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싸우는 법은 잘 알아. 하지만 그뿐이야. 집단전에는 서툴군.”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살벌하게 웃었다. 리퍼는 사자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척, 한 척이 그럴 뿐이다. 샤다이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쪽의 늑대들이 사자를 개별적으로 끌어내 각개격파하면 될 일이다.
42전단의 입자포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리퍼 전투함은 교체해서 후방으로 빠졌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주둔 함대의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날아온 사이클론 어뢰들은 상처 입은 리퍼들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했고, 그 결과 뒤로 빠진 리퍼 전투함 몇 척이 격침당했다.
“충분히 야들야들해졌군. 롱소드와 할버드 발진!”
리퍼들의 태세가 무너진 틈을 타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명령을 내렸다. 정비를 마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항모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출 레일에서 가속해 날아오른 할버드들이 대형을 갖출 때, 발사관을 통해 발사된 롱소드들은 이미 적진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퍼들의 대공포 사격은 위험하다. 섣불리 접근했다간 연약한 전투기 따위는 증발한다. 아까의 전투기 편대는 태스크 포스 373이 쏟아 낸 화물 구름에 묻어갔지만, 지금은 매스 드라이버의 공격이 뜸해졌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 화물과 전력들을 42전단의 수리와 방어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적들의 화망이 양익을 향해 분산되어 있다. 전 편대 산개해서 궤도 바깥으로 돌아. 놈들이 아래를 보고 있다. 돌입해.”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지적대로 리퍼들의 포격은 정확하지만 각 함선만 그럴 뿐이다. 이 포격은 좌우로 나서는 순양함들을 향해 정확하지만 제각각 따로 발사된다. 두 척 이상의 집중포화가 없다. 게다가 리퍼의 포격이 순양함들을 노리고 아래로 향하고 있을 때, 작고 빠른 롱소드들이 바깥 궤도-위에서 솟아 나와 아래로 쏟아졌다
마침 리퍼 함대의 우익이 혼란스럽다. 그곳의 리퍼 전투함들은 뒤로 빠지는 놈과 빈자리를 메꾸려는 놈들끼리 뒤엉키고 있었다. 그 혼란한 틈 속으로 롱소드들이 날아가 벌어진 상처를 찢어발겼다. 그리고 그 상처에는 할버드들이 묵직한 화력을 퍼부어 짓이긴다.
“전투기 편대는 빠져. 적 함대 우익을 향해 집중 포격.”
한 번 치고 전투기들이 빠지자 그곳으로 다시 순양함들의 포격이 휩쓸고 지나갔다. 리퍼들의 강력한 보호막은 입자빔포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고, 장갑을 뚫리자 내부 구조가 붕괴하며 폭발했다. 그렇게 리퍼 전투함들이 연달아 격침되자 대형 곳곳에 빈틈이 생겼다.
“적 진형이 무너졌습니다. 돌격하시겠습니까?
부관인 발렌티나의 권고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고민했다. 지금 돌진하면 놈들을 양분해서 아군이 적도 궤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싸움이 길어졌을 때를 염두에 둔 계획이다. 좀 더 밀어붙이면 마무리될 전투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아니. 진형을 유지한 채 전진해서 적의 좌익을 노린다.”
42전단은 아직까진 발버둥 치는 리퍼 함대의 좌익을 노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의 누벨 노르망디 주둔 함대 또한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신호에 맞춰 진격해 박살이 난 우익에 복수의 쐐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乙자형으로 리퍼를 쪼개어 포위한 연방의 늑대들이 상처 입은 사자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 * *
-놈들이 이동한다.
누벨 노르망디로 강하하던 중, 빈우가 말했다. 지상에 강하한 리퍼들은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스크 포스 373이 쏜 택배를 받고 자지러지더니 이제 살아남은 놈들은 시가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연방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목표는 역시 저쪽 시가지인가요?
위르겐이 시가지를 확대해 살펴봤다. 텅 빈 거리와 휑한 건물에는 사람이 있는 기색이 없었다.
-시민들 대부분이 쉘터로 대피한 모양이지만, 샤다이의 플라스마에 버틸 쉘터는 없죠.
일이 이렇게 되면 조금 곤란하다. 시즐러와 클레이모어라면 연방의 기술로 만들어진 쉘터는 시간이 조금 걸려도 뚫어 버린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죽거나, 인질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워프비스트가 될 수도 있다. 알탄훼아나가 조치를 취했다지만 그것만 믿고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 전에 리퍼들을 쓸어버리는 가장 깔끔한 방법으론 궤도 포격이나 아까의 특급 택배가 최고지만, 시민들 전원이 대피한 것을 확인한 것도 아닌 데다 저런 강력한 공격에 쉘터가 안전하게 버틴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다음으로 정밀 타격하려면 롱소드 같은 것으로 저고도에서 콕 집어서 조지는 방법이 있는데 아직 머리 위 궤도에는 리퍼 함대가 멀쩡히 살아 있다. 놈들이 아무리 탐지 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장갑 보병같이 작은 물체라면 모를까, 롱소드 같은 것은 그래도 잡아낸다.
결국, 이런 좆같은 일에는 장갑 보병이 제격이란 얘기다.
-일단 족쳐서 내려온 목적부터 알아내야죠?
파트리샤는 신체를 날다람쥐처럼 변형해서 활강하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태스크 포스 373이 강하한 목적은 이 타이밍에 굳이 강하한 리퍼들의 목적이 수상하기 때문이다.
-강하 장비 벗고 방향 틀어.
빈우의 명령에 팀원들은 바로 장비를 해체했다. 태스크 포스 373은 장갑복에 대기권 돌입용 강하 장비를 장착하고 내려왔다. 이제 쓸모없어진 내열 세라믹 폼은 제거했지만, 아직 감속용 낙하산이나 일회용 부스터들이 있다.
-놈들 위로 따라가며 강하한다.
태스크 포스 373의 장갑복 4기는 지상의 리퍼들이 이동하는 시가지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리퍼가 열일곱이라. 흐음.
아룹의 혼잣말은 상대가 만만하지 않다는 의미다. 조금 편차가 있지만, 리퍼들의 전투 실력은 뱅가드에 버금간다. 그런 놈들이 입는 장갑복이 전차급 공방 능력을 가졌다면, 연방 측은 상당히 불리하다. 현재 연방은 샤다이에게 직빵인 입자빔포를 손에 넣었지만, 아직 소형화가 안 되었고, 장갑 보병 중에선 유일하게 빈우의 컨커러에게만 달려 있다. 문제는 이 입자빔포는 직사일 경우에만 놈들의 방어막을 관통한다는 것이고, 대기권에서 쓰기 위해선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거다.
-나눠서 잡아먹어야죠. 자리 잡으면 뱅가드 부릅시다. 위르겐, 중레일건과 미사일 발사 준비. 부팀장, 위르겐이 레일건 쏠 때 같이 균형 잡는 거 도와주세요.
위르겐은 빈우가 지정해 준 목표를 조준했다. 시가지의 여러 마천루 중에서 하나, 그 아래쪽 지지대 부분이 목표였다.
-저 건물을 무너트려서 리퍼들을 덮치게 한다. 우리는 건물이 무너지는 파편을 쿠션 삼아 감속, 이어서 놈들 바로 위에서부터 떨어져 기습한다.
빈우의 말은 실로 황당한 계획이지만, 듣고 있는 373 대원들은 모두 그럴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실력이 되는 놈들만 모여 있는 것이다.
-위르겐, 미사일부터 발사. 명중과 동시에 레일건 사격.
어벤저의 등에서 대지 공격용 미사일 2발이 발사되었다. 날아간 미사일이 명중함과 동시에 위르겐이 레일건을 쐈다. 뒤쪽으로 반동 상쇄용 탄자가 발사되었지만 지지할 곳이 없는 공중이라 비행하던 어벤저가 휘청했다. 때맞춰 아래에서 그라인더가 날아와 받쳐 주자, 위르겐은 다시 레일건을 쐈다. 이어서 빈우의 스핑크스도 플라스마 포격을 가했다.
-오호오.
파트리샤의 낮은 탄성과 함께 초고층 빌딩이 한쪽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붕괴하는 빌딩은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층층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외벽들도 긴급 프로그램에 따라 저마다 사출되었다.
-일단 크다 싶은 건 다 쏴. 그리고 방패 준비해.
낙하하며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태스크 포스 373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빌딩 파편을 향해 날아가며 코일건을 난사했다. 부딪히면 제법 위험할 것 같은 큰 덩이들이 산산조각 박살 난다.
미사일 공격과 건물의 붕괴를 본 리퍼들은 상공에서 낙하하는 태스크 포스 373을 보고 시즐러를 쐈지만 이미 늦었다. 제트팩을 써서 가속한 4기의 장갑 보병들은 무너지는 빌딩 잔해를 향해 날아갔다.
-돌입한다. 떨어지면 내가 지정한 목표부터 썰어.
발포 방패가 있는 어벤저과 그라인더가 앞으로 나섰고, 둘이 막으면서 나간 공간 뒤로 컨커러와 인필트레이터가 뒤따랐다. 강화 플라스틱과 철골, 압축 목재 등등 부드러운 파편들에 부딪힌 장갑 보병들은 감속한 다음 떨어지는 벽면에 발을 디디고 옆으로 섰다. 그리고 아래를 향해 달렸다.
플라스마가 날아오르지만 파편에 막혀 폭발했다. 엄청난 먼지 덕에 리퍼들은 태스크 포스 373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반대는 아주 잘 보였다. 빈우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옆의 파편들을 밟고 뛰면서 아래로 달렸다. 태스크 포스 373은 붕괴하는 건물 더미와 함께 날아오던 리퍼들을 덮쳤다.
건물 파편을 뚫고 날아온 373 팀원들에 비해 리퍼들은 건물 파편에 얻어맞아 제대로 날지 못하고 있었다. 샤다이들은 중력을 조작해서 날기 때문에 바람 같은 외력에는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파편의 비는 말할 것도 없다. 리퍼들은 자신들을 향해 떨어지는 건물을 보고 피하려고 했지만, 파편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저 새끼들 못 피하네요?
리퍼들이 파편 더미에 깔려 떨어지는 모습에 위르겐이 히죽거렸다.
-맞아도 별 탈 없겠지만 말이다.
빈우는 대답하면서도 목표를 차근차근 설정했다.
붕괴 시 주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체 파괴되도록 만들어진 연방의 건물은 태스크 포스 373의 공격에 넘어가면서도 예의 기능을 발휘했다. 그 결과 고층 건물은 주변으로 넓게 흐드러지며 넘어지고 있는 중이라 리퍼들이 피할 공간이 없었다. 놈들은 파편에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비행하려 허우적댔고, 그중 한 놈이 빈우의 눈에 잡혔다.
-먼저 한 놈 접수.
가장 앞서서 떨어지고 있는 빈우가 리퍼 하나를 점찍었다. 놈은 건물 더미에 휩쓸려 허둥대다가 이미 아룹과 위르겐에게 충분히 얻어맞고 방어막이 다 날아간 상태였다. 빈우는 떨어지던 속도 그대로 놈을 후려친 다음 목을 감싸고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쪽 옆에선 아룹이 다른 한 놈을 잡고 패대기치는 게 보였다.
-다로!
근접 통신으로 리퍼의 비명이 들린다. 리퍼의 장갑복은 어벤저보다 약간 뛰어난 출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컨커러와 붙어서 힘 싸움을 하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다.
-너부터 이 새끼야.
거의 지상에 도착할 때쯤 빈우는 건물 외벽에 리퍼의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 그대로 땅까지 갈아 내렸다. 땅과 충돌할 때가 되자 빈우는 놈의 목에 코일건을 대고 쏜 다음 옆으로 박차고 날았다. 바닥에 충돌한 리퍼의 방어막이 소진되고, 장갑이 긁혀 나가고, 착용자의 정신마저 혼미해졌을 때, 빈우가 다시 뒤에서 덤벼들어 놈의 목에 초크를 걸었다. 그리고 리퍼의 무릎 뒤쪽을 걷어차 꿇린 다음, 컨커러의 최대 출력으로 일어섰다.
-끄아아아- 끄르륵.
비명과 신음도 잠시, 샤다이의 목에서 기체가 빠지는 소리에 이어 액체가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이 뽑혔다. 고체가 분리되는 소리까지 들은 빈우는 리퍼 장갑복을 걷어차고 다음 목표로 향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리퍼들을 보며 빈우는 달려갔다. 그리고 등 뒤의 입자빔포를 조립했다.
-입자빔포 쏜다. 산개.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컨커러에서 입자빔포가 발사돼 리퍼 둘을 꿰뚫었다. 그리고 폭발과 함께 폭풍으로 주변을 휩쓸었다. 이미 대비한 373팀원들은 폭풍을 받고 날아갔다가 다시 강하하며 돌아왔지만, 리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아룹은 아까 패던 놈을 다시 붙잡고 잘린 팔에 코일건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 놈을 장갑복 안쪽부터 터트려 버렸다.
파트리샤는 빈우의 모양새를 보고 자기도 리퍼 한 놈을 뒤에서 잡고 졸랐다. 인필트레이터의 사지가 마치 네 마리의 아나콘다처럼 휘어 리퍼의 목과 팔다리를 졸랐다. 방어막이 작동하지 않은 느린 속도에 꾸준한 압력이 계속 가해지자 결국 리퍼의 목 부분이 꺾이며 뽑혀 나왔다.
위르겐은 특제 대 샤다이 미사일을 쏴 또 한 놈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쳤다.
-오, 시발! 좆 됐네.
빌딩이 무너지는 먼지구름 사이로 일렁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모습을 감춘 리퍼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뭘, 새삼. 장갑 보병 된 날부터 하루하루 좆같지.
아룹이 방긋 웃으며 먼지구름을 필터링해 리퍼의 숫자를 대강 산출했다.
-보이는 거 안 보이는 거 합쳐서 얼추 스물여덟!
처음은 열일곱이었다. 방금 팀원들이 여섯을 잡고 폭풍으로 날려버렸음에도 다가오는 놈이 스물여덟이라면 훨씬 많이 숨어있었다는 의미다.
-부팀장, 안 보이는 거에 멀리 날아가는 놈도 포함시켰습니까?
-제가 그렇게 꼼꼼한 성격은 아니어서요.
그러니까 최소 스물여덟이고, 조금 있으면 나머지 놈들도 이리로 몰려온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