우의 잔잔한 말은 샤다이 호위병의 얼굴에 일대 파문을 자아냈다.
“헨칼 다노인.”
검을 쥐며 나서는 녀석에게 빈우는 다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요힌 이룩 스하나.”
검을 꼬나들고 달려드는 젊은 호위병을 주위에서 뜯어말린다. 그런데 딱히 적극적인 모양새가 아니다. 호위병을 타이르는 알탄훼아나도 찡그린 얼굴로 빈우를 흘겨본다.
-저기 누님.
빈우가 터트린 작은 소란에 궁금해진 위르겐이 파트리샤에게 질문한다. 물론 팀장의 명령대로 샤다이들을 몰래 조준하면서.
-왜?
-누님 저 비슷한 말, 발 가르단 하스에서 하지 않았나요?
파트리샤는 발 가르단 하스에서 샤다이를 말로 도발했다가 뼈저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생생히 기억한다.
-했지. 요힌 음 에루님 스하나. 뜻은 상대방 모친의 생식기에 대한 품평이랄까?
-…아까부터 계속 같은 단어가 두 개씩 겹치는데요?
-그렇지?
그때 다른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틈새로 호위병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빈우에게 덤벼든다.
하지만 빈우가 더 빨랐다. 그는 미리 몰래 떼어놓은 제트팩을 자신을 잡으려는 리퍼의 손에 붙였다. 제트팩이 추진하자 리퍼는 나동그라지며 끌려갔고, 373 팀원들은 옥상에서 발사준비를 했다.
“그만! 그만!”
보다 못한 알탄훼아나가 인간과 샤다이 사이에 서서 팔을 벌려 막았다.
“명령이다. 더 이상 싸우지 말라.”
그녀의 말에 달려나가려던 호위병들이 멈추었다. 빈우도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선 후 손바닥을 들어 팀원들에게 사격하지 말란 제스쳐를 취했다. 물론 통신으로는 언제든지 발사하라고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다.
“미안하다, 김빈우. 오늘 일은 내 잘못이 크다. 부디 나를 보내다오.”
알탄훼아나는 빈우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호위병들은 술렁였지만, 선뜻 나서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동족의 싸움을 막을 수 있게 도와다오. 부탁한다.”
그녀의 간절한 애원이 통했는지 빈우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좋아.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지. 어서 가보도록 해.”
그 말에 알탄훼아나는 화색을 띠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오늘의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리퍼들은 서둘러 동료들을 수습해 전투함에 탔고, 그 배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공중을 떠올라 가속, 대기권을 탈출했다.
-정말 보내주는 겁니까?
아룹의 질문은 놈들을 놔준 이유와 빈우의 속셈을 물어보는 것이다. 팀장 정도 되는 위인이 저런 중요한 요인을 놓아주었다면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지금 좆 됐습니다. 대피소의 시민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합니다.
그리고 빈우는 똥줄이 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대피소의 내부 채널에 접속해 놓은 상태다. 그래서 각 대피소 내부의 영상과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빈우는 그중 하나를 팀원들의 채널에 올렸다.
-여러분! 녹색연맹은 우리의 것입니다. 저 간악한 연방군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둬선 안 됩니다. 일어섭시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땅을 지킵시다.
이어서 대피소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흥분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맨손으로 분연히 나섰다.
그 모습을 본 파트리샤가 다른 팀원들을 대신해 한숨을 쉬었다.
-씨바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