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빈우는 그저 이대로 있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녀도 계속해서 빈우에게 부탁했었다. 이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빈우는 그럴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을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도망치기는 싫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요?”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이 빈우의 미간을 꾸욱 눌러 펴려고 한다. 그리고 찡그린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지금은 그냥 즐기세요. 편안히.”
빈우는 그녀의 말대로 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어디서 봤더라….’
뭔가 섬뜩함을 느낀 빈우가 눈을 감았다. 뭔가 생각날 듯 말듯 아련하다. 기억에서인지 기록에서인지 기시감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 빈우의 목덜미에 아나스타샤의 입술이 스친다. 그의 가슴팍을 훑고, 마지막으로 배를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머리에 빈우의 손이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앗!”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아나스타샤를 빈우가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과거의 기억이, 잊혔던 기억이, 빈우가 잊고 싶어 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그래, 이런 적이 있었지. 내가 아나스타샤를 덮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야.”
여동생의 피스메이커 인형 덕에 그날의 일은 그냥저냥 넘어갔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 아나스타샤가 빈우의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사랑스러운 도련님의 몸 위로 올라와 여기저기를 핥았다. 빈우는 무서웠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밑바닥에 가라앉혔던 불쾌한 기억을 다시 떠올린 빈우는 머리를 거세게 흔들더니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한 존재를 붙잡고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고향의 침대다.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의 방이다. 창밖으로는 고향의 보리밭이 바람을 받아 물결치고 있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바닥으로 집어 던진 다음 발로 걷어찼다.
“아악!”
고통에 찬 비명 소리. 하지만 빈우는 차갑게 내려다볼 뿐이다.
“발 가르단 하스에게 빚을 졌네.”
그 말에 아나스타샤의 형상이 경악해서 올려다본다.
“역시 그래. 발 가르단 하스와의 대화는 못 들었나 보군. 그럴 법도 하지. 그때는 놈이 내 머리를 직접 조작해서 한 대화였으니까. 그래도 알탄훼아나와의 대화는 들었으니 이렇게 직접 행동을 시작한 거겠지?”
일어나 도망치려는 그녀의 다리를 빈우가 걷어찼다. 그리고 나동그라지는 그 존재를 발로 짓밟았다.
“도망치려고? 그럴 바에 아예 이 세계를 없애보시지? 이 꿈을 깨게 해보라고.”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뭔가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겁먹은 눈빛으로 빈우를 올려다보았다.
“잘 안 되냐? 당연히 안 되겠지 씨발, 내가 이런 훈련을 얼마나 좆같이 했는데. 내 안에 흙발로 들어온 건 좋아. 근데 이젠 어떻게 나갈래? 응?”
메창같은 세뇌성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요원들의 정신방어 훈련은 매우 강력해서 심리 치료마저 거부할 정도다. 군사정보국에서도 이 과정을 끝까지 수료한 요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것이 빈우가 울토르 프로젝트에 뽑힌 이유이기도 했다.
빈우의 손이 사랑스러운 금발을 잡고 들어 올린다. 비명 소리, 고통스러운 얼굴, 애원하는 목소리. 그러나 빈우는 전부 무시하고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창틀을 통째로 부수고 바닥으로 떨어진 아나스타샤는 꿈틀거리고 있다.
“아아…. 아아아.”
신음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는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빈우가 뛰어내렸다. 그리고 겁에 질린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뛰어.”
그 말에 아나스타샤가 겁에 질려. 부르르 떨었다.
“도, 도련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좆까 씨발아. 살고 싶으면 도망쳐봐, 아니면 나를 공격해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달렸다. 허겁지겁 도망쳤다. 하지만 그것을 서서히 쫓아가는 빈우는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있다. 창고다. 그 안으로 얼굴을 굳힌 빈우가 따라 들어갔다.
“그래, 그렇겠지.”
엄마가 죽은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샤프트에 엄마의 피와 살점이 묻어 사방으로 휘날리고 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샤프트 너머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 하지만 나직한 승리의 미소. 그걸 본 연방의 군인은 실소했다.
“어디서 씹지랄을….”
빈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샤프트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경악하는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어, 어떻게, 아악!”
아샤의 비명 소리는 언제 들어도 싫다.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다. 하지만 빈우는 아나스타샤를 들고 샤프트로 다가갔다.
“말해, 이번이 몇 번째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빈우가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맹렬히 돌아가는 샤프트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말려 후두둑 뽑힌다. 그걸 본 아나스타샤가 겁에 질려 애원한다.
“주인님, 도련님!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눈물을 흘리며 주인에게 매달리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샤프트에 닿았다. 불쾌한 소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고, 사방으로 살점이 튀었다. 푸른색 피와 살점이다.
“크아아아-!”
샤다이가 비명을 지른다. 빈우의 안에서 상처를 헤집고 계단을 쌓으려던 놈이 되려 고문을 당하고 있다. 빈우는 면상이 박살 난 놈을 뒤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놈을, 푸른 피투성이가 된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보았다.
“말해, 이번이 몇 번째야.”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한 샤다이는 곧 모습을 멈췄고, 서서히 희미해졌다.
“헉!”
짧은 비명과 함께 빈우가 잠에서 깨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급히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곤히 자고 있었다. 빈우의 손이 조심스레 뻗어져 그녀의 머리로 향한다. 조금만 가면 닿을 수 있건만, 빈우는 차마 그녀의 머리를 만지지 못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빈우는 떨리는 손으로 마침내 그녀의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니 목이 멘다. 불현듯 군사정보국 시절, 잠수하기 전의 자신의 영상기록이 떠올랐다. 아나스타샤를 도구로도 보지 않고 매몰차게 대하던 자신의 모습. 자신의 행동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기록. 빈우는 그것을 보며 이유를 분석했다. 왜 자신이 어머니이자 누이, 그리고 연인이었던 그녀를 그렇게 대했는지.
“너만큼은 지켜주고 싶었어.”
어느새 마음속의 생각이 말이 되어 새어 나온다. 행여 자는 그녀에게 들릴까 싶어 빈우는 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때의 빈우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이 가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그녀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만큼은 자신의 곁에서 떨어져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었던 것이다.
‘겁쟁이 새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면 명령을 내리면 되었을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면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빈우는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그저 보고만 있었듯이,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듯이, 그저 아나스타샤를 옆에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알량한 투정을 부렸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아낸 빈우는 자신을 경멸했었다. 겁쟁이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쓰레기.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어 했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또 다른 불안감이 생겨났다.
‘정말 그것 때문에 내가 아샤를 거부했을까?’
새로운 불안감의 정체는, 혹시 군사정보국 시절의 자신에게 이미 워프 비스트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군사정보국 요원들은 영상과 음성기록만을 가진다. 당연히 당시의 감정이나 생각은 남지 않고, 꿈도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워프 비스트가 방금처럼 빈우의 꿈에 나타났다 해도 빈우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설마 악몽이, 샤다이의 계단 쌓기가 무의식에 작용해 내가 아샤를 밀어낸 건 아니었을까.’
알 수 없다. 예리하게 찾아낸 정답일 수도 있고, 증거 없는 억측일 수도 있다. 답을 찾기에는 단서가 너무나 부족하다. 이를 알아보려면 알탄훼아나가 제 능력을 되찾거나, 발 가르단 하스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발 가르단 하스에선 나에게 별다른 언급이 없었었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을 지새웠다.
* * *
“안녕하세요, 알탄훼아나 씨. 저는 김 빈우 소령님을 모시는 안드로이드 아나스타샤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알탄훼아나 씨의 치료를 맡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나스타샤는 알탄훼아나의 치료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샤다이는 인간과 유사한 감정 체계를 가져 상담 치료는 꽤 효과적이었고, 조금 다른 부분이 있으면 아나스타샤가 즉석에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치료에 도입했다.
“놀라워, 아나스타샤. 너 정말 다재자능하구나.”
감탄하는 모니카.
“에헴, 이래 봬도 의사 자격증도 있답니다.”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아나스타샤.
“닥치고 비켜봐.”
틱틱거리는 빈우. 그의 뒤로 밀려난 두 여인에게서 야유가 쏟아진다. 하지만 빈우는 아랑곳 않고 알탄훼아나 앞에 앉았다.
“차도가 조금 있나?”
원래 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다. 장기간을 보고 꾸준히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알탄훼아나의 눈빛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얼굴을 익히고 도움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계단은 보이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 템포 늦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직은.”
“뭐야. 그럼 아직 제자리잖억!”
시시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는 빈우의 머리가 뒤로 벌컥 젖혀진다. 아나스타샤가 두 손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치료 중인 환자에게 무슨 지랄이신가요. 좀 짜져주세요.”
날 선 아나스타샤가 빈우를 질질 끌고, 발로 밀어가며 침대에서 떨어트렸다.
“알탄훼아나 씨? 우리 주인님이 조금 싸가지가 없어요. 제가 사과할게요.”
“응? 아, 괜찮아. 고마워.”
미소 짓는 안드로이드와 역시 마주 미소 짓는 샤다이. 그 모습을 보며 빈우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기 아나스타샤 선생님, 친절한 질문은 가능합니까?”
“네에, 너무 자극적이지 않으면요.”
다시 빈우의 시선이 침대에 앉은 샤다이에게 향했다.
“과거 네 행적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겠어?”
“그런 거라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얼마든지.”
빈우가 밀려난 의자를 다시 끌고 와 가까이 앉았다.
“피에르 라캉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지?”
인류 연방군의 보안국 중령 피에르 라캉과 샤다이의 호민관 알탄훼아나는 이전부터 협력관계였다. 서로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고, 라캉 중령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 한해 그녀와의 정보를 공유하려고 했었다. 물론 빈우에게도 신호를 주었지만 아쉽게도 빈우는 그것을 받지 못해 결국엔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다.
“아, 그 말인가. 그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는군. 너희들의 말로는…. 그래, 프리마라고 부르는 행성이었다. 거기서 시작되었지.”
프리마. 빈우도 아는 곳이다. 폐 속에 호흡 보조용 곰팡이를 키우는 곳. 클론의 동기화된 기억으로부터 알아낸 다음 목적지 중 하나. 클론이 워프 비스트를 추적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이상 알탄훼아나에게서 그 행성의 이름이 나와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선조들이 그대의 종족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쓰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대들 유에네스…. 흡.”
무심코 유에네스란 단어를 입에 담은 알탄훼아나가 놀라서 입을 닫았다.
“왜 그래? 너흰 이전부터 우리 인류를 유에네스라고 불렀잖아. 사전에도 없던데, 그건 혹시 멸칭인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의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딱히 나쁜 뜻을 가진 단어는 아니다. 원래는 고대 문학에서 쓰였던 합성어이고, 요즘에 와서 쓰는 용도가 단지 조금…. 아, 그리고 지금은 사어다. 그래서 그대들을 칭할 때만….”
“말해봐. 괜찮아.”
거듭되는 빈우의 권유에 알탄훼아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으음, 끝을 맺는 자. 종결하는 자. 대충 그런 뜻이다.”
“터미네이터 이 씨발년아.”
빈우는 무심코 솔직한 감상을 뱉은 대가로 앞으로는 겁먹은 여인 하나를, 뒤로는 분노한 여인 둘을 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