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플라스마다!”
우지의 외침대로 4기의 신형 샤다이 전투기는 기수 부분에서 플라스마를 쏘기 시작했다. 역시나 전열함 정도의 위력이 나온다. 단 한발로도 블랙 랜스에겐 치명적인 공격이고, 롱소드는 말할 가치도 없다. 빈약한 전투기 따위는 스치기만 해도 증발할 것이다. 그러나 놈들의 공격은 우지의 롱소드에 스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롱소드는 신들린 기동으로 리퍼들의 조준선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애초에 리퍼 전투기들도 롱소드에 위협 사격 몇 발만 쏜 다음 블랙 랜스를 노리고 있었다.
잠시 후 뒤에서 날아온 사이클론 어뢰들은 느린 속도 탓에 전투기를 요격할 성능은 나오지 않지만, 자체 중력장으로 블랙 랜스를 겨누는 플라스마를 막아주는 동시에 어뢰의 방어 무장으로 리퍼 전투기를 공격했다. 명중탄은 없지만, 놈들의 시선을 끌고 대형을 흩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선 한 놈.”
우지는 샤다이 전투기 옆으로 같이 이동하면서도 기수를 놈에게 향한 채 입자빔포를 퍼부었다. 앞뒤로 꿰뚫린 전투기는 산산 조각나며 흩어졌다. 그제서야 리퍼 전투기들은 롱소드의 위험성을 깨닫고 제대로 응전하려 했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랍쇼, 저것들 왜 저래? 조종할 줄도 모르나?
목표를 잡은 우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큼 리퍼 전투기들의 기동이 해괴한 것이다. 이 신형들은 속도는 그럭저럭 빠른데 선회력이 영 아니어 보였다. 빠르게 날면서 선회를 하려다 자기 속력을 못 이기고 주욱 밀려 나가는가 하면, 너무 회전을 심하게 한 탓인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놈도 있었다.
-조종법이 아니라 운용법 자체를 모르는 것 같은데.
통신으로 들려오는 팀장의 말에 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다이는 조상들이 떠나간 다음 남겨진 유산으로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가 전투기를 모는 듯한 움직임이 나오는 것이다.
-리퍼들은 뇌에 전투 방법이나 사용법을 주입받던데, 이놈들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빈우의 말대로 리퍼는 뇌 속에 연방의 두뇌칩 같은 것을 삽입해 싸우는 법을 주입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놈들은 연방 군인들과 대등한 전투 실력을 가져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헌데 이놈들은 리퍼이면서 초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다 죽여
우지의 질문에 뒤따른 빈우의 대답은 심플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기의 리퍼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놈들은 우왕좌왕 우지를 뒤쫓으며 허둥대다가 입자빔포에 관통되어 순식간에 전멸했다.
“42전단 쪽으로도 리퍼 전투기가 갑니다.”
마지막 리퍼 전투기를 격추한 우지의 눈에 42전단으로 날아가는 리퍼 전투기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지는 빈우가 말했던 운용법을 모른다, 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리퍼 전투기들은 대형 없이 그냥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연방의 전투기 롱소드들은 서로가 서로의 사선에 포함되도록 반드시 편대 비행을 한다. 편대 사이의 공간에 화망을 만들어 난전 중 적에게 사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42전단도 롱소드를 내보내는군.
42전단의 주포는 대부분 입자빔포로 바꾸었지만, 부포는 다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저런 소형 전투기들이 달라붙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롱소드로 맞대응하려는 것이다.
리퍼 전투기들은 무리를 지어 날아오다 한꺼번에 플라스마 공격을 퍼부었다. 하나하나가 연방 전함 주포에 버금가는 위협적인 공격들이다. 그러나 맞지 않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반면 이쪽의 입자빔포는 정확히 명중해 리퍼 전투기를 격추한다. 이어서 롱소드들이 쏜 미사일들은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전탄 명중했지만, 그놈의 방어막에 전부 막혔다.
“역시나 붙었으면 위험했겠네요.”
그 모습을 보며 우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대공 공격이 통하지 않은 놈들이 달라붙어 전함 주포급 공격을 퍼부으면 연방 전투함은 금세 침몰한다. 특히 입자빔포가 없는 태스크 포스 373의 모함 블랙 랜스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사이 양측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져 서로 얽히고 엮이면서 전투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전방의 롱소드를 지나친 리퍼 전투기들은 뒤로 돌아간 적을 잡기 위해 선회하려 했고, 그때를 노려 후열의 롱소드들이 빈틈을 메꾸며 날아들어 입자빔포를 쏘았다. 그리곤 적들에게 사격 기회를 주지 않고 고속으로 기동해 빠져나갔다.
“일방적이네요. 이게 놈들의 첫 전투기 사용인가 봅니다.”
우지의 솔직한 감상이 이어지는 중에도 리퍼 전투기들의 수는 급감했다. 롱소드들이 전투하면서 리퍼 전투기를 몰아넣고 유인해 한 곳으로 모으자 그곳으로 순양함의 공격이 작열했다. 입자빔포 다발들이 지나가자 리퍼 전투기들이 우수수 폭발한다.
-우지, 불구경은 그만하고 여기 엄호해라.
“옛.”
혹시나 리퍼 전투기들이 이쪽으로 올까 싶어 경계하던 우지는 빈우의 부름에 궤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블랙 랜스는 전투가 시작되어 모두 대피한 궤도 엘리베이터 정거장에 상대속도를 맞추어 정박했고, 지상팀원들이 튀어나와 정거장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다 대피했군요.
텅 빈 정거장을 보며 모니카가 말했다. 그녀는 이번 작전에 따라오라는 빈우의 명령에 부머를 입고 지상팀원들과 동행했다.
-부팀장, 파트리샤와 함께 내부수색하세요. 민간인은 탈출 캡슐에 실어서 안전지역으로 강하시키고 적들은 다 죽여요. 모니카, 엘리베이터 배송 스케줄 확인해. 그리고 무거운 것부터 실어서 정거장까지 올려. 위르겐, 블랙 랜스에 전력 케이블 연결하는 거 감독해.
빈우는 팀원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린 다음 정거장 관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시설을 조금 손보기 시작했다. 정거장 상부 브레이크를 풀고 천정을 열어 궤도 엘리베이터를 매스 드라이버로 쓰려는 것이다. 지상에서부터 가속해서 올라오는 화물들은 중력권에서 벗어나면서 자전력으로 날아가는데, 빈우는 여기에 손을 조금 봐서 화물들이 궤도 바깥이 아니라 행성 궤도로 날아가게 바꾸었다.
-팀장님, 화물들은 중량순서대로 배치했어요. 올릴까요?
모니카의 보고에 빈우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켰다.
-올려, 최고속도로.
그러자 지상에서 화물들이 자기장으로 가속되어 발사되어 올라왔다. 누벨 노르망디의 궤도 엘리베이터는 처음부터 매스 드라이버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라 화물들은 주변의 코일의 자기력으로 점차적으로 가속해 진공의 튜브 속을 통해 올라온다.
-조심하세요. 중간에 멈췄던 화물들부터 먼저 올라오고 있어요.
-좋았어, 함장님.
빈우가 신호를 보내자 중력 닻으로 궤도 엘리베이터 정거장을 끌고 있던 블랙 랜스가 관성제어장치의 범위를 외부로 늘렸다. 그리고 사출되는 화물들의 궤도를 관성제어장치로 잡아 그 방향을 조금씩 수정했다.
-오케이, 잘 날아간다.
빈우는 나지막이 웃으며 엘리베이터의 최종조절을 마무리했다. 화물의 무게에 따라 발사속도를 조절하고 블랙 랜스가 최종 보정하자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솟구치는 고중량의 화물들이 누벨 노르망디의 궤도상으로 날아갔다. 이 화물들이 노리는 것은 궤도상에 있는 리퍼 전투함 무리들이다.
-엥? 이걸로 리퍼들을 잡으려고요?
날아가는 화물의 궤도를 본 위르겐이 아리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화물들의 운동에너지가 무시 못 할 정도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군용이 아니어서 탄자도 약하고 속도 또한 그렇게 빠르지 않다. 그리고 발사되는 방향도 옆으로 날아가는 궤도 쪽이라 속도는 더더욱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어리버리한 일반 샤다이나 야수에 불과한 워프 비스트에게라면 통할지 몰라도, 교활한 리퍼들에겐 성가시기만 할 뿐 위협적인 공격은 아닌 것이다.
-새끼가 눈이 삐었나. 궤도 계산 똑바로 안 해?
그리고 빈우는 자신이 계산한 궤도를 팀원들에게 공유했다. 그리고 화물들의 최종 배송지를 본 팀원들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우, 팀장님 제정신이세요?
핀잔하는 파트리샤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빈우가 화물들을 날리는 곳은 궤도상의 리퍼 함대가 아니라 놈들을 지나 그 아래쪽 지상에 전개한 리퍼 지상 병력들 쪽인 것이다. 즉 누벨 노르망디의 해저에서 끌어올린 금속 무더기를 다시 누벨 노르망디의 지표면으로 낙하시킨다는 계획이다. 수십 수백 톤의 화물들이 상공 500km에서부터 지상으로 떨어지면 제법 짭짤한 파괴력이 나온다.
-계속 날아가는데, 저쪽은 별 반응 없네요?
모니카는 빈우의 뒤를 이어 매스 드라이버의 최종 보정을 하고 있었다. 해저 제련소에서 만들어진 금속을 실은 컨테이너들이 음속 몇 배의 속도로 대기권을 돌파해 누벨 노르망디의 자전력을 받아 날아간다. 거대한 돌팔매인 셈이다. 이 흉악한 운동에너지들은 리퍼 함대 쪽으로 날아가지만, 리퍼들은 이것들이 느리고 명중률도 엉망이라 요격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놈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42전단과 옆에서 깔짝거리는 연방의 궤도 주둔 방어함대인 것이다.
-슬슬 떨어진다.
리퍼 함대를 지나친 화물들은 중력에 이끌려 다시 누벨 노르망디의 땅으로 떨어졌고, 얼마 안 있어 화물이 지상에 충돌하는 장면이 나왔다.
-워우!
위르겐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확도는 낮은 공격이지만 무식한 파괴력으로 주변을 쓸어버리는 투석기다. 그리고 느리지만 꾸준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연속해서 화물들이 지상에 충돌하자 마치 운석처럼 크레이터가 파인다. 궤도상의 함대들에겐 몰라도 지상 병력에겐 치명적인 공격이다.
-모니카, 옮겨.
-네네에!
빈우의 서두르는 목소리에 모니카도 덩달아 움직임이 바빠졌다. 지금 둘은 보수용 발포점착액을 뿌려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덩어리가 충분히 커지자 그걸 모니카가 들고 날아올라 블랙 랜스 옆으로 집어 던졌다.
-오오, 응급 발포 장갑입니까?
아룹이 빈우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이 발포점착액들은 발사 후 빠르게 굳어 파괴된 시설물의 파손된 부위를 응급으로 메꾼다. 그리고 이런 발포구조물은 내열성이 높고 부피가 커서 샤다이의 플라스마 공격을 막는 데 안성맞춤이다.
-아아아-
모니카의 부머가 마치 일개미처럼 궤도 정거장과 블랙 랜스 사이를 오간다. 샤다이의 기술로 비행이 가능하고 헤비급이라 동력이 충분한 부머에겐 안성맞춤인 일이다.
-모니카 대위, 나머지는 장갑드론이 할 테니 그리 무리하지 않아도….
-죄송해요, 죄송해요, 빨리 할게요.
날아오른 발포장갑들은 블랙 랜스의 장갑드론들이 날아와 채간다. 하지만 지금 모니카에겐 오르 함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빈우는 정신없는 모니카는 보지도 않고 리퍼 함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함장님, 놈들이 이쪽을 공격합니다.
드디어 리퍼들이 373의 작전의 위험성을 알아챘다. 자신들을 스치고 지나간 공격들이 사실은 지상 병력을 공격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플라스마 포격으로 화물들을 쏴 녹여버리고, 몇몇 포격은 태스크 포스 373이 위치한 궤도 엘리베이터 쪽을 향한다. 그러나 이미 방어태세를 갖춘 373에게 몇 발 정도의 공격으론 의미가 없다.
-자아, 니들 맘대로 해봐라.
빈우는 판을 짜놓은 다음 리퍼들의 대응을 구경하기로 했다. 태스크 포스 373이 궤도 엘리베이터 정거장을 차지한 다음 벌인 작전은 리퍼들이 어떻게 대응하든지 골치 아프도록 되어있다. 날아오는 화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지상의 병력들이 위험하고, 이것을 요격하면 그만큼 42전단을 공격할 화력이 줄어든다. 또 가만히 서서 몸으로 막아내기엔 화물들의 운동에너지가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스크 포스 373을 쫓아내기 위해 포격을 해보려고 하니 이미 이쪽은 몇 발 쏴서는 어림없을 정도로 방어태세를 갖춰놨다.
-우릴 제대로 몰아내려면 아예 확실하게 함대에서 병력을 빼서 이쪽으로 보내야지.
-이유, 그렇다면 감사하죠.
빈우와 파트리샤가 리퍼 함대를 보며 농담 따먹기를 한다. 함대 대형을 무너트리면 고맙다. 리퍼함이 이쪽으로 와준다면 블랙 랜스는 적당히 맞대응 하면서 도망치면 된다. 애초에 리퍼쪽에선 태스크포스 373이 자리 잡도록 놔둬선 안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