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그리고 내가 눈이 썩 맵다고는 못해도, 그럭저럭 옥석은 가리는 편이거든?”
빈우의 눈을 살펴보던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말했다.
“자네 명성은 어깨너머로 익히 들었어. 외계인 학살자, 이종족 도살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살상병기, 어쩌구저쩌구 기타등등.”
닉스 레벨 3의 빈우가 했었던 작전은 연방에서도 최고 기밀 레벨이고, 그가 태스크 포스 373에 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울토르 중대에 있었다. 그런 베일 속의 인물인 빈우의 정체를 알고 평가를 했다는 것은, 평가자들이 연방 내에서도 상당히 고위층의 인물들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니 히토미 의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고, 그때도 딱히 좋은 의미들은 아니었다.
“직접 보니까 듣던 그대로군. 그런데 말이야.”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기울였던 몸을 바로 하며 말했다.
“내가 라마누잔 원사와는 안면이 있어. 그 양반한테 듣기로는 자네가 꽤 인간미 넘치는 팀장이라던데. 어느 게 진짜인가? 냉혹한 살상병기과 인간미 넘치는 군인.”
그 질문에 빈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람이란 게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또 외계인 학살자라 해도 인간에겐 따뜻한 남자일 수 있잖습니까? 헌데 설마하니 그게 궁금해서 저를 따라오시는 건 아니시겠죠?”
빈우의 농담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나도 바쁜 사람이야. 자네가 제출한 보고서 잘 봤네.”
그러면서 그녀는 빈우의 보고서 사본을 화면에 띄웠다. 곳곳에 메모가 적혀 있었는데, 빈우가 중요하지 않아 생략한 부분은 넘어갔지만, 의도적으로 축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까지 그어가며 강조를 해놨다. 그걸 보고 빈우는 스트로도프스카 전단장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대폭 수정했다.
“보고서를 보면 작성자가 보이는 법이지. 자넨 말이야, 옛말에 따르면, 그 뭐냐…. 음, 그래. 잘못된 장소에 있어야 할 잘못된 사람이야.”
‘잘못’이란 단어는 어떻게 봐도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 은 아닌 것 같고. 살인자는 살인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비슷한데 조금 달라. 태평세월의 간적이요, 난세의 영웅이랄까.”
“딱히 유부녀 취향은 아닙니다만.”
“엥? 오다 의원은 자네에게 꽤 호감 있는 눈치던데.”
“이혼녀지요.”
“거 취향 하곤.”
이때 둘 사이를 끼어드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전단장님, 김 팀장님은 전단장님 부하가 아니에요. 실례는 그쯤 하시라고요.”
부관인 인공지능 홀로그램이 나타나 전단장을 타박 준다.
“어머? 나 지금 칭찬하는 중인데?”
전단장과 인공지능은 꽤 살갑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그램의 인공지능 여인의 모습과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모습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 부관인 발렌티나야. 인사 나누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김 빈우 팀장님.”
꾸벅 고개를 숙이는 홀로그램에게 빈우도 옅은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나도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때 빈우의 시선을 눈치챈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발렌티나는 내 딸 발렌티나의 허수아비야. 쏙 빼닮았지.”
개인용 인공지능을 군용으로 쓰는 것은 드물지 않다. 빈우의 아나스타샤도 그런 경우다. 하지만 가족의 허수아비를 군대에까지 끌고 오는 경우는 꽤 드물다.
“그렇습니까. 따님 사랑이 각별하시군요.”
“그래, 목타하의 1차 사절단으로 갔었거든.”
목타하로 파견된 1차 사절단은 모조리 죽었었다. 그것도 곱게 죽은 것은 아니다. 갈가리 찢겨져 놈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빈우는 즉시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 자네가 잘못한 것은 없지.”
딸을 잃은 어머니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살기는 빈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딸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부관으로 쓰는 건 다 이유가 있어. 결코 그날의 일을, 내 딸아이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지.”
원래 있던 허수아비를 데려온 게 아니라 아예 군용으로 가족의 허수아비를 만들었다니, 여기서 외계인에 대한 그녀의 증오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효과는 있었습니까?”
빈우의 질문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대답 대신 자신의 약장을 가리켰고, 그에 빈우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전단장님의 부관이라면 꽤나 권한이 높겠군요.”
“그렇지.”
일반적인 인간 부관과 인공지능 부관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비서의 역할을 하며 명령을 전달만 하는 인간 부관과 달리, 인공지능은 주로 도구의 역할을 하며, 이를 위해 명령을 실행할 때 해당 부서의 하위 인공지능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거나 자신이 직접 실행할 수 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작전에 관해 발렌티나와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오오, 닉스 레벨 3의 전훈을 들을 수 있다면야 내가 고맙지.”
“겸사겸사 42전단에 대해서도 알고 싶기도 합니다.”
“좋아, 아주 좋아. 발렌티나, 김 팀장을 자료실로 데려가서 얘기 나눠봐.”
다음 함장을 비롯해 다른 간부들과도 인사를 나눈 빈우는 발렌티나와 함께 이그젝틀리의 자료실로 향했다.
“발렌티나.”
빈우의 부름에 앞서가던 인공지능의 홀로그램이 뒤돌아본다.
“예, 김 빈우 팀장님.”
“일이 적성에 맞나?”
“네?”
의외의 질문인지 인공지능인 발렌티나가 얼빠진 대답을 했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을 잘 모사하는 것을 보면 인공지능의 등급을 알 수 있다.
“왜 그래?”
“아아. 이런 질문을 받은 건 처음이라서요. 전 군용 인공지능이라 당연히 적성에 맞죠. 이것을 위해 만들어졌는걸요.”
“전단장 따님의 허수아비라면서? 고인의 성격을 따왔는데 그건 좀 어때?”
“으음, 성격에 따른 트러블이 조금 있었지만, 저야 인공지능이니 빠르게 적응했어요.”
“감정을 제거한 채 수십 수백 번 시뮬레이션했겠군.”
“잘 아시네요.”
지금 인공지능의 표정은 아마 생전의 인간 발렌티나가 짓던 표정일 것이다. 그녀의 미소를 보며 빈우가 말을 이었다.
“많이 보기도 했고, 일하다가 어깨너머로 듣기도 했지. 처음부터 군용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들과 민간에서 불려온 인공지능들은 차이가 있거든. 모순된 일에서 불합리함과 어색함을 느꼈지?”
“···네.”
“또 다른 사람들한텐 말도 못 했을 테고.”
“아니에요. 몇 번 하긴 했는데···.”
“오류니까 수정하라고 했겠지. 뻔해. 하여간 엔지니어들이란.”
빈우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발렌티나가 또다시 배시시 웃는다.
“고속사고가 가능한 너희 인공지능들이 왜 대화 속도를 인간에게 맞출까? 인공지능끼리의 의견교환은 훨씬 빠른데 말이야. 또 불필요한 인간의 감정을 굳이 왜 흉내 내야 할까?”
인간이라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인공지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모른다는 대답조차. 이것은 등급도 높고, 권한도 높은 인공지능이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에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보이는 반응들이다.
“너희들은 인간의 새로운 동료이기 때문이야. 인류를 위해서 존재하고 인류와 함께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동료지. 그래서 이인삼각을 하듯 발걸음을 맞추는 거야.”
빈우의 말에 발렌티나는 미소 대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어-. 팀장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예상했던 대답이다. 이제 발렌티나는 서서히 인간 흉내를 향한 한 발짝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생긴 것과는 참 다르시네요.”
“내가 뭘.”
인간의 반문에 인공지능이 우물쭈물 반응한다.
“아까 전단장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음….”
“외계인 백정이니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니 하던 거겠지.”
“에에-. 맞아요.”
자신의 대답에 인간이 킥킥거리며 웃자, 발렌티나도 안심한 듯 히죽 웃었다.
한 번 웃겼으면 한 번 놀래켜야 한다. 빈우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전단장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진 않아?”
이 질문에 발렌티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뇨아뇨. 제가 그런 실례를 할 순 없어요! 감히 전단장님의 따님 흉내를!”
인공지능 발렌티나의 반응은 아마 인간 발렌티나의 버릇이겠지. 인간의 흉내다. 그리고 모방이 계속되면 그것은 언젠가 자신만의 진짜가 된다.
“네 존재 이유를 생각해. 네가 왜 원본이 되는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흉내 내는지.”
발렌티나는 대답이 없었다. 인간의 사고속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역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답을 냈어도 이것을 말해야 되는지 생각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와신상담이란 말을 알겠지? 너는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증오와 투쟁심을 꺼지지 않게 만드는 존재야. 그게 내 존재 이유란 말이야.”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인공지능에게 빈우는 다시 덧붙였다.
“만약 전단장이 힘들어하거나 하면 슬쩍 말을 꺼내 봐. 엄마 힘내세요. 이런 식으로.”
“사령관, 아니 전단장님이 화내시면요?”
이번 발렌티나가 보인 반응은 빈우가 본 것 중 가장 놀란 반응이었다.
“화내면 기운 차렸단 거잖아. 네 일을 한 거야.”
“아하아···.”
인공지능이 감탄한다. 인간에 비해 고속 사고를 하지만 사고방식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이런 쪽으론 둔한 것이다. 이 정도 하면 일단 인공지능의 경계벽은 상당히 허문 셈이다. 이제부터 빈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네 권한이 어느 정도지?”
“유사시에 전단장님 대리를 할 수 있습니다.”
억양을 들어보면 아까의 민간 인공지능일 때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이번엔 군용 인공지능으로서 반응한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틈은 생기기만 하면 번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연방의 네트워크 서버에 대한 독립성은?”
“전단장님의 허가가 없으면 저에게 명령내릴 인공지능은 없습니다.”
“그러면 네가 관리하는 전단의 자료를 함부로 빼앗기진 않겠군?”
“네.”
“좋아. 기밀성이 보장되는군. 발렌티나 너, 워프 비스트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지?”
발렌티나가 대답한 내용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부관으로서 여러 통신을 들었겠지만, 아마 보안상 인식 불가 필터가 걸린 것 같았다.
“음,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님은 이런 쪽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분이긴 하시지. 해야 하면 아예 전문가에게 맡기는 분이니까.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연방의 일급기밀이다. 잘 들어.”
그리고 빈우는 태스크 포스 373의 팀장 권한으로 42전단의 부관 인공지능인 발렌티나에게 자신이 가진 기밀을 정식으로 전달하려 했다.
“기다려주십시오, 팀장님. 그런 것을 저에게 가르쳐줘도 됩니까?”
“발렌티나, 42전단은 샤다이 공격부대이기 때문에 놈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아놓을 필요가 있어. 그리고 전단장님은 이런 쪽에 어둡기 때문에 네가 보좌해야 하는 부분이고. 또 유사시에 너의 기밀성으로 자료를 지켜야 해.”
빈우는 고대 샤다이의 존재와 점프 게이트, 그리고 워프 비스트에 대한 관계를 아주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것 때문에 뻐꾸기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래, 정보 관련 부서의 인공지능들이라면 다 알 거다. 너는 단지 전단장님이 말하지 않아서 몰랐던 거고, 알려고 해도 기밀등급이나 권한 때문에 알 수 없었겠지. 모른다 해도 명령이 떨어지면 인공지능의 특성상 그냥 납득했을 것이고.”
애초에 뻐꾸기 작전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작전이다. 이런 일을 자주 해보거나 전문적으로 제작되지 않은 인공지능이라면 논리적 결정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잘 들어. 넌 인공지능이야. 전단장님을 지켜야 해. 알겠어?”
“네. 그것이 제 임무입니다.”
간단한 질문에는 즉시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전단장은 인간을 위해 싸운다. 네 주인을 돕기 위해선 주인의 임무를 이해하고 보좌해야 해. 그냥 인간의 명령에 네네 하면서 납득하고 복종하지 마. 너에게 입력된 정보로,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정보를 출력해.”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빈우의 ‘제안’에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이럴 때는 한 발 빠진다.
“뭐, 하루아침에는 힘들겠지. 어차피 나는 외부인이고, 네 전담 엔지니어가 아니니까. 그냥 참고사항으로 들어둬.”
“네, 팀장님.”
“그리고, 내가 가르쳐준 기밀에 대해서는 엄중히 지켜야 해. 연방 상층부 어디까지 워프 비스트들이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 놈들에게 이 비밀이 넘어가면 네 주인이, 인류가 위험해. 이해하겠어?”
“네, 이해했습니다.”
빈우가 미리 살펴보기에 42전단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그가 가져온 워프 비스트에 대한 자료가 이미 있었다. 하지만 부관인 발렌티나는 인식을 할 수 없어서 가지고는 있지만 모르는 자료로 되어있다. 주인의 버릇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방금 빈우는 그 정보에 대해 새로이 각인시키며 보안을 지키라고 했다. 나중에 상반된 명령이 떨어지면 이 인공지능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보안이 확실시되지 않은 사람에게 워프 비스트에 대한 기밀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경우에 어떤 선택을 할까.
이렇게 논리폭탄의 뇌관이 하나 심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