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어찌 되었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군.”
“도움? 흥. 놈이 나를 도운 것은 결코 선의가 아니다. 뉴 소노라의 일을 모르나?”
알탄훼아나의 이글거리는 말에 빈우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다시금 파악했다.
오브리가도를 탈출한 그녀는 발 가르단 하스로 갔고, 거기서 계단을 부수는 방법을 배웠다. 그다음 워프 비스트에 습격받는 뉴 소노라에 나타난 알탄훼아나는 빈우와 함께 계단을 부쉈다. 그리고 그 계단이 부서지는 광경은 체메트디오프의 계략에 의해 귀환 찬성파와 반대파들에게 드러났고, 이 충격적인 광경을-선조의 귀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을-본 두 파벌은 동족상잔의 전투를 벌이다 난입한 지구제국에게 몰살당했다.
또 지구제국조차도 그날 자기들끼리 싸웠다. 놈은 대체 몇 가지 수를 가지고 몇 가지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까.
“꽤나 치밀한 놈이로군.”
빈우의 솔직한 감상에 알탄훼아나가 콧방귀를 뀐다.
“치밀이라고? 웃기는 소리. 빈우 그대는 놈의 악의를 아직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겨우 그 정도로 치밀을 논하지 말라.”
‘아니, 본 적은 있는데 기억이 안 나.’
빈우는 놈의 다른 공격을 이미 겪었지만, 그 말은 차마 나오지 않고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포말하우트에서 체메트디오프는 과연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까.
“어찌 되었건 놈은 죽었으니 안심할 수 있군.”
빈우는 비홀더 1전대장의 손에 들린 체메트디오프의 머리를 보았다. 원흉 하나가 죽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그러나 알탄훼아나는 그러지 못했다.
“죽어? 놈은 죽지 않아. 아니지, 정확히는 죽어도 죽어도 동족의 몸을 빌려 되살아난다. 마치 선조가 그대 종족의 몸을 훔치는 것처럼, 집정관은 자신이 죽어도 동족의 몸에서 다시 부활한다.”
이건 듣던 중 좆같은 소리다.
“부활한다고? 놈이?”
“그래, 내가 아는 것만 적어도 네 번이다. 비홀더 전대장의 손에 꽤 죽었… 어엇.”
거기까지 말하던 알탄훼아나가 말을 더듬었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체메트디오프를 죽인 비홀더 1전대장 이 섬은 알탄훼아나 그녀도 고문했었다.
“괜찮아?
“물론, 이다. 나는 괜찮다.”
다가서며 물어보는 빈우에게 알탄훼아나는 이를 악물며 웃어 보였다. 그때 빈우 옆으로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레 나섰다.
“무리하지 마세요, 알탄훼아나 씨.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아니, 정말로 나는 괜찮아. 더할 수 있어.”
“알탄훼아나 씨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좋은 치료법이에요. 하지만 그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해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다간 오히려 역효과에요.”
“…조금만 더하면 안 될까?”
오기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빈우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게.”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런데 혹시….”
“괜찮아. 그녀의 상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야.”
주인의 장담에 메이드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빈우는 오늘의 마지막 질문을 조심스레 골랐다. 중요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으로.
“어쩌면 때늦은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너희 샤다이는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
고대의 샤다이는 워프 비스트란 존재로 현생 인류에게 돌아온다. 뉴 소노라에서 알탄훼아나는 그 과정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귀환 찬성파는 인류에게 고통을 주어 계단을 만들기 쉽도록 하고, 반대파는 아예 내려올 종족 자체를 없앤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전에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긴, 그것에 대해선 알아볼 겨를이 없었죠.”
모니카가 의외의 질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다이는 인류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공격을 시작했고, 연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세 번의 대화를 시도했다. 당연히 대화는 불발로 끝났고, 그 결과 사태는 이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연방은 삼진아웃제를 도입하고 있는 만큼, 교섭이 안 되는 상대에겐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때부턴 오직 피화 철의 대화만 강요할 뿐이다.
하지만 알탄훼아나 덕에 샤다이의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된 지금은 싸우게 된 경위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 드디어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할 때가 왔군.”
알탄훼아나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하고 심호흡을 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텐데 괜찮겠나?”
빈우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알탄훼아나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종족의 눈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빈우를 바라보는 알탄훼아나의 눈에는 무언가 터부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보이는 망설임과 혐오감마저 비쳐 보였다.
“그래, 가시광선뿐만이 아니라, 전자기장이나 중력파도 관측 가능한 기관이라고 말했지.”
“맞아. 덕분에 우리는 별들의 소리를 듣고, 사물의 바람을 느낄 수 있으며, 우주의 흐름을 본다. 그래, 우리 샤다이는 태초의 파동이 우주의 끝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대의 종족 시간으로 만 년 정도 전의 일일 것이다.”
말하고 있는 알탄훼아나의 손이 침대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불안해한다는 의미다. 빈우가 슬쩍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니 그녀는 아직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갑자기 메아리가 사라졌다. 그날 선조들은 메아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했었고, 그 사건 이후에 태어난 우리 동포들 또한 메아리를 보지 못했다. 더 이상 우리 샤다이의 눈에 탄생의 메아리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메아리라고….”
알탄훼아나가 말한 것을 조합해 보면 그 메아리란 아마도 빅뱅의 우주배경복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것은 현 인류에게도 관측 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우리 인류에게도 아직 관측되고 있어.”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턱 끝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피에르 라캉도 그런 말을 했지. 하지만 그 메아리는 단순한 전파가 아니야. 중력파를 포함한 좀 더 복잡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았지. 간단했어. 메아리가 부딪혀 돌아올 끝이 사라져 버렸던 거야. 그대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우주라는 풍선이 팽창을 계속하다가 터져버린 셈이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두 인류는 자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우주의 미래가 에너지 소멸로 얼어붙는 것처럼.
“어-- 그거 우주 멸망 시나리오 중 하난데, 빅뱅 이후 팽창하던 우주가 그 반발되는 수축으로 멸망하는 게 빅 크런치, 팽창을 계속하다 양성자 붕괴까지 가서 멸망하는 게 빅 프리즈 아니에요?”
모니카가 말한 것은 보편적인 우주 멸망의 시나리오들이며, 모두 가설이지만 멸망이 온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설명하고 있다.
“그래,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지금의 인류에겐 시간적 의미가 없을 만큼 먼 미래지. 모든 물질들이 블랙홀화한 다음이니까. 근데 그게 만 년 전에 일어났다고? 벌써?”
빈우의 말대로 이 우주는 멸망한다. 그러나 그 시기는 억이나 조, 경, 해의 단위로도 계측이 불가능할 만큼 오랜 기간이 흐른 뒤다. 즉 지금으로선 의미 없는 이야기란 말이다.
하지만 샤다이인 그녀들에겐 달리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피에르 라캉에게도 말한 내용이지만… 그 멸망은 그대들 인류가 아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우주의 가장자리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때문에 그대들의 과학 기술로는 가늠하기가 곤란하지. 하지만 이 우주의 가장자리가 붕괴한 것은 사실이고, 멸망이 확정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멸망은 언제지?”
만 년 전에 이미 징조가 보였다면 심상치 않은 사건이다. 그 빈우마저도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나올 지경이다.
“너희들의 계산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장수하는 우리 샤다이에게도 종족의 멸망 후에나 올 먼 미래의 일이지. 하지만 선조들은 달랐다. 공포에 휩싸였어. 그래, 너희 종족들의 시선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선조들과 우리의 눈엔 이 우주가 멸망하는 것이 보인단 말이다. 메아리가 사라져 식어가는 우주가 보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죽음의 색이야! 이런 죽음이 실제로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그대들은 결코 몰라! 때문에 선조들은 이 죽어가는 우주로부터, 멸망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계단을 만들어서 말이지.”
빈우의 지적에 흥분하던 알탄훼아나가 약간 흠칫했다. 뉴 소노라에서는 선조들이 그저 멸망으로부터 도망쳤다고 했는데 이런 자세한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의 경련이 심해지는 게 안 좋아 보인다. 뭔가 정신적 부담이 되고 있단 증거다. 광각시야로 보니 뒤쪽의 아나스타샤가 이야기를 이쯤에서 멈추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알탄훼아나가 심호흡을 하더니 자기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선조들은 일만 년 전 계단을 만들어 다른 우주로 도망갔다. 그리고 당시에 도망치지 못하고 남은 자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들이지.”
빈우는 이번 이야기를 끝맺기 전 지금이라도 점프에 대해 묻고 싶었다. 샤다이식 공간 항행법을 알면 인류는 보다 안전한 점프를 할 수 있고, 미래를 구할 수 있다.
“그러면 그때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왜 이 우주에 남은 거지? 운명을 받아들인 건가?”
“지금은 받아들였지만, 그 당시엔 남은 게 아냐! 버림받은 거다. 선조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만 몸을 변형해 계단을 올라갔고, 그것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이 죽어가는 우주에 그대로 남았어. 그래, 많은 이들이 버림받았다. 기술과 문화의 전승이 끊기고, 사회가 붕괴되었다. 조각조각 나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찬란했던 영광은 빛바래어 사라졌고, 우주를 호령했던 기술은 실전되었다.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후손들은 남은 부스러기들만 모아 이 죽음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연명했지.”
빈우의 질문에 알탄훼아나가 발작하듯 외쳤다. 그때가 샤다이의 쇠퇴기였을 거다. 기술등급이 9등급에서 8등급으로 1단계 하락했을 무렵이다. 무리도 아니다. 현재 연방의 군인에게도 자신이 쓰는 코일건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만들지 못한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는 그만큼 분업화가 심해져 자신의 영역 외의 기술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알탄훼아나, 넌 분명히 모든 선조들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라고 했었지?”
“그래, 계단을 통해 올라가던 선조 중 실패한 자들은 다시 내려왔고, 계단을 이동 수단으로 쓰던 후발종족의 몸을 훔쳐 썼지.”
알탄훼아나의 설명에 나오는 종족은 뉴 소노라에서 봤다. 보고 싸우기까지 했다. 놈들은 이케가미 소이치로가 닫은 계단을 다시 만들기 위해 뉴 소노라의 개척민들을 제물로 삼았다.
“흥, 그렇게 계단을 내려온 자들은 괴물 그 자체였어. 후손들에게 비웃음이나 동정을 받는 괴물이었지.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그대의 종족이 약진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알탄훼아나가 말한 시기는 지구제국의 건립일 것이다. 그날, 기업 연합체의 총수였던 자가 최초의 지구 통일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황제라는 단어보다 그때부터 시작된 기술의 폭발이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가려 뽑아낸 천재들, 빛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원석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자마자 샘솟듯 발명과 발전의 격류를 뿜어냈고 거기에 밀린 사람들은 미래의 시대로 흘러갔다.
기록에 따르면 하루하루가 달랐다고 한다. 오늘의 신기술이 내일은 고고학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며 그때까지 이뤘던 인류의 발전보다 제국 시절의 발전이 더 컸다고 한다. 고작 24년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대들의 황제가 이룬 업적인 실로 놀라웠다. 그리고 우주로 진출하려던 그는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낸 계단을 발견했다. 그가 다른 우주로 가는 계단의 원래 목적을 파악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계단끼리의 이동은 순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내곤 이동 수단으로 썼지.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거기까진 다른 종족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기까진 뉴 소노라에서 했었던 이야기다. 그것을 다시 꺼내는 것을 보면 당시엔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꺼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넌 그때 제국의 황제가 선조들의 귀환을 막았다고 하지 않았나?”
빈우의 말대로 그날 알탄훼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황제는 계단을 통해 고대 샤다이들이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고, 또 막았다고 했다. 게다가 이 섬의 말에 의하면 비홀더 전대는 워프 비스트의 정체를 알고는 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는 분위기였다.
“맞아, 그때까지 다른 종족의 몸을 통해 뒤틀려 내려오던 선조들이 너희 종족의 몸으로는 정상적으로 내려왔다. 이것이 귀환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렬히 다투게 된 계기이기도 했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오늘날의 샤다이들은 선조들이 떠난 이후 과거의 영광을 잃은 채 독립적인 가문을 이뤄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선조가 제대로 돌아올 수 있는 종족인 인간이 계단을 사용하자, 그때까진 그냥저냥 지내왔던 두 파벌의 다툼이 본격화되었으니 샤다이의 눈에는 인간이 좋게 비칠 리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