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좋아, 종족명 그건 그렇다 치고. 프리마에 대해 말해봐.”
알탄훼아나는 부하들에게 묵묵히 두들겨 맞는 빈우의 모습에 조금 놀랐으나, 이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 나는 너희들 종족과의 접촉에서 그 가능성을 높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중앙정부의 손길로부터 먼 변경일 것, 그리고 아군 적군 가리지 않을 정도로 도움이 절실할 것 등이지.”
하긴 그녀 말대로 살기 힘들고 연방 중앙의 도움이 닿기 힘든 곳이라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경우엔 연방정부의 허가 없이 외계인과 접촉한다 해도 사후 허가란 형식으로 유연하게 넘어가 준다.
그리고 프리마는 점프 게이트에서 상당히 떨어진 깡촌이고, 개척에 상당히 난항을 겪었기에 알탄훼아나의 조건에 부합되는 곳이었다.
“프리마를 접촉지로 고른 나는 정체를 숨기고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개척민들의 문제를 파악한 다음, 그곳에서 원래부터 자생하고 있던 곰팡이들에게 부탁해 너희 종족의 폐 속에 살며 숨 쉬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지.”
“잠깐, 곰팡이에게 부탁했다고? 개조한 것이 아닌가?”
빈우의 지적에 알탄훼아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제스쳐가 인간의 행동을 흉내 낸 건지 샤다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의미는 통했다.
“아니, 대화를 해서 삶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인류의 폐에서 그들과 같이 살아달라고 말이지.”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빈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어, 설마 그것들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지능을 가진 생명체였던가?”
“아니. 너희 종족의 기준으로는 아닐 거야. 그저 곰팡이야. 하지만 우리 종족은 그게 가능해. 아, 지금 같은 중급 수준의 대화는 아니고, 그들만의 방식에 따라 우리가 맞춰주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그녀는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프리마의 개척민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연방이 눈치를 채고 피에르 라캉이 수사를 하러 온 것이다.”
이건 조금 이상하다. 외계인과의 접촉은 보안국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군사정보국의 일이다. 하지만 다른 수사를 하다가 겹쳤을 수도 있으니 빈우는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다행히 피에르 라캉은 너희 유에- 흠흠, 인류와 내 종족 샤다이 간의 평화적인 교류를 바라는 사람이었고, 나 또한 그랬기에 우리 둘의 거래는 느리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빈우가 아는 라캉 중령은 울토르 프로젝트에 자원할 정도로 외계인 척결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샤다이와 협상을 한다니 이상하다.
‘임무라면 본심을 숨기거나 속이는 건 쉬운 일이긴 한데, 그게 본심이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순 없지.’
그러고 보니 라캉 중령은 빈우가 자신의 클론에 쉬바를 주입하는 실험을 본 뒤로 약간 사람이 바뀌긴 했었다. 아니면 다른 뭔가가 계기가 되어 외계인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라거나.
“나는 라캉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단순한 정보거래를 넘어 협력관계까지 가지게 되었지. 물론 그 과정을 서로 각자의 종족에게 비밀로 했음은 물론이다. 내 종족은 너희 인류를 공격하고, 너희 종족은 적대적인 종족에게 자비심이 없었으니까.”
빈우는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왜 보안국 소속의 피에르 라캉은 이런 고급정보를 얻고도 비밀로 감췄을까. 수상한 퍼즐들이 점차 맞춰질 기미가 보인다. 그는 빈우가 부상할 때조차 본인이 아닌 허수아비를 보냈었고, 결국 아내와 아들을 잃고 폐인 상태가 되어 보안국을 이탈, 태스크포스 373으로 오려고 했었다.
‘게다가 그는 그때 이미 워프 비스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에게 가족의 행방에 대해 물어본 다음, 자신의 허수아비 아를르캥에게 만약을 대비한 계획을 입력해 두었다. 라캉 중령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긴 그가 진실을 알았다 한들, 전 상원의장이었던 이케가미 소이치로조차 운신이 어려웠던 상황이다. 일개 중령인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되었으리라. 라캉 중령이 속했던 보안국이 몹시 수상하긴 하지만 확증이 없어 난감하다.
그때 마침 알탄훼아나도 워프 비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떠나간 우리 선조와 워프 비스트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설명을 듣던 피에르는 자신의 아들이 워프 비스트가 되어간다는 말을 했고, 나는 진실을 밝혔지. 그리고 치료법도 전해 주었지만, 이미 늦었는지 그의 아들은 연방의 기밀 시설에서 치료라는 명목하에 실험체가 되었다는군. 아내도 그때부터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을 했다.”
치료법이란 말에 빈우는 물론이고 뒤에 있던 모니카마저 침을 꿀꺽 삼켰다. 워프 비스트의 치료법은 매우 중요한 사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빈우는 그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협력관계에 있었던 라캉을 죽인 이유는 뭐지?”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이 라캉을 죽였던 날, 그리고 빈우에게 사로잡혔던 날.
“라캉은 자신 또한 적셔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는 가족의 일 때문에 서서히 계단이 생겨가다 그날 결국 마지막 단계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 김 빈우 그대와 처음 만났던 곳에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빈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피에르 라캉의 죽은 얼굴을 기억한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피에르 라캉의 생전 마지막 모습도 떠올랐다. 아내 마리 라캉과 아들 자크 라캉의 마지막 행선지가 마카로니라는 것을 안 피에르 라캉은 빈우에게 그들의 생사를 물어보았고, 사망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듣고 휘적휘적 떠나갔다.
아마 빈우의 대답이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피에르 라캉은 이전에 나에게 부탁을 했었다. 자신이 워프 비스트가 된다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나는 그의 몸에 오는 선조들을 막으려고 갖은 방법을 썼지만 이미 피에르 본인이 의지를 잃어버린 판국이라 효과가 적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동지를 내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지.”
그러면서 알탄훼아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서 있던 곳은 달랐지만, 한때나마 같은 곳을 바라보았던 협력자를 죽인 자신의 손을.
“흐음, 설마 그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오스카 스테이션까지 왔단 말인가?”
그날 알탄훼아나 일행이 끼쳤던 피해는 꽤 컸다. 소수의 샤다이였지만 전부 리퍼 무장을 하고 있었고, 함선도 없이 점프해 들어온 기습이라 스테이션 방위대는 속절없이 당했다.
“그곳에 있던 선조들을 처리할 겸 갔었다. 비교적 안전한 작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대들이 큰 변수였지.”
그러고보니 알탄훼아나는 스미스 일가를 집요하게 노렸었고, 이후 그 가족들은 전부 워프 비스트로 변했다.
“그렇다면 그날 죽은 사람들은 모두 워프 비스트였단 말인가?”
“그래, 대부분 워프 비스트가 되기 직전의 사람들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위험하게 저항하는 자들에겐 어쩔 수 없이 반격했다.”
오스카 스테이션에서 있었던 일의 의문이 해결된 빈우는 이어서 오브리가도에 있었던 탈출극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까 네가 알려줬다는 치료법 말인데. 그것은 설마 뉴 소노라처럼 인간의 신경계에 플라스마를 접속시키는 것인가?”
질문하는 빈우의 귀로 고온의 플라스마에 소멸하는 아이의 비명이 아련하게 들려온다.
“아니, 그건 이쪽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 저쪽의 계단을 부수는 것이지. 치료는 다른 방법이야. 정확히는 치료라기보다는 이쪽 계단의 생성을 느리게 해서 적셔진 자의 면역체계가 스스로 이겨내도록 돕는 것이다. 게다가 이 치료법도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어린이에게 선조들이 내려올 경우에만 그나마 효과가 있다.”
“어른과 어린이는 어떤 차이가 있지?”
“계단의 난이도가 다르지. 어린이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또 쉽게 계단이 생기며, 그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한다. 음, 비유하자면 아직 토양이 물러 계단을 놓기 쉽지만, 동시에 무너지기도 쉽단 의미야. 성인의 경우엔 이미 생긴 계단을 되돌리긴 힘들어.”
즉 그녀의 치료법은 어린아이에게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에르 라캉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득 치료 대상자 명단이 떠오른다. 자크 라캉, 엘리자베트 허드슨, 하비에르 부뉴엘, 응우옌 반쭝. 모두 아이들이다.
“알탄훼아나. 그 치료법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준 적 있나?”
“민감한 것이라 내가 일부러 퍼트리진 않았다. 피에르 라캉이 몇 다리 걸쳐 정보를 흘렸고, 이를 안 환자와 가족들이 내가 있던 프리마로 찾아와 치료법을 받아 갔다.”
그녀의 말은 클론이 얻은 정보와 일치한다. 아직 어린이에게만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를 연방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대단한 성과다.
“그 치료법을 알려다오. 우리 종족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너희 종족의 어린 생명에게 계단은 쉽게 생길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치료 방법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우리 샤다이 중에서도 나 같은 호민관은 되어야 쓸 수 있는 고급기술이지.”
“정확히 어떤 방법이지?”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올 들어 보였다.
“이 부분을 떼어내 적셔진 자의 주변에 두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듣고 잠시 알탄훼아나의 눈을 마주 보던 빈우는 조용히, 그리고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씨발, 너 내가 우습지.”
으르렁거리는 빈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니카와 아나스타샤가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팀장을 말렸다.
“잠깐만요, 주인님. 일단 들어봐요. 뭔가! 뭔가 있을 거예요.”
“팀장님! 스토옵! 폭력은 안돼요. 그녀는 치료중이에요.”
“왜, 왜 그러나. 왜 화를 내는 건가.”
빈우는 겁먹은 세 여인 사이에서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머리카락을 떼서 놓는 게 고급기술이냐?”
“으응? 어째서? 이 방법은 별심장의 불길을 다룰 때 쓰이는 기관을 사용해 아이 몸속에 있는 계단에 공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장에 맞춰 생성을 방해한단 말이다. 물론 어른들의 단단한 계단에는 쓸 수 없는 방법이긴 하지만 시전자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에 고급기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맞아요, 저건 그냥 모발이 아니에요. 인간과는 다른 신경 기관이 분포한-.”
알탄훼아나와 모니카의 설명에 빈우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했다.
“아하, 그렇군. 이해했다. 아주 고급기술이군. 그러면….”
납득한 빈우는 주제를 바꿔 다음에 질문할 내용들을 조심조심 골랐다. 알탄훼아나에게 물어볼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간신히 제정신을 되찾고 치료 중인 그녀에게 무리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중요한 것부터 질문해야 한다. 대상이 한정적인 치료법은 중요도가 비교적 낮아 다른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알탄훼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나는 발 가르단 하스로 갔다. 현자인 그라면, 별심장 그 자체인 그라면 해결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지.”
발 가르단 하스. 오브리가도에서 헤어진 빈우와 알탄훼아나가 각자 간 곳이며 둘은 거기서 재회했다. 그리고 빈우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 잠깐 만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겉핥기로나마 배우기도 했다. 워프 비스트는 적셔진 자라는 것, 그리고 알탄훼아나의 선택의 흔적을 자신도 본 것.
“알탄훼아나. 네가 오브리가도에서 탈출할 때 워프 비스트를 부른 것은 너였나?”
빈우가 특수전 사령부를 떠난 직후, 24함대원들은 워프 비스트로 변해 난동을 부렸고, 알탄훼아나는 그 틈을 타서 탈옥했다. 그 사건의 여파는 꽤 컸다. 또한, 그날 일이 나비효과가 되어 연쇄 폭발을 터트린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아냐. 내가 왜 선조를 부르겠나. 그건 십중팔구 망할 선친의 짓일 거다.”
알탄훼아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하긴 선조 귀환 반대파인 그녀가 굳이 워프 비스트를 불렀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친이란 말 역시 그날 그녀에게서 들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샤다이 호민관 알탄훼아나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샤다이의 집정관인 체메트디오프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리고 빈우 역시 놈을 싫어한다. 포말하우트 게이트에서 울토르 중대를 습격해 자신에게 한 방 먹인 놈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체메트디오프는 빈우와 알탄훼아나에게 수많은 악영향을 끼친 공적이랄 수 있는 존재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