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373팀의 주변은 불타고, 녹고, 증발하고 있다. 42전단이 아니라 373 지상팀이 먼저 사라질 지경이다. 아니, 장갑복이 녹기도 전에 기화할 기세다.
-발렌티나!
빈우의 부름에 42전단의 부관이 얼굴을 보인다.
-네, 팀장님. 지금 곧 지원을….
-우리 쪽보다 뱅가드를 후퇴시켜. 동시에 근처에 있는 시민들을 탈출시켜야 해.
-알겠습니다.
373은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이 있다.
-위르겐, 내 옆에 서라. 방패 꺼내. 막아. 부팀장과 파트리샤는 뒤로!
컨커러가 스핑크스를 방패 모드로 해서 선다. 그 옆으로 어벤져가 역시 방패를 들고 어떻게든 열기를 막아보려 발악한다. 뒤에선 그라인더와 인필트레이터가 수그리고 있다.
-파트리샤, 괜찮냐!
-쪄 죽겠네. 씨바랄….
인필트레이터는 은밀성을 위해 방어력을 희생한 부정형 장갑복이다. 게다가 방금의 전투로 손상 부위가 많아 가장 위험한 게 파트리샤다.
-우지, 고도 낮춰. 제트팩으로 날아오를 테니까 회수해라.
상공의 롱소드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점프해서 롱소드를 붙잡을 4기의 장갑복들은 스카이 후크까지 도망가면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엇?
우지의 놀라는 목소리. 그리고 노릇노릇 구워지는 373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은 롱소드가 아니었다. 그라디우스였다. 이어서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내려갔다. 단순히 상륙정 하나가 와서 가린다고 가려지는 열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타! 모두 타!
그라디우스가 착륙하자 373 지상팀원들은 서둘러 이동했다. 그때 그라디우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급하게 달렸는지 메이드 복을 그대로 입고 온 아나스타샤와 환자복을 입은 알탄훼아나다. 고열의 대지에서 비틀거리는 장갑보병들에게 달려오는 그녀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알탄훼아나의 존재가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그녀의 눈은 금색으로 빛나고 몸은 땅 위에 떠 있었다.
“미안해.”
고열로 몽롱해져 가는 빈우의 귀로 샤다이어가 들려온다. 알탄훼아나의 목소리다. 그녀는 빈우와 지상팀원을 지나쳐 지열발전소 자리로 가고 있었다. 누벨 노르망디 지하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오는 코로나가 궤도상의 순양함을 집어삼키고 있다.
“정말 미안해. 네 잠을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여긴 네가 쓸 가면이 없어. 너의 말을 걸러줄 체도 없어. 너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친구도 없어. 모두 거짓말이야.”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플라스마 기둥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아나스타샤가 달려와 주인에게 매달리려 하는 것을 빈우가 손을 들어 막았다.
“···위험해. 다친다.”
지금 빈우의 장갑복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만지면 화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슬픈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아나스타샤가 있고, 뒤로는 슬픈 목소리로 오열하는 알탄훼아나가 있다.
그런 그때, 빈우의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치 빈우의 기억 속에 있던 정보를 조합해 말을 꾸미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발 가르단 하스.’
플라스마 신경계를 가지고 있는 발 가르단 하스는 장대한 세월을 살아온 행성 지성체였고, 그 신경계와 접촉한 빈우는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지금 빈우는 당시의 느낌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플라스마 줄기와 대화하는 샤다이 옆에서 빈우는 별의 속삭임을 엿듣고 있었다.
“돌아가. 어서 돌아가. 나쁜 꾀임에 속지 마. 넌 혼자야.”
알탄훼아나의 목소리에 반응해서 당혹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아마 누벨 노르망디의 목소리겠지. 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빈우의 뇌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별이 대답했다. 아주 슬프게 말했다. 하지만 슬픈 목소리는 점차 잦아든다. 그에 따라 알탄훼아나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미안해, 너를 깨워서 미안해. 이제 다시 돌아가.”
대화가 끝나고 속삭임이 사라졌다. 알탄훼아나는 지쳤는지 땅바닥으로 쓰러졌고, 아나스타샤가 황급히 부축했다.
“저런 세상에.”
아룹의 목소리다. 아주 놀란 목소리다. 당연하다. 궤도상까지 치솟은 코로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것이 다시 마그마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그마는 점차 식어 검게 변해간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타! 어서!
빈우의 외침에 팀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라디우스로 달렸다. 빈우는 위장포를 꺼내 알탄훼아나와 아나스타샤를 보쌈한 다음 날아올라 상륙정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373이 딛고 있는 땅은 그 아래가 비어버린 상태다. 지각이 갈라지며 무너진다. 플라스마는 사라졌지만,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제길! 땅이…!
그라디우스가 휘청한다. 정확히는 그라디우스가 착륙한 땅이 뒤집히는 중이다. 녹아내려 굳은 대지가 지반째 땅 밑으로 꺼지며, 지열발전 연구소 주변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팀장님! 지하에서 고열이 다시 감지됩니다.
우지의 목소리가 참으로 살벌하게 들린다. 설마 알탄훼아나가 실패를 한 것일까, 아니면 이별이 다시 깨어난 것일까.
그때 그라디우스의 근처에서 플라스마가 뿜어져 올라왔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플라스마다. 그리고 잘 아는 느낌의 형태다. 서늘한 느낌에 돌아보는 빈우의 눈앞에서 땅이 녹아 갈라지며 샤다이 하나가 떠올랐다. 다 부서진 장갑복을 입은 리퍼가 주변을 녹이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 안돼.”
그 모습을 본 알탄훼아나가 겁에 질려 벌벌 떤다. 빈우는 바로 그라디우스의 기총을 조작해 그 샤다이를 쐈다. 그러나 날아간 코일건 탄환들은 모두 샤다이 근처에서 녹아버렸다.
-우지! 갈겨!
롱소드가 하강하며 입자빔포를 쐈다. 그러나 샤다이는 플라스마를 마주 쏴 그것을 상쇄했다. 이어 플라스마를 길게 뽑아 휘둘렀다. 마치 검처럼. 그 검에 스친 롱소드가 휘청한다. 그리고 그 검의 궤도는 이제 그라디우스를 향했다. 팀원들의 탈출선이 두 동강 날 차례다.
-이륙해, 어서!
빈우가 제트팩을 써서 바깥으로 뛰쳐나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방패 모드로 플라스마를 튕겨냈다. 이어서 착지함과 동시에 코일건으로 놈의 발치를 쐈다.
“썅!”
그러나 코일건 탄환은 녀석의 주변에 가기만 해도 녹아서 증발했다. 빈우는 혀를 차며 나머지 동력을 스핑크스로 몰았다. 그리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뭐해! 명령이다! 이륙해! 우지, 그라디우스 호위하면서 빠져!
다른 팀원들은 뒤로 한 채 오직 빈우만이 나섰다. 무모하지만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이번 결단의 근거는 감이다. 경험에서 오는 감. 빈우는 지금까지 겪어온 전장의 경험과 눈앞에 벌어진 일을 비교해, 방금 나타난 상대와 현 상태의 태스크 포스 373이 싸우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팀장님!
당연히 팀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주인님!
아나스탸샤의 비명까지 들려온다. 팀원들로부터는 두뇌통신으로 협공하자는 의견이 나오지만 빈우는 그것을 묵살했다. 상대가 너무 안 좋다. 빈우는 눈앞의 리퍼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했기에 다시 팀을 재촉했다.
-부팀장!
-···알겠습니다.
씹어 삼키는 듯한 아룹의 대답. 마침내 세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샤다이, 한 기의 안드로이드를 태운 그라디우스가 기울어지는 땅에서 이륙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했다. 갑자기 그라디우스가 추락한 것이다. 피격당한 것도 아니다. 마치 날던 중에 동력이 끊어진 것처럼 뚝 떨어졌다.
“여전하군요. 김 빈우 소령.”
리퍼의 말이 들려왔다. 놈은 공중에 떠서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빈우는 놈을 알고 있다. 그 껍데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샤다이의 얼굴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우가 알고 있는 얼굴로 바뀌었다.
“체메트디오프.”
“으음, 원래 지금 부활할 예정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부하의 몸을 빌려 다시 살아난 체메트디오프가 빈우 앞에 섰다. 두 사람이 마주치는 순간 샤다이 집정관이 먼저 웃었다.
“아아, 대화를 하러 온 겁니다. 대화를.”
마치 빈우가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컨커러의 동력이 꺼졌다. 시야가 꺼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움직일 수조차 없다. 서둘러 헬멧을 벗은 빈우가 본 것은 자신의 얼굴에 손바닥을 들이미는 체메트디오프의 모습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헤어진 딸을 만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놈의 손에서 플라스마가 뿜어져 나와 뒤에 있던 그라디우스에 명중했다. 이어서 그라디우스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더니 기체가 그대로 뒤틀려 뜯겨나간다. 안에서 373 지상팀원들이 나와서 공격하려 했지만, 그들 역시 장갑복의 동력이 끊겨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굉음과 폭풍이 일었다. 우지의 롱소드마저 동력이 끊겨 추락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빈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가 알고 있는 샤다이의 능력 중에서 이런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샤다이에겐 없지만, 이것이 가능한 종족을 알고 있긴 하다. 게다가 빈우 본인이 당한 적도 있다.
“딸아, 내 딸. 알탄훼아나.”
체메트디오프의 목소리는 마치 놀이동산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흥겹다. 놈은 빈우를 지나쳐 추락한 그라디우스 쪽으로 서서히 날아갔다.
“어떻게 된 거니? 그렇게나 기세등등하던 네가, 이렇게나 가녀린 모습으로 있다니?”
그렇게나 아버지 체메트디오프를 싫어하고 증오했던 알탄훼아나는 지금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너, 너넌. 너 따윈.”
알탄훼아나는 딱딱거리는 턱을 억지로 움직여 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체메트디오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으로 날아가 딸의 앞에 섰다.
“음? 으음? 흐으음. 역시나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구나. 가엽게도. 이 섬이지? 그렇지? 그래그래, 그 녀석은 집요하지. 잔인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딸아, 네가 이렇게 된 것에는 너의 책임도 있단다. 고작 그런 고문을 당했기로서니 어찌 이리도 마음이 꺾일 수 있단 말이냐? 이딴 배포로 호민관을 하다니. 네가 이렇게 영락한 것은 네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암.”
비웃음인지 대견스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웃으며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진다. 그녀의 얼굴에 생긴 일그러짐은 처음에는 분노였으나 점차 공포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말이다. 별심장의 불길에 그렇게 호소를 할 수 있다니. 늦깎이치고는 제법이야. 고르고 고른 내 부하들도 이 행성 안의 그를 깨우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단 말이다. 그것을 그렇게 빨리 돌려보낸 점은 칭찬할만해. 어떠냐, 이제는 이 아비와 같은 길을 걸어보지 않으련?”
부드럽게 내민 체메트디오프의 손이 알탄훼아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살랑거리며 대답을 기다린다. 사방이 조용한 지금 들리는 거라곤 알탄훼아나의 할딱거리는 숨소리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체메트디오프의 손바닥을 후려친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만, 역시나 실망인걸. 이 어리석은 딸아.”
기뻐서 웃는 아버지와 울분에 차 우는 딸.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태스크 포스 373 대원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장갑복의 동력이 꺼졌다곤 하지만 수동으로 벗고 움직일 수는 있다. 허나 그렇다 한들 아무런 무기도 없이 플라스마를 휘두르는 샤다이에게 덤볐다간 순식간에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라디우스에서 떨어진 대원들은 꼼짝 못 하는 척 굳어있는 빈우의 수신호에 자기들도 모두 못 움직이는 척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이를 어찌할까?”
체메트디오프가 웃으면서 협박을 한다. 손에서 플라스마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가르자, 잠시 멈췄던 지진이 다시 일어났다. 그때 기울어진 그라디우스 안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땅에 떨어져 널브러진 것은 바로 아나스타샤였다. 동력이 꺼진 그녀는 멍한 얼굴을 한 채 마치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 순간, 컨커러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더니 체메트디오프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