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알탄훼아나를 진정시킨 빈우는 일단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주인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나스타샤가 반겨준다. 앉아있던 그녀가 냉큼 달려와 빈우에게 달라붙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미소와 함께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그녀가 손을 들어 빈우의 뺨을 쓰다듬는다. 강화 군인이 피곤함을 느끼려면 진짜 심각하게 돌려야 한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피곤은 정신 쪽을 말하는 것이다.
“요새 쉴 틈이 없지.”
빈우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자, 아나스타사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앉았다. 바로 주인의 무릎 위에. 그러고는 조심스레 물어본다.
“저, 무거워요?”
그 질문에 빈우가 피식 웃었다. 제 몸무게의 절반도 안 되는 그녀가 무거울 리 없다.
“에헤헤, 웃었다.”
주인의 웃음을 본 메이드도 배시시 마주 웃었다. 그리곤 자신의 가슴으로 주인의 얼굴을 꼭 껴안았다.
“죄송해요. 그동안 제가 주인님을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했어요.”
“아냐, 내가 바빴는데 뭘.”
빈우의 손이 올라와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잡고 부드럽게 안았다. 잠시 그렇게 안고 있던 빈우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샤,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어, 뭔데요, 뭔데요?”
부탁이란 말에 안드로이드 메이드가 눈이 동그래져서 주인을 재촉한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얘기가 나오자 바로 달려든다.
“알탄훼아나를 좀 봐줘.”
낯선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아나스타샤는 상대의 정체를 알고선 김이 팍 샌 표정을 지었다.
“어- 그, 샤다이 말이죠?”
“그래, 고문받았던 영향으로 PTSD가 온 것 같아. 그래서 치료가 필요해. 아샤, 넌 그런 상담을 위한 교육을 받았고 프로그램도 있잖아. 지금은 서둘러서 그녀의 정신적 상처를 치료할 필요가 있어.
일단 그녀를 치료하면 인류는 반격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인류사회에 숨어든 샤다이를 색출할 수 있다.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가 계단을 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함부로 다른 부서에 넘길 수가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믿을 수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그치만 알탄훼아나는 샤다이잖아요. 전 샤다이 심리학에 대해선 몰라요.”
아나스타샤가 대답하는 내용은 타당하지만, 말투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은 영 마뜩잖다. 마치 하기 싫은데 왜 그걸 억지로 시키느냐는 분위기다.
“샤다이는 감정이라던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인간과 유사하니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니예에에, 한 번 해볼게요.”
말은 하겠다고 하는데 왠지 볼멘 목소리다. 빈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도 왠지 거칠게 움직인다.
“뭐야, 너 왜 그래?”
“치이, 기껏 주인님을 안고 분위기 좋았는데 다른 여자 이야기 나오니까 팍 식었어요.”
아나스타샤는 꽤나 빈정이 상했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빈우는 황당해서 말했다.
“알탄훼아나가 왜 여자야….”
“유방 달려있고, 허리 잘록하고, 얼굴 예쁘장하고, 또 그쪽 성별로도 여자라면서요?”
“뭔 소리래. 그래봤자 수렴진화잖아. 인간하고 샤다이는 거의 돌고래와 참치 정도의 관계라던데? 그리고, 유방 달려있으면 우리 여성 팀원들은?”
“어머나, 그건 좋죠.”
아나스타샤의 툴툴거리던 표정이 대번에 생글거린다.
“특히 오다 의원님하고는 꽤 분위기 좋은 것 같던데요? 의원님도 주인님을 조금 개인적으로 신경 쓰시더라고요. 에헤헤, 어딜 봐도 업무 외적인 감정이 꽤 보였어요. 아, 제발 진도 잘나가면 좋겠네요.”
“이거 반응이 영 다르네. 너 아까는 다른 여자가 어쩌고 하면서 확 삐지더니 지금은 또 뭐냐. 완전 좋아 죽네.”
“아니이, 주인님의 앞날에 꽃비가 날리니까 당연히 좋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녀는 타박을 주듯 주인의 머리를 다시 거칠게 쓰다듬었다.
빈우는 아나스타샤가 저런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안다. 그녀는 결국 인공지능인 것이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복종하기 위한. 아무리 주인을 모사하는 인공지능이라 해도 인간에게 시기와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빈우는 아나스타샤가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간을 거슬렀던 적이 있었음을 안다. 정보국으로 들어오면서 인간으로선 해서 안 되는 짓들을 했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빈우 스스로가 상처 입고 괴로워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분노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날뛰었었다.
“어머.”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주인의 양팔이 자신의 등과 허리를 감아오자 작은 비명을 질렀다.
“할거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물어보는 주인의 질문에 그녀가 허둥댄다.
“네? 네? 뭐를요?”
되묻는 질문도 더듬고 있다. 더듬는 단어 사이사이엔 뭔가의 기대감도 느껴진다.
“치료.”
하지만 주인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그 기대는 무너져 분노가 되었다.
“야이씨.”
아나스타샤가 빈우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가 또 아파서 울상을 짓는다.
“할게요. 한다고요. 하면 되잖아. 이 돌머리 진짜. 씽. 나빠. 앗!”
빈우가 그녀를 안고 침대위에 같이 누웠다. 짧은 비명소리를 냈던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이참.”
누워서 작은 소리로 투정을 부리는 아나스타샤의 이마에 빈우의 이마가 닿았다. 그리고 눈썹이, 이어서 코가 맞닿았다. 다음 입술끼리 마주쳐 살짝 열린 틈으로 혀끼리 잠깐 스쳤다.
“앗.”
아나스타샤는 놀래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그…. 처, 첫키스으….”
빈우는 입을 가린 채 더듬대는 그 모습이 귀여워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래.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만졌어도 키스는 처음이네.”
“어? 진짜요. 불쌍한 우리 주인님.”
놀리는 아나스타샤의 귀에서 떨어진 빈우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키득대는 그녀의 목을 더듬던 주인의 손이 멈칫한다.
“주인님?”
빈우의 손이 갑자기 멈추자 아나스타샤가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에 고정된 것을 보고선 멈추었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자신의 목 위로 가져갔다. 빈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슬쩍 빼려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주인의 손을 억지로 붙잡아 자신의 목에 올려다 놓았다.
“자, 보세요. 괜찮죠?”
악몽에 눌린 빈우가 졸랐던 상처는 어느새 완전히 재생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생글생글 웃으며 빈우를 달랬다.
“저도 명색이 군용인데, 그 정도야 껌이죠. 그러니까아. 스킨쉽이 부족하니까 그런 거예요. 좀 더듬더듬도 하고, 만지작만지작도 하고, 기회다 싶으면 인간분들의….”
설교하는 메이드의 가슴으로 빈우의 손이 다가간다. 손이 갈비뼈 부근을 지나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멈췄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대신 쉬익 거리는 체액 순환 펌프의 진동이 느껴진다.
어릴 적 빈우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심장 소리가 안 나는 바람에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죽었다고 대성통곡을 했던 것이다. 그때 엄마와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심장 박동 소리는 수유용 유방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진땀을 뺐었다.
옛날 추억에 잠겨 쓰게 웃는 빈우의 얼굴을 아나스타샤의 손이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 손을 스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아까보다 긴 키스를 했다. 오갈 데를 몰라 잠시 허둥대던 아나스타샤의 손이 빈우의 머리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빈우는 손을 내려 아나스타샤의 치마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제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의도를 가진 움직임이다.
“이야-! 잠깐만요! 잠깐만잠깐만!”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질렀다. 놀라서 소리친 그녀의 무릎이 맞물려서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저기, 나, 아직 없어요.”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한 그녀의 양손은 속옷이 드러난 가슴이 아니라, 치마폭을 붙잡고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뭐가?”
알면서도 물어보는 빈우의 짓궂은 질문이다.
“아아안달았다고요오. 달면 되는데, 이이잉.”
울상을 짓는 아나스타샤는 어쩔 줄 몰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고, 빈우는 거기에 작게 입맞춤을 했다.
“설마, 뉴 소노라에서 달라고 한 게 진담이었어요?”
“아냐, 신경 쓰지 마.”
그러면서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누워 그녀를 팔베개해 줬다.
“난 이래도 충분히 좋은데?”
“…주인님, 죄송해요.”
“죄송하긴.”
빈우는 자신의 품 안에서 미안해서 올려다보는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빈우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서도 아래로는 움찔거리며 헝클어진 팬티와 스타킹을 다시 고쳐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빈우가 키득대자 성난 그녀의 손바닥이 주인의 가슴을 세차게 두들겼다.
“아파아.”
언제나 그렇듯이 아픔은 그녀의 몫이었다. 빈우는 킥킥거리면서도 실쭉샐쭉하는 아나스타샤를 달랬고, 그녀는 그녀대로 주인의 품 안에서 그를 위로했다.
“아샤, 너 옷 입고 그대로 자도 괜찮아?”
“전 익숙해요. 주인님은요?”
“나도 그래. 잘 자.”
“네 주인님. 안녕히 주무세요.”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말은 그렇게 하고선 잠들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또 장난을 칠 셈인가 싶었는데, 그녀의 웃음은 장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인님.”
어느새 그녀의 옷은 프렌치 메이드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러 군데가 자칫하면 위험해질, 위태위태한 의상이었다.
“야, 너 내가 그거 입지 말랬지.”
메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는 주인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빈우가 프렌치 메이드 복을 싫어하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머리가 조금 굵어졌을 때, 아나스탸샤의 기종인 쿠델카 모델이 나오는 포르노 영상을 구한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짧아서 입은 게 더 야해 보이는 프렌치 메이드 복을 입은 쿠델카 모델-아나스타샤가 그려진 표지를 본 빈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것을 구입했다.
그것을 구한 날, 빈우는 같이 자겠다는 아나스타샤를 물리치고 자기 방에서 홀로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었을 무렵, 빈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것을 봤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엄마이자 누나이자 첫사랑이었던 그녀가 영상에 등장함에 소년은 꽤 큰 정신적 충격을 입었다. 그것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 다음 날부터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망쳤고, 그 기간도 제법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그 상처는 아물어 갔지만, 단 하나, 프렌치 메이드 복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빈우는 아나스타샤가 프렌치 메이드 복을 입는 게 정말 싫었다.
“왜 입으면 안 되는데요? 주인님은 이게 싫어요? 왜 싫은데요?”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숙여 빈우의 코를 살짝 핥았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내려와 빈우 옆으로 드리운다. 빈우의 손이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잡아당겨 자신의 품안에 집어넣으려는 듯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