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몇몇 선조들이 그대들의 종족의 몸을 통해 정상적으로 내려오자, 동포들 사이에선 일대 소란이 일었지. 도망쳤던 선조들이 정상적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계단을 내려온 자들은 대부분 제거당했다고 들었다. 황제가 눈치채고 손을 쓴 거지.”
지구제국의 황제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샤다이들의 귀환을 알 수 있었을까, 빈우는 궁금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현재 인류 연방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아마 당시에도 비밀리에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선조들의 귀환 그 자체를 막았다고 들었다. 저쪽 우주의 계단을 부순 기미는 없었는데 어떻게 막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사건은 그때부터였다. 황제가 우리 종족에게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대들의 입장에선 반격이겠지.”
거기까지 말한 알탄훼아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꽉 쥔 손으로 컵을 받아 조심스레 물을 마셨다. 긴장했는지 약간의 물이 입가를 타 흐른다. 알탄훼아나는 초조한 손길로 입가를 닦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반격이 시작되면서부터 지구제국의 군대들은 우주로 퍼져나갔다. 수는 적었지만 위력은 치명적이었지. 그리고 놈들은 우리 동포들을 사냥했다. 어떻게 손쓸 틈도 없었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너희 제국과 같은 은하계에 있던 동포들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연락이 끊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대화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남겨진 마지막 연락엔 유에네스란 단어만 있었다.”
유에네스, 샤다이어로 종결자란 뜻이다. 샤다이가 그토록 당했다면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하다.
“그래서 각 가문에서 인원을 갹출해 조사단과 구조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동포들의 연락이 끊긴 곳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주하고 말았지, 유에네스를. 왜 연락의 마지막에 그 단어만 있었는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구조대는 자신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고 한다.”
말을 하던 알탄훼아나는 무릎을 당겨서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정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자세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제국의 병사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놈들은 멸망의 힘을 쓴다. 그대들은 타키온이라 부르던가? 빛보다 빠른 입자. 그것은 원래 3차원의 존재들은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다 한들 시간축이 달라 접점이 없어. 그런데도 놈들은 그것을 쓴다. 우주의 가장자리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타키온을 잡아서 물질계에 쑤셔 박는 것이다. 이미 터져버려 반사될 리가 없는 끝에서 온 입자를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냐. 그들이 쓰는 무기 하나하나가 물리법칙을 위배하고 있다. 기술의 차이가 아니다. 놈들은 3차원의 존재인 우리들이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거야.”
비홀더 전대의 무기가 이해불가능의 영역에 있고, 그것은 샤다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탄훼아나의 말을 들어보면 샤다이의 기술은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어디까지나 같은 법칙 안에서 위에 있는 것이고, 비홀더 전대는 아예 법칙 바깥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계속 학살이 진행되면 머지않아 우주에 퍼진 우리 종족은 멸망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이었어. 그대들의 황제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고, 놈의 부하들도 적극적인 학살을 멈추고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으니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종족들이 몰살당했을 거다. 빈우, 그대는 혹시 황제가 왜 모습을 감추었는지 알고 있나?”
빈우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어보는 알탄훼아나에게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2124년의 일일 것이다. 그날 지구제국의 황제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고, 지도자를 잃은 인류는 한동안 방황하다 연방으로 재탄생했다. 허나 그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그런가. 역시 그대도 모르는군.”
알탄훼아나는 한숨을 내쉬어 호흡을 고른 다음 자신의 무릎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떨리는 다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겁에 질려 당분간은 이쪽 은하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시일이 조금 지난 다음 다시 조사대를 파견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위험은 감지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너희들 종족의 민간인을 만났다. 지구제국의 병사가 아닌 연방의 일반 시민들을 말이야.”
연방의 시민들이라면 지구제국의 살상 병기와는 천지 차이다. 비홀더 전대가 핵폭탄이라면 일반 시민은 식탁 위의 냅킨일 것이다. 그러나 알탄훼아나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빈우는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말했지? 우리의 눈은 사물의 바람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연방의 시민을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공포였다. 그것도 제국의 병사를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싸울 방법도 모르고, 싸울 무기와 육체도 없는 일반 시민들조차도 왜 그런 색깔로 보이는 거지? 너희들은 왜 그렇게까지 멸망을 갈구하냔 말이다!”
알탄훼아나의 말이 차츰 언성이 높아져 간다. 그것은 빈우도 마찬가지였다.
“멸망? 우리가 멸망을 원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나름 공존을 원하는 연방의 시민들이 그렇게 보였다니 조금 충격적이다. 혹시나 알탄훼아나가 거짓이나 모함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이익 따윈 없었다.
“그래,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보는 법을 단련한 샤다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어. 멸망하는 우주의 색과 같은 색을 띤 너희 유에네스가 무엇을 바라는지, 네놈들이 걸어가는 종착지에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지 말이다.”
알탄훼아나는 마침내 오열하기 시작했다. 모니카와 아나스타샤가 달라붙었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샤다이의 호민관이 두 여인의 품에서 발악한다.
“그래! 너희들은 우주를 차지하고 결국 홀로 쓸쓸히 멸망할 것이다. 모든 것을 짓밟고, 모든 것을 씹어 삼키고, 황무지에서 홀로 남아 죽어갈 것이야! 허나 우리는 달라! 남겨진 우리들은 이 죽어가는 우주와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나 네놈들에게는 아냐. 네놈들이 주는 멸망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뉴 소노라에서 알탄훼아나는 샤다이 파벌 간에서 인류를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었다. 어떤 파벌들은 계단을 쓰는 인류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공격한다고 했고, 또 어떤 파벌은 선조의 귀환을 돕기 위해 인류를 공격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샤다이 지도부는 인류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종족으로.
빈우는 문득 알탄훼아나가 측은해졌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프리마로 가서 인류와 접촉했고, 피에르 라캉을 통해 이런저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했던 행동들은 자신의 종족을 위해서였고, 인류에게 도움이 된 것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결과물들에 불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알탄훼아나는 인류와의 협력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아냐, 아냐. 난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빈우의 눈에 눈물과 침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는 알타훼아나가 보인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나 위험하다는 멸망의 존재인 인간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마주 대했으며, 나아가 그 일원에게 잠시나마 마음까지 열었었다. 그랬던 알탄훼아나였건만 자신의 목적에 매달리다 결국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빈우는 이것이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빈우 자신도 저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빈우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결심해보지만, 이런 결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빈우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다.
“주인님, 얘기는 여기까지 할게요.”
아나스타샤가 흐느끼는 알탄훼아나를 필사적으로 침대에 뉘며 말했다.
“알았어, 뒷일은 부탁할게. 아나스타샤.”
그 말을 한 빈우는 병실을 나섰다. 비교적 알탄훼아나의 상처와 연관이 없는 주제를 골라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건만 오히려 어마어마한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이렇게 상처가 덧나면 그 흉터는 정말로 크게 남아 평생 따라다닐 수 있다. 이제부턴 아나스타샤에게 달려있다.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빈우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아놨던 정보를 대충 가공해서 특수전 사령부와 군사정보국에 보냈다. 그리고 정성 들여 쓴 정밀 보고서는 마커스에게 보냈다. 그렇게 보고서를 보내고 커피 한잔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아나스타샤가 돌아왔다.
“어땠어?”
빈우의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안 좋아요. 본인에게 치료 의지가 너무 강해요. 그게 너무 강해서 역효과가 나고 있어요. 조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는데, 저분은 두뇌칩도 없고, 샤다이에겐 어떤 약물이 통할지도 몰라서 힘드네요.”
빈우는 한숨을 쉬는 그녀 곁에 앉아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이번엔 주인이 메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감촉에 아나스타샤는 히죽 행복하게 웃더니 슬슬 밀고 올라와 빈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래요, 역시 이거에요. 이게 직빵이라고요.”
아나스타샤는 실실 웃으면서 주인의 허벅지에 스킨쉽을 하고 있었다.
“거참.”
그 모습을 보던 빈우가 한마디 하자 아나스타샤는 샐쭉하더니 바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잇, 뭐에요. 인간을 모방해서 행동하게 되면 저희들도 인간님들의 스트레스도 같이 모방해서 느낀단 말이에요. 그걸 치료하기 위해선 우리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안식을 얻어야 한단 말씀.”
“마음의 안식이라….”
“그것도 모방이지만요.”
주인의 허벅지에서 그 감촉을 음미하며 데굴데굴 뒹굴던 메이드가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주인님, 알탄훼아나 씨의 치료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요?”
방금의 질문은 메이드인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군사정보국의 비서 안드로이드의 입장에서 한 질문이었다. 그녀도 알탄훼아나가 가진 정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그녀가 입은 마음의 상처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다. 즉, 그 말은 지금 상황에서 알탄훼아나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동시에 정보를 얻는 것은 힘들거나 자칫 불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치료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으로 정보를 뽑아내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일단 치료할 수 있는 데까지는 치료해 보자. 안되면 내가 할게.”
“넹.”
짧게 대답한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허벅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잠시 꼼지락꼼지락하더니 허벅지에 대고 우물우물 말을 걸었다.
“주인님, 심심해요.”
“뭐 어쩌라고.”
“놀아주세요.”
“그냥 자.”
빈우가 상대를 안 해주자 아나스타샤의 주먹이 주인의 옆구리를 푹푹 찌른다. 그리고 그때 마커스로부터의 통신이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벌떡 일어나 주인의 옆에 다소곳이 섰고, 주인은 설렁설렁 통신을 켰다.
-빈우야.
“마커스, 무슨 일이야?”
화면 너머의 마커스는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보내준 보고서를 봤다. 이거 조금 골치 아픈데.
마커스는 한숨과 함께 옆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골치 아픈 게 한두 개가 아닌 모양이네.”
-그래, 일단 하나씩부터 말할게. 먼저 아나스타샤를 수동이나 침묵모드로 돌려.
그 말인즉슨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민감한 기밀이란 뜻이다.
“아나스타샤. 침묵과 동시에 수동모드.”
“네, 주인님.”
빈우의 명령과 동시에 방금까지 짓궂은 장난을 치던 안드로이드는 즉시 로봇이 되어 외부의 모든 입력을 차단했다.
그리고 나서야 마커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나중에 천천히 알려주려고 했는데, 네 보고서와 관련된 부분이 있더라. 우선 케트쿤에 있던 클론 제작 시설이 완전히 철거되었다.
비록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빈우는 조용히 욕을 구시렁거렸다. 케트쿤에 대한 정보는 록산느를 거친 클론에게서 얻은 정보다. 클론은 케트쿤으로 간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 목적지가 클론 제작 시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는데, 지금 그 단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거 등록은 동맹종족을 위한 물자생산 시설로 되어있지?”
-그래, 대외적으론 현지 케트쿤들의 폭동 때문에 철수했다고 나오지만, 실은 아니야. 누군가 공장에 침입한 자가 있다.
기밀 중의 기밀인 클론 시설인 만큼 보안은 보통이 아니다. 즉 거기에 침입했다는 놈도 보통이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마커스나 빈우는 그 침입자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고 있다.
“내 클론이로군.”
“그래, 울토르 클론이다. 아마 위은쓸납학에서 탈출한 놈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