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아나스타샤는 기뻤다.
“룰루루~.”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마치 인간처럼.
“랄라라~.”
지금 자기가 키워왔던 도련님, 자신이 모셔왔던 주인님이 오는 것이다. 뉴 소노라에서 빈우는 지상으로, 그녀는 블랙 랜스로 가면서 둘은 잠시나마 헤어졌었다. 다시 재회했을 때 그녀의 주인인 빈우는 자신이 살리지 못한 자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달래주는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한숨 잔 그다음부터 그녀의 주인인 빈우는 정말로 바쁜 나날들을 보냈던 것이다. 그만큼 막중한 사태였다.
‘가여운 우리 주인님.’
태스크 포스 373이 통합작전사령부로 온 다음부터 빈우는 아예 블랙 랜스로 오지도 못했다. 근처 의자에서 수면 모드로 쪽잠을 자고, 전투 연료로 끼니를 때우며 여기저기로 불려 다녔었다. 보다 못한 아나스타샤가 치킨 파이를 구워 전해주려고 해도 보안 구역이라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부팀장인 아룹이 대신 전해주겠다면서 들고 갔지만 그조차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사태가 처리되어가며 한고비 넘긴 덕분에 빈우가 이제는 블랙 랜스로, 그녀의 곁으로 온다고 하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문득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뉴 소노라에서 빈우가 키스했던 부분이다. 비록 미행하던 자를 유인하기 위해 했었던 연극이었지만 주인의 짙은 숨결을 느꼈을 때 그녀는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인의 손길이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로 들어올 때는 더더욱.
평상시에도 가벼운 터치를 하곤 했지만, 그때는 전혀 틀렸다. 꾸민 것이라곤 해도 감촉의 차이가 너무나도 달랐다. 그냥 애정 어린 손길과 목적이 담긴 손길은 달랐다. 지금의 자신은 그 ‘목적’을 이룰 순 없지만, 조금만 개조를 하면 할 수도 있다.
그 목적. 옛날 어린 빈우가 호기심으로 샀던 그것, 뉴 소노라에 들어가기 위해 꾸몄던 거짓 목적이었던 그 부품. 그동안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검색해 봤다. 하지만 막상 찾아보고 구입하려고 하니 뭐랄까, 거부감도 아니고 무서움도 아닌 부끄러움에 사지를 못 했었다.
“앗! 주인님.”
방에 들어온 빈우를 아나스타샤가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그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빈우의 얼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많이 피곤하시죠. 일단 누워서 좀 쉬세요.”
“…그래.”
빈우는 한숨 섞인 대답과 함께 침대에 드러누웠다.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보는 게 얼마 만일까. 그는 오히려 이런 포근함이 불안하기까지 하다.
“쮸인니임.”
아나스타샤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빈우 옆에 앉았다. 그리고 주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에 빈우는 조금만 더 쓰다듬으면 잠들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헤헤.”
그것을 눈치챈 메이드가 주인의 옆에 폴싹 같이 누웠다. 그리고 가슴에 기대어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빈우는 대답 없이 그저 눈감고 멍하니 있을 뿐이다.
“저기, 또 수면 모드 하실 건가요?”
“아니, 그냥 잘 거야. 좀 잘 테니까 누가 호출하면 깨워줘.”
“네에.”
아나스타샤가 배시시 웃으며 빈우를 껴안아 왔다.
* * *
“빈우야, 밥 먹자-.”
스피커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저녁 시간이다. 농장 공터에서 공놀이를 하던 빈우는 신나게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나 왔어요.”
식당으로 가니 고소한 냄새가 난다. 빈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있다. 바로 치킨 파이다. 거기다 초코 쿠키도 있다.
“잘 먹겠습니다.”
신이 나서 냉큼 식탁에 앉은 빈우는 치킨 파이를 잡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닭고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그걸 우물우물 씹어 꿀꺽 삼킨 다음 이번엔 손이 초코 쿠키 쪽으로 간다.
“어허, 김빈우. 간식은 밥 먹고.”
짐짓 엄한 엄마의 엄포가 들리자 빈우는 쿠키의 끝만 살짝 떼어 입에 넣고는 안 먹은 척 딴청을 피운다.
“넹, 밥 다 먹고 먹을게요.”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고, 엄마의 웃음을 본 빈우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냠냠 씹고 있을 때 빈우는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좀 달랐다. 평소와 무언가가 달랐다.
“어! 엄마! 아나스타샤가 웃어요.”
“어머, 정말이네.”
친절하긴 해도 언제나 구입했을 때의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지금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엄마와 아들은 그 미소를 보고 자신들도 기뻐했다.
“제가, 웃고 있나요?”
안드로이드는 어리둥절해서 자신의 얼굴을 조물조물 만진다.
“그럼, 너 웃고 있단다. 쿠델카 모델 길들이기 쉽지 않다던데, 보람이 있네.”
호탕하게 웃은 엄마, 작게 웃다가 드디어 웃음보가 터진 아나스타샤.
빈우는 정말 행복했다.
빈우는 이 행복이 정말 좋았다.
아니, 이 행복과 추억이 정말로 싫다. 이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으아아아!”
빈우는 손안의 치킨 파이를 구겼다. 데이터 패드가 박살이 난다.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침대에서 구른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다. 어머니는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팔다리를 자른다 해도 다시 요람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보다 나은 삶과 연방을 위해 앞으로 걸었지만, 빈우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인류와 연방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외계종족을 죽였다. 심지어 같은 인류마저도 죽였다.
“아아악! 아아!”
허둥대는 빈우에게 방안의 풍경이 보인다. 침대, 책상, 탁자, 맹렬히 돌아가는 샤프트.
“빈우야! 스위치를 꺼!”
엄마가 샤프트에 끼어 돌아간다. 그저 한 걸음 다가가 스위치만 껐어도 엄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한걸음. 겨우 한걸음이다. 그러나 빈우는 그러지 못했다.
“로보트야아아! 안아줘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안아달라고 다가오는 아이를 그저 껴안았으면 될 일이다. 그러면 부모를 잃고 울던 그 아이는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육중한 장갑복에 둘러싸인 겁쟁이는 그러지 못했다.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 모조리 자신의 눈앞에서 치우고 싶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다 필요 없다. 오직 아나스타샤만 자신의 옆에 있어 주면 된다.
“아나스타샤!”
빈우는 아나스타샤를 소리쳐 불렀다.
“네, 주· ··인, 님.”
아나스타샤가 목이 졸려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안드로이드의 목관절 따위는 순식간에 으스러진다.
빈우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웃고 싶었다.
“아샤?”
빈우는 자신이 아나스타샤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 위에서 그녀를 깔아뭉갠 채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샤!”
놀란 빈우가 퍼뜩 손을 치우고 그녀의 상처를 살펴본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상처와 짓눌린 목이 눈에 들어온다.
“너… 너, 괜찮….”
채 말을 맺지 못하는 빈우에게 아나스타샤의 손이 바들거리며 올라온다.
“괜찮아요, 주인님.”
그렇게 말한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꿈속에서 보았던 미소를 지으며 빈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즘 피곤하셔서 악몽을 꾸신 모양이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빈우는 떨리는 손으로 아나스타샤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미안하죠. 주인님이 얼마나 힘드신 지도 모르고 어리광만 부렸네요.”
쉬어버린 목소리. 그럼에도 힘겹게 손을 들어 주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빈우는 정말로 슬펐다. 자신이 부상한 다음 누렸던 잠깐 동안의 행복. 그것이 조만간 끝날 것이다. 머릿속의 트리티니 패턴이 풀릴 것이다. 반복되는 스트레스와 신경 자극을 모은 두뇌칩이 자극받고, 모여진 열쇠 조각들이 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가 메꾼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열린다.
“아샤, 아샤아.”
빈우는 힘겹게 아나스타샤를 껴안았다. 마치 떠나버릴 그녀를 놓칠까 싶어 꼭 껴안았다.
“네, 주인님. 전 여기 있어요.”
아나스타샤도 빈우를 꼭 껴안았다. 하지만 정작 떠날 사람은 빈우 자신이다.
* * *
“팀장님은 언제 오신대요?”
파트리샤가 회의실 의자에 누워 건들거리고 있다.
“곧 오시겠지. 아마 한숨 주무실걸.”
부팀장 아룹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이렇게 시달렸는데 팀장님은 오죽할까요.”
위르겐이 짐짓 엄살을 떨었다. 태스크 포스 373이 뉴 소노라에서 가져온 폭탄은 대폭발을 일으켜 연방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의 진화를 위해 대규모의 조사팀이 블랙 랜스로 쳐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기밀 엄수를 명하는 서류들에 서명하고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조사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서에 서명을 하고 다른 검사를 받았다. 육체 검사, 정신 검사, 장비 검사, 사고 검사, 검사검사검사.
“씨발, 우리 애들한테 엄한 짓 하면 대가리 날아가니까 알아서 해라.”
팀장인 빈우는 조사팀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계급이 높은 자들이 이 말에 어이없어하면.
“-라고 우리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덧붙이며 레드우드 사령관과의 직통 회선을 열어주었다. 그러면 영상 속의 레드우드는 노발대발하면서 빈우에게 팀에 허튼수작 부리는 놈은 모조리 찢어 죽이라면서 길길이 뛰었다. 이게 딱히 오버하는 것도 아닌 게, 지금 어디의 누구한테 샤다이가 들어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조사는 여러 부서들의 감시의 손길과 의심의 시선이 닿은 상태에서 엄중히 행해졌다.
“아잉, 보고 싶어잉. 불쌍해라. 우리 팀장님.”
파트리샤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모니카가 질겁한다.
“무서워요. 언니. 그 모습 보고 팀장님 도망가겠는데요.”
“어마 이년이.”
그때 빈우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르르 모여드는 팀원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오냐, 다들 오래간만이다. 자리에 앉아.”
달려드는 팀원들을 밀어낸 빈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큰불은 껐다… 라기보다는 넘어가기로 했다.”
“설마하니, 점프는 계속하는 겁니까?”
빈우의 말한 의미를 알아챈 아룹이 질문했다. 현재 연방이 쓰는 점프 항법. 그 점프 공간이 고대 샤다이의 유산이고 거기에 들어가면 갈수록 샤다이에 오염된다고 하니 위험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현재의 연방으로선 그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점프 항법을 쓰지 않으면 그 외의 성간 항법을 보유하지 못한 인류 연방은 갈갈이 단절되어 붕괴된다.
“뭐, 이래저래 예방을 한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빈우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화면을 열었다. 워프 비스트로 변한 몇몇 사례들이다.
“알다시피 점프를 하면 할수록 인간은 샤다이의 정보에 오염된다. 그리고 충격이나 고통 등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면 그곳을 통해 샤다이와의 연결되는 계단이 생기고, 결국 인간은 워프 비스트로 변하게 된다.”
말로 들어서 이해는 하지만 현재 인류의 기술로는 대비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 정신적인 상처, 우리들도 만만찮게 있지 말입니다?”
위르겐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죽음과 폭력으로 범벅된 지옥 일번지에서 살아온 이들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할 리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졌었고, 다시 일어났다.
그런 만큼 워프 비스트화로부터 가장 위험한 직업이다.
“그래, 문제는 그 상처를 이겨내고 극복해냈느냐가 관건이다. 이걸 봐라.”
화면에 차례로 뜨는 워프 비스트 사례. 그중 첫 번째가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발생한 스미스 일가 사건이다. 당시 가장이었던 콘래드 스미스를 비롯해 처 테레사 스미스, 아들 빈센트 스미스는 태스크 포스 373의 눈앞에서 워프 비스트로 변했다.
“으음, 그 사람들이라면 우리와 샤다이의 전투 근처에 있었으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우지가 의견을 냈다. 당시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거의 민간인에 가까웠던 우지는 레드우드 사령관이 보호해줘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당시의 충격도 꽤나 컸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더 큰 것이 있다. 스미스 일가는 원래 자치행성에서 친연방파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고향에서 반연방 세력이 득세하자 터전을 잃고 연방 쪽으로 왔지.”
“어허.”
빈우의 설명에 우지가 나직하게 탄식한다. 그 역시 자치행성 출신이라 그쪽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안다.
“꽤나… 험한 일을 겪었겠군요.”
우지의 말에 빈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되는 소수의견에 인간은 상당히 잔인하다.
“직간접적인 폭행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스미스 일가는 연방으로 왔지만, 그때 심각한 수준의 정신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 전원 두뇌칩 삽입 시술을 했었고, 아직 어렸던 빈센트 스미스도 치료의 일환으로 두뇌칩 시술을 받았다.”
보통 연방에서 두뇌칩은 15세는 지나야 시술받는다. 그런데도 어린 빈센트에게 두뇌칩을 심어 정신치료용 프로그램을 돌릴 정도였다니 스미스 일가가 받았던 충격이 짐작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