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생각이 있어서 쳤겠죠?
파트리샤가 죽은 리퍼를 던지며 물었다. 아무리 태스크 포스 373이라고 해도 겨우 넷으로 서른에 달하는 리퍼를 상대할 수는 없다. 이 숫자는 스팸이라고 해도 위험할 정도다.
-내가 그렇게 야박한 남자는 아니잖니. 리퍼들이 이 도시를 침공할 걸 뻔히 아는데 어찌 보고 있겠냐.
빈우는 능글능글 받아치며 수류탄을 지뢰처럼 세팅해서 주변으로 던졌다.
-하긴 리퍼들이 도시를 공격한다는데 그걸 뻔히 보고 있을 순 없죠.
위르겐도 맞장구를 치며 지뢰를 매설한다. 그런데 팀원들이 그를 보는 눈치가 이상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위르겐이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특히 컨커러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게 어째 좀 불길하다.
-…응? 왜들 그래요? 팀장님.
-선빵 친 건 너잖아.
-씨발 팀장님 제발.
위르겐은 이를 북북 갈며 레이저포를 광역조사 모드로 해서 주변을 훑었다. 공중에 뜬 먼지가 레이저에 타서 사라지지만, 숨어있던 리퍼들의 방어막들 역시 레이저에 반응해 빛난다. 모습이 드러난 놈들에게 파트리샤가 재빨리 코일건을 쐈다. 하지만 놈들을 적당히 막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옆에서 플라스마가 발사되어 지상팀 근처로 쇄도한다.
-뒤로 빠지자.
금속이 열폭발을 하고 증발하는 고열이다. 빈우가 스핑크스를 방패 모드로 해서 막아서고, 그사이 다른 팀원들이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 뒤로 숨어 들어갔다. 강력한 열선 공격인 플라스마를 이런 잡석 따위론 엄폐할 순 없겠지만, 샤다이를 상대론 충분히 은폐가 된다.
-42전단은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빈우의 말에 아룹이 궤도상의 전투를 흘깃 보았다. 42전단은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리퍼를 상대로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싸움과 전투와 전쟁의 차이다.
-그동안 샤다이를 상대로 쌓아놓은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신병기 덕분이죠. 그게 아니었으면 저렇게 싸우지도 못할 겁니다.
아룹의 말대로 아무리 42전단의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 무기를 가지고선 싸움이 되지 않는다.
-저걸 보면 입자빔포 하나 가지고 싶어 애가 타는데, 팀장님이 반 죽는 모습을 보면 또 그럴 마음이 싹 가신단 말이죠.
위르겐이 능글능글 빈우를 놀리며 지뢰를 깐다. 태스크포스 373은 S자 형태로 후퇴하면서 후퇴로 양옆으로 지뢰를 설치했다.
-많이 컸다. 숫총각 새끼가.
빈우가 깔아놓은 지뢰들을 격발하자 옹기종기 따라오던 리퍼들 몇몇이 좌우에서 터지는 지뢰의 폭풍에 휩쓸려 자빠졌다. 리퍼는 스팸에 비해 개인의 격투나 사격 실력은 확실히 뛰어난데, 이런 전술적인 면에서는 아직 젬병이었다. 아마 뛰어난 지휘관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울토르 중대를 칠 때는 양동을 건 다음 모습을 숨긴 놈들로 본진 뒤치기까지 하던 놈들이었으니까. 아마 당시엔 체메트디오프가 직접 지휘해서 그랬을 것이다.
-네입, 입자포 숫총각입니다.
채 가시지 않은 폭연 사이로 위르겐과 빈우가 달려들어 진동나이프로 리퍼들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다가 대기가 일렁이고 플라스마가 날아오면 만사 제쳐놓고 도망친다.
-씨바랄! 우린 다굴 쳐서 하나 잡는데, 저쪽은 스쳐도 우리 넷 한 큐에 보내네.
파트리샤가 플라스마를 쏜 리퍼에게 저격을 시도했지만, 날아가던 코일건 탄환은 한두 발 맞다가 리퍼 주변에서 증발해 버렸다. 그걸 본 인필트레이터는 몸을 구불텅하게 만들더니 도로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어 갔고, 곧바로 그 자리를 리퍼의 플라스마가 휩쓸고 지나갔다.
빈틈이 생기자 리퍼는 바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앞장선 놈의 가슴에 입자빔포가 명중해 폭발을 일으킨다. 이렇게 373이 매복과 함정을 깔며 후퇴하자 리퍼들은 섣불리 추적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놈들은 비행과 은신이 가능하다. 발뒤꿈치에서 전차가 까꿍 하고 튀어나오는 것은 사양이다.
-이거 생포고 나발이고 우리가 뒤지겠는데요?
바닥에서 리퍼 대신 인필트레이터가 솟구친다. 수상한 타이밍에 강하한 리퍼들을 잡으려 내려왔건만, 태스크 포스 373이 오히려 잡아먹힐 기세다. 매스 드라이버로 두들겨 놨는데도 상당히 많이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뱅가드 부를 거다.
빈우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킨다. 42전단과 누벨 노르망디 주둔 함대가 리퍼 함대와 싸우고 있다. 직사병기밖에 없는 샤다이를 상대로 수평선을 참호 삼아 왔다 갔다 할 모양이다. 그런데 이동하며 진형을 바꾸는 동안 몇 척이 격침당했다.
-으음, 부를 타이밍이 애매한데요?
파트리샤 말대로 뱅가드를 부르기엔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 아무리 리퍼가 연방 함대가 싸운다 하더라도, 강습상륙정을 뻔히 놓치진 않을 것이다. 또 태스크 포스 373처럼 장갑복이 단체로 강하하기엔 병력이 너무 분산될 수 있다. 즉 태스크 포스 373 지상팀이 뱅가드를 부르려면 궤도상의 아군이 어느 정도 우세함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파트리샤,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타이밍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거잖아.
-오호오.
빈우의 말에 파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있어선 안 되는 장소에, 오면 안 되는 시간에 와서,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게 태스크 포스 373이다.
-그래서, 우리 팀장님은 어떻게 타이밍을 찾아가실 건가요?
기대하는 팀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빈우는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답이 없다. 조금 비벼보다가 안 되면 튀자.
팀원들이 구시렁대는 사이 또 리퍼들이 접근한다.
-이 새끼들 우리 쌈 싸 먹으려는데?
아룹이 한 놈의 머리에 코일건을 정통으로 맞췄다. 이어서 파트리샤가 같은 부위에 쐈지만, 그놈은 클레이모어를 들어 중심선을 방어하며 뒤로 빠졌다.
-징하다 징해.
파트리샤가 툴툴대며 공격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스팸과는 확실히 다른 실력이다.
-너무 모이는데….
이어진 파트리샤의 말은 조금 긴장해 있었다. 샤다이의 시즐러에서 나오는 플라스마 포격은 연방의 전차포 급이다. 그리고 연방군의 경우 이 정도 화력은 아군에게 위험할 수도 있기에 약간 거리를 두고 운용한다. 하지만 샤다이는 레이저나 플라스마 병기에는 거의 면역이라 서로 부대껴가며 쏜다. 그리고 그 등쌀에 녹아나는 것은 연방 장갑보병들이다.
-위르겐, 박격포.
빈우의 말에 위르겐이 수류탄을 머리 위로 던졌다. 샤다이 머리 위로 날아간 수류탄은 액체 폭약을 살포한 다음 공중에서 터졌다. 놈들에게 전혀 피해를 줄 수 없는 공격이긴 하지만, 하늘을 날아오는 놈과 은신한 놈들에겐 쥐약이었다. 날아오던 몇몇은 폭풍에 휘말려 무중력상태에서 걷어차인 것마냥 저 멀리 날아간다.
-멋진 모습이야. 시간 날 때마다 던져. 모두 땅개로 만들어 버리자.
태스크 포스 373은 이제 건물 파편에서 벗어나 인적이 없는 시가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옛적부터 보병이 전차 잡는 방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장갑보병들이 걸어 다니는 전차를 상대로 더러운 시가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빈우는 이미 이 도시의 관리자 권한을 징발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도로교통 표지판이 작동해 소음과 섬광으로 리퍼들의 시선을 끌면 그 뒤통수로 저격이 작렬하고, 자기부상 도로에서 버스를 고속으로 발사해 놈들을 산 채로 묻어버린다. 파묻혔다가 아득바득 기어 나오는 놈들이 있으면 두더지 잡듯 목을 딴다.
다음으로 차선 변경용 가이드레일을 갑자기 세워 리퍼들을 일렬로 몰아세운 다음 입자빔포를 쏴 꿰뚫어 버린다. 그런데 이 짓을 두세 번 하면 한 번꼴로 빈우도 폭발에 휩싸여 나뒹군다. 이번에도 폭발이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컨커러의 뒷덜미를 인필트레이터가 잡고 질질 끌며 달린다.
-자기, 우리 이런 거 해본 적 있지 않아요?
다급한 상황에서도 파트리샤는 농담을 잊지 않고 던진다. 빈우가 반응 하나 안 하나 살피기 위해서다. 아니면 정신 차리고 기억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도.
-특수부위 씨이벌.
컨커러가 휘적거리며 스핑크스를 들어 자기 사타구니를 찍는다.
-이히- 나 이거 찍었어. 모니카한테 보여줄 거예요.
-고맙다. 제발 그래 다오. 내가 이걸로 모니카 그년 찍어버릴란다.
-아 뭐래, 댁이 오케이 사인했잖아. 사건은 걔가 벌였어도 도장 찍은 게 누군데 씨-ㅂ
날아온 포격에 둘은 뒤얽혀서 날아가고 파트리샤는 재빨리 일어서 빈우를 안고 달렸다.
-뭐해, 미친년아. 업어.
흠칫한 인필트레이터가 컨커러를 뒤로 돌려 들었다. 하긴 플라스마에 맞고 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컨커러다. 앞서가는 빈우와 파트리샤 뒤를 쫒아 리퍼들이 따라붙었고, 그 좌우에서 위르겐과 아룹의 사격이 쏟아졌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응사하던 리퍼들은 상대 쪽에서 반응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이어 폭발하고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보며 납득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태스크 포스 373 지상팀은 총 네 명. 이들은 둘씩 조를 짜 2개 화력조로 번갈아 움직인다. 그리고 이들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톡톡히 살렸다.
-다시 말하지만, 저 새끼들 전자기장 본다. 장갑복 위장처리 안 벗겨지게 조심해.
373 지상팀은 틈틈이 건물 안에 들어가 벗겨진 도료를 다시 바르고, 밥도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빈우는 고칼로리 햄버거를 하나 먹은 다음 징발을 증명하는 군사채권을 발행해서 안드로이드에게 주었다.
“군인님. 힘내세요.”
사람이 없는 을씨년스런 카페테리아에서 계산대에 붙박인 고정형 안드로이드가 응원한다. 빈우는 뒤로 손을 흔들어주며 내달렸다.
“팀장님이 드신 햄버거는 무슨 맛이었습니까? 제 건 참치 과카몰리. 칠천 칼로리입죠.”
뒤따라오던 위르겐이 햄버거를 마저 먹으며 헬멧을 닫았다.
-납 맛. 팔천오백.
짧은 빈우의 대답에 위르겐은 자신의 뱃속에 납덩이가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입에서 납 맛이 느껴질 정도면 방사능 중독이 어지간히 진행되었단 거다. 아무리 컨커러의 방어막에 스핑크스를 쓴다 해도 포구폭발을 완벽히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지금 컨커러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애초에 정상적인 장갑복도 아니라서-방어막이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대방사선 처리도 어벤져보다 덜 되어 있다. 아마 방어막을 믿고 다른 부분에 힘을 쓴 모양인데 그 대가로 착용자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입안이 말랐습니까?
물어보는 위르겐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엿들린다. 강화 군인의 육체라 해도 방사선 중독은 조금 심각하다.
-축이고 있어.
다행히 대답하는 빈우의 목소리엔 딱히 갈라진 느낌은 없었다.
-어떻게요? 침은 나옵니까?
-입술 뜯어서 피 빨고 있다.
위르겐은 한숨을 쉬며 계속 달렸다. 이제나저제나 싶어 위를 한번 봤더니 반가운 소식이 보인다.
-팀장님, 궤도에. 우리 머리 위를 보세요. 아군이 포위했습니다.
팀원들이 머리 위를 보자 아군 함대가 리퍼 함대를 몰아세운 다음 N자로 찢어발기는 광경이 보였다.
-지원군 부르죠. 우리 뱅가드 애들 부르자고요.
원래 뱅가드 출신인 위르겐이 신이 났다. 여기에 녀석만큼 뱅가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지금 뱅가드 대원들이 이 도시로 강하한다면 두들겨 맞고 있는 리퍼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직.
빈우는 마천루 꼭대기에서 대답했다. 그는 지금 시가지에서 헤매고 있는 리퍼들을 살피고 있었다.
-잡아야 할 놈을 추리긴 했는데, 호위가 단단하다. 지금 뱅가드가 오면 제법 피해가 크지 싶다. 좀 더 두들긴 다음에 불러도 늦진 않아.
-뱅가드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없습니다!
위르겐이 발끈해서 외쳤다. 하기사 지옥불이 타오르는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게 뱅가드다. 연방에서 가장 장갑보병다운 장갑보병. 이들은 언제나 신속하게 최전선으로 달려가지만, 그때마다 보게 되는 것은 공격받는 연방의 땅과 비명을 지르는 시민들이다. 그러면 분노에 찬 뱅가드들이 뛰어내려 비명의 주인을 바꿔준다.
위르겐은 자신이 발끈한 것을 깨닫고 움찔했지만, 빈우는 피식 웃을 뿐이다.
-용기와 만용은 다르지. 내 말은 쓸데없이 개죽음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간단한 작전계획표를 짜서 팀원들에게 공유했다.
-그리고 난 말이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거다. 필요만 하면 말이지.
빈우가 정말로 그럴 인물이란 것을 아는 위르겐은 그저 침을 꿀꺽 삼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