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크라스나와 졸리를 뒤로 빼.”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명령에 두 척의 순양함들이 뒤로 빠졌고, 이들에게 즉시 군수지원함들이 달라붙었다. 간단한 수리와 함께 미리 만들어두었던 장갑들을 붙이면 바로 전투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적은 피해다.
“네터 티거는?”
“안 됩니다. 항행 불능입니다. 예비대로도 못 돌려요.”
발렌티나의 말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처참하게 녹아내린 순양함 한 척을 보았다. 장갑이 저 정도가 될 정도면 내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롱소드 편대 귀환합니다.”
발렌티나가 귀환하는 롱소드들과 그 피해를 보고해 왔다. 화물을 방패 삼아 들어간 데다 리퍼들이 태세를 다잡기 전에 재빨리 빠졌던 탓에 피해는 적었다. 한 번 몰아친 롱소드들은 전단의 엄호하에 다음 작전 위치로 이동하는 항모로 가는 중이었다.
“서둘려 재출격 준비를 해. 이번엔 할버드도 같이 나간다. 그리고 데이먼 전대장.”
전단장의 호출에 뱅가드의 데이먼 전대장이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태스크 포스 373이 지상 강하 작전에 대한 지원 요청을 해 왔어.”
현재 원더풀 뷰티풀에는 사기가 충천한 뱅가드 대원들이 완전 무장으로 대기 중이다.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규모는 얼마 정도랍니까?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아마 중대 규모지 싶어.”
태스크 포스 373 소규모 정예팀이다. 여차하면 부족한 화력이나 머릿수를 메꾸기 위한 지원 병력이 필요할 테고, 그 규모는 많아도 중대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양반은 못 되는 빈우에게서 통신이 들어왔다.
-전단장님, 373은 지금 강하하겠습니다. 이후 신호기가 있는 곳으로 뱅가드 일개 중대를 투하해 주십시오,
“뭘 그런 걸 나한테 캐묻나. 데이먼 전대장과 직접 얘기하게.”
-그럼 저도 편하지요. 데이먼 전대장님
-말하게.
-라이노 몇 대 들고 왔습니까?
라이노는 연방의 사족보행 전차다. 장갑 보병 두 배만 한 크기의 전차는 그보다 더한 화력을 뿜어낸다.
-예비기 포함해서 모두 20대.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12대야.
-입자빔포 달렸습니까?
물어보는 말투가 누벨 노르망디의 지표에서, 그러니까 대기권 내에서 입자포를 쓰겠다는 이야기 같다.
-아니, 설령 지금 단다고 해도 시간에 맞출 순 없을 거야.
-제 부하가 입자빔포를 모듈화했습니다. 설계도를 보내지요. 조금만 개조하면 바로 달 수 있을 겁니다.
라이노의 등에는 코일건 외에도 레이저, 로켓, 미사일과 같은 무장을 전장에서 바로바로 교체할 수 있다. 모듈화한 덕분에 교체하고 배선 작업만 하면 바로 작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듈화한 무장들은 다른 장비에도 붙일 수 있다. 장갑차나 전투기 등에도.
-흐음, 설계도만 있다면야 금방 달 순 있겠는데··· 우린 입자빔포를 대기권 내에서 운용한 경험이 없어.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은 감안해 주게.
-제 걸 보내 드리겠습니다.
설계도에 이어 빈우가 피똥 싸며 구했던 사격 자료들이 넘어왔다.
-입자빔포를 단 라이노는 장갑 보병들과 함께 운용하지 마십시오. 포구 폭발이 일어나면 라이노는 버틸지 몰라도 어벤저는 위험합니다. 라이노에도 포 방패를 다는 게 좋을 겁니다.
등에 입자빔포를 단 놈이 하는 말이라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애매하다.
-포구 폭발이라··· 대원들에게 대방사선 방비를 하라고 할까?
물론 어벤저에는 대방사선 대책이 되어 있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입자포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면 대책을 따로 세워야 한다.
-그냥 어뢰 비스킷 먹은 셈 치지요. 서둘러 주십시오. 373은 지금 강하합니다.
그 통신을 끝으로 태스크 포스 373의 네 명은 장갑복에 대기권 돌입 장비를 하고 뛰어내렸다. 이들이 그라디우스는커녕 강하 포드조차도 쓰지 않는 것은 지금 가는 곳이 위에도 리퍼, 아래에도 리퍼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눈에 안 띄고 피탄 면적을 줄이기 위해서다.
“깡 한번 좋구먼.”
단 네 명이서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중얼거렸다. 리퍼는 태스크 포스 373의 강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데이먼 전대장도 준비를 하기 위해 통신을 끊었다. 이어 원더풀 뷰티풀도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우익 전진, 사선 대형으로.”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명령에 전진하던 함대들이 대형을 바꿨다. 그리고 좌익의 순양함들이 일제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앞서 나아가는 우익을 엄호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우익에선 리퍼의 반격에 못 이겨 이탈하는 함이 속출했다.
“바보같이 버티지 마라. 피해를 입으면 바로 빠져. 수리한 다음에 다시 앞으로 나가라.”
피해를 입은 순양함들이 뒤로 빠지면 군수지원함이 달라붙고, 수리용 드론과 지원기들이 나와서 피해를 복구한다. 하지만 지금 42전단은 리퍼와 싸우면서 제법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시에라 1과 7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리퍼의 사격은 치명적인 플라스마를 정확하게 발사한다. 아무리 회피하고 방어한다고 한계는 있다. 전함 주포에 달하는 일격을 버틸 수 있는 것은 같은 전함뿐이다. 기동전을 위한 순양함에겐 버거운 위력이다.
“군수지원함들을 태스크 포스 373이 점거한 궤도 엘리베이터로 보내. 거기엔 발포 장갑이 잔뜩 있다. 구축함들을 중력 충각 써서 호위로 붙여.”
발포 장갑은 코일건 같은 실탄 병기에는 그저 그런 방어력이지만, 레이저나 플라스마 같은 열에너지 병기에는 상당한 효과를 보인다.
“지금 군수지원함을 보내도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발렌티나의 지적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당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단도 그리로 이동한다. 으음, 역시 돌파해서 반으로 가르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아무리 입자빔포로 무장한 연방의 최정예 함대였지만 현 상황에선 절반도 안 되는 리퍼를 상대로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리퍼 뒤쪽에는 누벨 노르망디가 있기 때문에 42전단이 모든 화력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전단은 모두 우익으로 이동한다. 사선 대형을 쐐기 대형으로, 발아래에 행성을 둔다. 처지는 함은 어쩔 수 없다. 이동이 우선이다.”
42전단은 비스듬하게 전진해서 누벨 노르망디로 접근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방어와 회피를 못 한 채 서로 포격전을 벌이던 와중에도 리퍼함을 한 척 격침하고 다른 몇몇에도 피해를 줬지만 42전단도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방가르드가 반전합니다.”
발렌티나의 말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시선이 아방가르드로 향했다. 가운데가 휑하니 녹아내린 순양함이 마지막 안간힘을 내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스스로 후열에서 방패가 되길 자처한 것이다. 동력로와 추진부를 대부분 상실한 아방가르드는 양현에 달린 대기권 이탈용 로켓을 점화시켜 가속하며 모든 화력을 퍼부었다. 전단의 후열을 막기 위해 나아간 순양함을 향해 리퍼들의 포격이 집중되었다.
“얀···.”
스크로도프스크가 전우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전우가 함장으로 있던 아방가르드는 플라스마에 꿰어 흐트러졌다. 고열에 장갑들이 증발하며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이 마치 베개가 터진 모양새 같다.
“블랙 헤론도 격침.”
이어서 또 한 척이 격침된다. 좌현에 맞은 플라스마가 우현까지 뚫고 나온 다음 함수에서 함미까지 갈라 버린 것이다. 하지만 42전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위치를 이동했다. 리퍼와 원거리에서 포격전을 해 본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시간을 끌다가는 오히려 42전단이 위험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쪽의 화력을 단시간에 퍼부어 빨리 승부를 내려는 속셈이다.
“전 함선 위성 궤도 중력권 범위에 들어왔습니다.”
부관 발렌티나의 보고가 있을 때, 리퍼들의 포격도 비교적 명중률이 떨어진 듯했다. 아니 실제로 산란하거나 흩어지는 플라스마들이 몇몇 있다. 행성의 중력, 대기 등의 요소에 의해 플라스마들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격 병기들은 행성에 다가가게 되면 대기와 중력, 행성 자전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정을 해 줘야 한다. 그러나 리퍼들은 그것이 서투른 모양이다. 다른 함대라면 그냥 화력으로 밀어붙였겠지만 지금 놈들이 상대하는 것은 연방의 최정예 42전단이다. 사소한 틈을 비집어 승기를 잡아내는 자들인 것이다.
“전 함대 반전.”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명령에 순양함들이 이동을 멈추고 공격 준비를 갖췄다. 이제 주둔 함대와 42전단의 ㄱ자형 포위는 주둔 함대-리퍼-42전단의 순서로 늘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자가 아니라 ㅅ 형태다. 연방의 양측 함대는 아래쪽으로 누벨 노르망디를 두고 서로 수평선 너머에 위치했다. 리퍼를 포위하고도 서로의 사선에서 벗어난 위치에 선 것이다.
“전 포문 열어라!”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호령에 42전단의 순양함들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제 아군이 맞을 위험이 없으니 마음껏 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도 주둔 함대의 공격이 쏟아졌다.
42전단이 치열한 포격전을 시작했을 때, 군수지원함에서 드론과 지원기들이 나와 궤도 엘리베이터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스크 포스 373이 미리 만들어 놓은 발포 장갑들과 해저에서 끌어 올린 자재들을 가지고 함대로 돌아갔다. 몇몇은 중간에서 마이크로웨이브 전력중계기가 되어 궤도 엘리베이터로부터 받은 전력을 무선으로 뿌려 줬다. 지금은 전력이 조금이라도 아쉬운 마당이라 닥닥 긁어모은 전력들을 방어막으로 돌렸다.
하지만 반대편의 주둔 함대는 근처의 궤도 엘리베이터들이 전부 파괴된 터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리퍼를 포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약한 주둔 함대 쪽이 뚫릴지도 모른다.
“쐐기 대형 전환! 중앙의 함선들은 방어막을 연동하며 전진! 양익은 대기권 강하 준비.”
전단장의 명령에 42전단의 순양함들은 쐐기 대형으로 맞췄다. 이어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양익 전진! 왈츠 시간이다.”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명령에 쐐기 대형 양 좌우익에 있던 순양함들이 대기권으로 강하하며 전진했다. 리퍼 전투함은 다가오는 순양함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대기권 바깥에서 안쪽으로 비스듬히 발사된 플라스마는 짙어지는 대기와 중력, 자기장의 복합적인 방해를 받아 명중률과 위력이 조금 하강했다. 이 감소율은 궤도 폭격이라면 조준 오차에 미미한 영향을 주겠지만, 고속으로 이동하고 역장 방어막이 완충된 순양함을 상대로는 심각할 정도다.
반면 42전단의 순양함들은 누벨 노르망디로 하강하다가 대기권의 저항을 박차고 튕겨 나가듯 상승하며 입자빔포를 쐈다. 이미 행성의 정보를 모두 입력한 다음 보정한 포격이다. 그렇게 발사된 좌우 양익의 공격은 중앙으로 집중되어 교차 포격 범위에 들어간 리퍼 전투함들을 갈아 버렸다. 그리고 올라온 순양함들은 중앙에 나선 순양함들과 서로 중력 닻을 걸어 위로 상승함과 동시에 쐐기 꼭짓점으로 모여 방어막을 연동했다. 그리고 샤다이의 포격을 방어 드론과 방어막으로 막으며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이미 후열에 있던 양익의 함선들이 나와 대기권을 참호 삼아 전진하기 시작했다.
“통한다. 밀어붙여.”
42전단의 회전하는 쐐기 대형은 마치 사슬톱처럼 리퍼 대형을 찢어 버렸다. 쐐기 대형은 차츰 전진했고, 리퍼 대형을 계속 갈라졌다.
“후방의 리퍼들은 어떻게 대응하나? 주둔 함대 쪽으로 치고 나가나?”
“아닙니다. 우리 쪽으로 맞서 나오려고 합니다.”
발렌티나가 보여 준 화면에는 후방의 리퍼 전투함들이 갈라진 대형을 메우기 위해 앞으로 돌격하는 모습이 나왔다.
“다행이군.”
밀려 나간 리퍼들이 주둔 함대 쪽으로 향하면 골치 아프다. 현재 망치 역할을 맡은 42전단의 대다수는 회전하는 쐐기 대형을 짜느라 누벨 노르망디의 중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리퍼들이 작정하고 후퇴하면 따라 잡는 타이밍이 느릴 수 있고, 그사이 약한 모루인 주둔 함대가 박살 날 수도 있다.
리퍼들이 42전단의 이 전술을 파훼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후방으로 빠져 주둔 함대를 부순 다음 속도가 느려진 42전단의 한쪽을 반 포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보면 놈들은 이 선택은 포기한 것 같았다.
두 번째는 간단히 누벨 노르망디로부터 거리를 벌려 주둔 함대와 42전단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하면 연방의 함대와 누벨 노르망디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 선택은 리퍼들이 자기네 지상 병력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고, 42전단이 누벨 노르망디를 지켜 냈다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