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본관이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 흔적들을 확인하고 수집해, 본 전대가 당면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단서를 찾기 위해서요. 아, 물론 협조에는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거외다.”
이 섬의 친절한 설명에 빈우는 다시 질문할 시기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전에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먼저 목이라도 축이는 건 어떻습니까?”
빈우의 명령에 아나스타샤가 차를 한 잔 가지고 왔다. 물론 지구제국 병사의 크기에 맞춘 잔이다.
“이거 감사하군.”
이 섬은 선 채로 차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아나스타샤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그 와중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감사의 미소를 작게 지은 건 덤이다. 이 정도면 족하다. 적어도 그가 예의를 차리고 온 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비벼볼 자리는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 전대장이 찾는 것은 나와 그녀, 샤다이의 호민관이 엮인 사건에 대한 가능성… 의 흔적이란 거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짐작 가는 게 하나 있는데….”
이 섬은 말끝을 흐리는 빈우를 흥미롭게 쳐다본다.
“이 전대장은 혹시 워프 비스트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워프 비스트? 연방이 그리 칭하는 것이라면 고대 샤다이들의 귀환에 의한 빙의체 아니오? 물론 알고 있소.”
빈우의 질문에 섬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역시 비홀더 전대는 워프 비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빈우는 이 섬이 원하는 정보 중에서 워프 비스트가 핵심인 줄 알고 그것을 바로 찔러 질문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쩐다. 다음은 워프 비스트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할까, 아니면 오늘 싸웠던 비홀더 전대의 목적에 대해 질문할까.’
비홀더 전대와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드문 기회다. 저쪽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는 이상 신중히 질문을 골라야 한다. 머리를 굴리던 빈우는 말할 기회를 섬에게로 넘겼다.
“말씀 계속하시죠.”
“음, 그럼….”
빈우는 섬의 말을 듣고 조금 더 단서를 수집한 다음 질문하기로 했다.
“김 소령, 귀관은 이 샤다이와 마주쳤을 때 선택의 흔적을 본 적이 있소?”
“그녀의 움직임이 여러 갈래로 보이는 것 말씀이죠?”
“바로 그거요.”
“있습니다. 두 번. 오브리가도에서 한 번, 발 가르단 하스에선 만나긴 했지만 별다른 징조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뉴 소노라에서도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두 번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리오.”
섬은 발 가르단 하스란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비홀더 1전대 자신들이 리퍼들을 전멸시키고, 그 함선에 반물질 폭탄을 실어서 떨어트린 행성이다. 더구나 고대 샤다이들이 돌아오는 계단을 부술 수 있는, 워프 비스트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정보 생명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걸까. 아니면 흥미가 없는 걸까.’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워프 비스트의 존재에 대해 거리낌 없이 대답한 것을 보면 딱히 숨기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당시 섬과 전대원들의 대화를 보면 정말로 몰라 보였으며 전투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빈우는 자신이 보았던 알탄훼아나의 흔적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흠, 설명 고맙소. 큰 도움이 되었소.”
빈우가 말해준 것은 감금되어있던 알탄훼아나가 보았던 시선들의 방향과, 위장포를 들치며 들어왔던 그녀의 방향들에 불과했다. 빈우로선 기이하긴 해도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던 사실이지만 섬은 꽤나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탄훼아나가 보았던 빈우의 흔적은 이미 들었겠지. 그녀의 몸 상태를 보면 어떻게 들었는지 대략 상상이 간다.
“이제 본관이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소. 해서 답례를 하고 싶은데, 뭔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섬은 답례품을 내놓으려고 한다. 그게 지구제국의 것이라면 꽤 가치가 높다. 일단 빈우는 슬쩍 떠보기로 했다.
“디안머에선 무기와 설계도까지 제공한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유효합니까?”
“그야 물론.”
이어서 빈우의 앞으로 무기들의 영상과 그 제작도면이 뜬다. 아쉽게도 비홀더 전대들이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제원과 위력을 보면 현재 연방이 쓰는 코일건은 애들 폭죽으로 보일 지경이다. 뒤에서 모니카가 할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중 몇 가지를 고를 수 있습니까?”
“으응? 다 드리는 거요.”
생각보다 통이 크다. 아니면 빈우가 가르쳐 준 정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가치가 크다면 흥정을 해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섬의 태도를 보면 거래가 끝났다기보다는 아직 여운을 남겨놓고 있었다.
“혹시 현재 비홀더 전대가 쓰는 무장을 줄 수 있습니까?”
“아하, 그건 좀 곤란하오. 현재의 연방에 제국의 무기기술을 주는 것은 금지된 일이긴 하지만 뭐, 내 재량 상 하나나 둘쯤은 가능은 한데…. 허나 준다 해도 연방이 쓰긴 힘들 것이오. 제작하기 위해선 제반 시설과 기술까지 필요하기에 현재의 연방으론 무리요.”
무기는 주되 핵심 기술은 안 된다. 예상대로 거절은 했지만,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고 오히려 이쪽을 배려해주는 눈치다. 알탄훼아나에게서 보았던 잔영을 말해 준 것만으로 이 정도라니, 방금의 정보가 가진 가치와 중요도가 대폭 올라간다. 이때를 노려 다시 빈우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습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시간이 되는 한 대답해 드리리다.”
이제까지 연방군을 소 닭 보듯 했던 비홀더 전대가 맞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허나 빈우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상대방이 친절하다고 해도 자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자라면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순 없다. 대개의 경우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정보에 뭔가 조작이 가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둘째. 얼마 안 되는 정체불명의 정보에 비홀더 전대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이 일이 위험하고 중요한 것이란 반증이다. 더불어 빈우는 이번 일에 꽤 깊이 관여된 것 같다.
셋째. 시간이 되는 한, 이란 대목이 걸린다. 비홀더 1 전대장은 빈우가 마련한 자리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일부러 격납고에서 서서 얘기하자고 했다. 이 섬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홀더 전대는 워프 비스트에 대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인류에 닥친 이 위협을 보고만 있는 것입니까.”
빈우의 질문에 섬이 쓴웃음을 짓는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그 워프 비스트에 관해 알고 있는 자는 비홀더 전대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소. 음, 정확히는 신경을 안 쓰는 거겠지만 말이외다. 게다가 설령 안다 해도, 우리의 임무는 루비콘 라인 바깥으로의 순찰이오.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라인 안 쪽으로 들어오지 않지.”
즉 알고도 방치한다는 얘기다.
“인류가 워프 비스트로 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샤다이의 빙의 현상이라면 연방에 위협이 되긴 하겠지. 희생 또한 제법 있을 것이고. 그러나 연방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우리가 나설 순 없지 않소. 아, 인류에게 정말로 위협이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우리가 나설 테니 걱정 마시오.”
섬의 대답은 일견 제법 성의 있어 보였지만 듣는 빈우와 373 팀원들에겐 기도 안 차는 일이다. 워프 비스트가 비홀더 전대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중요한 일인 것일까.
“워프 비스트의 위협 때문에 연방은 점프 항법을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점프를 못 하면 연방은 멸망합니다.”
닦달하는 듯한 빈우의 말에 섬은 느긋하게 대답한다.
“말했지 않소. 대가를 치를지언정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게다가 이 샤다이가 응급처치를 해놨으니 당분간은 문제없을 것이오.”
섬이 발로 툭 건드리자 알탄훼아나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워프 비스트의 침공에 대해 도와주거나, 현재의 점프를 대신할만한 비홀더 전대의 공간이동항법 기술양도는 불가하단 말입니까?”
“아쉽지만 그렇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더럽다.
“도대체 비홀더 전대가 루비콘 라인 밖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황제의 명이오. 돌아올 때가 되거나, 전대에 중요한 임무이거나, 인류에 해결할 수 없는 대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소.”
여기까진 대충 아는 내용이다.
“정말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때라면 비홀더 전대는 루비콘 라인을 건널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를 말이오. 그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면 당연히 들어와야지.”
그리고 빈우는 비홀더 전대가 루비콘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던 때를 안다.
“그렇다면 디안머와 오늘 이곳은 꽤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군요.”
빈우의 질문에 섬이 씨익 웃었다. 비홀더 전대가 루비콘 라인을 들어온 것은 최근 두 번이다. 한번은 디안머에서 알탄훼아나를 찾기 위해서, 다른 한 번은 오늘 같은 비홀더 전대와 싸우기 위해서.
“물론이오, 아주 중요한 일이외다.”
“그에 대해 좀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연방과는 관련이 없고 비홀더 전대에게만 관련된 일이라 말해줄 수 없소.”
디안머에선 징수 함대와 자치 행성 하나를 박살 낸 거로도 모자라, 오늘은 궤도 상에서 아비규환을 만들어놓고선 저따위로 말하는 것을 보면, 비홀더 전대는 연방을 완전히 아래로 보고 있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 문제는 저 일이 빈우와 알탄훼아나에겐 상당히 깊게 연관된 것처럼 보인단 거다.
“보아하니 저도 그 일에 깊이 연관된 듯합니다만, 그래도 안 됩니까?”
“하하하, 김 소령이 비홀더 전대로 온다면야 내 기꺼이 알려드리지.”
섬은 즐겁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빈우의 어깨에 올렸다.
“이건 결코 농이 아니오. 그대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 우리가 지키고 봉사해야 할 제국의 신민이오. 바꿔 말하자면 전대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얘기지. 어떻소?”
연방의 군용강화를 한 빈우를 순수한 인간이라 한다면 대체 제국의 신민은 무언가 싶다. 과거 지구 제국이 인류 연방으로 바뀔 때도 인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기준일까.
“제안은 감사하나 저는 현재의 신분에 만족합니다. 다시 말을 본론으로 돌려서, 그렇다면 저와 알탄훼아나에게서 얻은 정보가 인류에게 결코 위험한 일은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전대가 루비콘 라인을 넘을 정도의 위험은 아니란 의미입니까.”
손을 치우는 섬의 눈에 약간의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빈우를 영입할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것 같다.
“그렇소. 앞서 말했듯이 본관이 그대에게 질문한 것은 우리 비홀더 전대에게만 중요한 일일 뿐, 그대들 연방과는 관계가 없소. 자세히 대답해 줄 수 없는 점 양해 바라오.”
“그러면 오늘 비홀더 전대끼리의 전투는 어찌 된 겁니까? 당신들 같은 무력집단이 연방의 행성 부근에서 난리를 치면 상당한 위험일 텐데 말입니다.”
“아, 그건 우리 측에서 알아서 해결했으니 너무 염려 마시오. 게다가 저딴 식민 행성 한둘이야 딱히 중요한 게 아니잖소.”
지금 이 섬의 태도는 제국 신민을 지키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과는 아귀가 맞질 않는다. 설마 연방 직할령만 구 제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빈우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섬의 발이 알탄훼아나를 짓이겨 죽이고 있다. 서서 달아나던 알탄훼아나의 등에 제국 군인의 칼이 꽂힌다. 그러나 실제 알탄훼아나는 바닥에 쓰러져 빈우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보았소?”
섬의 날카로운 눈빛이 빈우의 눈을 마주 보고 있다. 지금 빈우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원하는 눈치다.
“…또 한번 흔적을 본 것 같군요,”
“어떤?”
바싹 다가붙으며 질문하는 제국 군인은 굉장한 위압감을 풍긴다. 위르겐과 파트리샤가 안전장치를 푸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있는 그녀를 당신이 밟아 죽이고, 도망치는 그녀를 뒤에서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보시다시피 이런 상태죠.”
“흐으음!”
이번엔 섬이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살아남았다라… 살아남았다? 아니, 감히 내게서 도망을 친다고?”
잠시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어허, 아쉽군. 시간이 벌써 이리될 줄이야. 본관은 이제 가봐야 되겠소. 오늘 협력에 정말 감사하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종종 있으면 좋겠군.”
그러면서 이 섬은 상자와 알탄훼아나를 내버려 둔 채 격납고의 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잠깐. 이 샤다이는 어떻게 할 겁니까?”
빈우의 질문에 섬은 한 번 슥 돌아봤다.
“아직은 그년의 명줄이 끊길 땐 아닌 것 같소. 혹시 흔적이 보이거든 잘 기억해 두길 바라오. 다음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섬은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팀원들이 한숨을 내쉬는 게 들린다. 격납고 안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이다.
빈우는 쓰러진 알탄훼아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살려다오.”
알탄훼아나가 흐느끼며 간신히 말을 뱉었다. 그러나 목숨 구걸은 아니었다.
“난,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아직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제발 나를 살려다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는 그녀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죽음을 피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살려는 것이다.
비홀더 전대가 뭔가 큰 것을 놓고 간 느낌이다. 분명히 알탄훼아나는 중요도가 높은 인물이다. 샤다이란 종족의 호민관이기도 하고, 워프 비스트의 침공을 막은 적도 있다. 그리고 현재는 비홀더 전대와 관련된 정체불명의 대사건에 빈우와 함께 엮인 상태다.
“이를 어쩐다.”
빈우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은 알탄훼아나를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