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빈우가 장갑복을 벗고 달려 나갔을 때, 체메트디오프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뒤로 손을 휘둘렀을 뿐이다. 놈의 손끝에서 플라스마 검격이 튀어나와 빈우를 갈랐다. 아니,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빈우는 그대로 체메트디오프를 덮쳤다.
“억! 어떻케켛.”
빈우는 체메트디오프가 휘두른 플라스마를 맞고도 살아남아 그의 뒷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목을 잡혀 떠오른 체메트디오프는 다시 플라스마를 쏘며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뒤로 돌려 빈우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경추를 으스러뜨리는 자의 모습을 보았다.
손등을 뚫고 튀어나온 발톱, 귀를 꿰뚫고 나와 비틀어진 뿔, 마주친 눈에는 허연 피막이 덮여있다. 워프 비스트다. 샤다이의 선조가 강림한 몸이다. 그렇다면 별심장의 불길에 당할 리 없다.
“역시, 역시! 그들과 타협한 것이군. 타협을 했어.”
목부터 허리까지 척추를 모조리 뽑아낸 빈우의 발톱이 체메트디오프의 등에 꽂혀 난도질한다. 푸른 피와 뼛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폐와 심장으로 추정되는 순환계들마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흘러내렸지만, 샤다이의 집정관은 아직 말을 하고 있다.
“왜? 왜 갑자기 수락한 것이지? 무엇 때문에?”
체메트디오프의 새로운 몸은 가슴팍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로는 시퍼런 장조림이 되어버렸지만, 목 위로는 살아있다. 입은 더더욱 살아있다.
“내 딸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지, 아니야.”
태스크 포스 373의 팀장과 샤다이 호민관이 아무리 협력을 했다 한들, 빈우가 자신을 버려가며 구할 관계는 아니다. 집정관의 꺼져가는 눈이 다음 목표를 찾았다. 장갑복을 벗고 달려오는 373의 동료들, 그들은 워프비스트로 변한 팀장을 보고 경악하지만, 그들 역시 아니다. 다음으로 본 것은 미동도 않은 채 땅에 넘어진 쿠델카 모델 안드로이드다. 거기에까지 시선이 닿은 체메트디오프의 눈이 음흉하게 휘어졌다.
“아아, 과여언. 효자 아닌가. 역시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오늘은 정반대로군. 이건 희극일까, 비극일까.”
폐를 잃은 체메트디오프의 입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나온다. 빈우의 발톱이 놈의 눈과 뇌를 함께 날려버린다. 그래도 그 아래 입은 달싹거린다.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후회였을까, 저주였을까. 샤다이의 육체가 산산조각이 난 다음, 주변의 동력이 다시 돌아왔다. 멈췄던 지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팀장님…?”
어느새 다가온 아룹이 조심스레 빈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코일건이 들려있다. 그 모습을 본 파트리샤가 기겁해서 항의했다.
“부팀장님! 지금 뭐 하시는-”
“조용히 해. 더 이상 다가가지 마.”
그녀의 말은 바로 묵살당했다. 더구나 워프 비스트로 변한 빈우마저 373 팀원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그 이상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빈우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아룹을 흘깃 쳐다본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알탄훼아나에게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알탄훼아나.”
쉭쉭 거리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알탄훼아나가 움찔했다.
“고칠 수 있나?”
빈우의 말에 파트리샤와 위르겐은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괴물로 변한 빈우의 안에 조금이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룹은 아직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대는… 그들을 협박했구나. 그대 안의 선조를, 고문하고, 협박해서….”
겁에 질린 알탄훼아나가 덜덜 떨며 더듬거렸다.
“고칠 수 있나?”
다시 다가서며 질문하는 빈우에게 알탄훼아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 몰라. 그대 안에는 이미 선조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대 안의 계단은… 너무 많아. 하지만, 모르겠어. 이 계단들은 마치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계단들이다. 진흙으로 쌓은 탑에 도끼질을 해서 빚어낸 계단 같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숫자를 가지고 어떻게 지금까지….”
혼란스러워하는 알탄훼아나는 단지 공포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능력 밖의 일에 휘말리자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이다. 그리고.
“허억!”
알탄훼아나가 돌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빈우는 그녀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알탄훼아나는 자기 자신의 두 눈을 뽑은 채 울고 있었다. 뻥 뚫린 눈구멍에서 마치 눈물처럼 푸른 피가 흘러내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안구는 이미 금색 빛을 잃었다.
“무엇을, 본거지?”
하지만 현재의 알탄훼아나는 그저 바닥에서 울고 있을 뿐이다. 아직 눈은 무사하고, 거기선 푸른 피 대신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방금 빈우가 본 것은 알탄훼아나가 선택한 미래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보았을 것이다. 빈우가 선택한 결과를, 그 흔적을.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워프 비스트와 타협한 그에게는 어떤 미래가 있을까.
“그… 그대는.”
알탄훼아나가 더듬더듬 무어라 말하려 했다.
“주인님!”
비명과 함께 아나스타샤가 달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아아, 도련님!”
아나스타샤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빈우를 껴안았다. 손바닥으로 서둘러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변해가는 그의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나을 거예요, 나을 거예요. 낫고 말고요네나을거예요나을거예요.”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더니, 자신의 주인을 뒤로 한 채 모든 이들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보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한때 자신이 모셨던 아룹, 파트리샤, 위르겐, 알탄훼아나 모두를 노려보는 것이다. 마치 그들로부터 등 뒤의 주인을 지키려는 듯이.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면 물어뜯을 기세다. 하지만 이러는 순간에도 땅을 기울어지고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 다들- 괜찮습니까.
그때 우지의 통신이 들려온다.
-롱소드를 띄울 수 있어요. 어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아룹이 총구를 내렸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풀릴 듯했다.
“팀장님. 일단 귀환합시다.”
아룹의 말에 다들 안도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부팀장.”
빈우의 짧은 한마디. 그리고 부팀장을 바라보는 팀장의 눈길.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아룹은 다시 총을 겨눴다. 그것을 본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야이 씨바라아알. 지금 뭐하는 거냐고요오오오!”
파트리샤가 둘을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위르겐도 여차하면 달려 나갈 분위기다.
“아나스타샤, 네 주인을 잡아. 어서 구하자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위르겐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지금 주변 모두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빈우가 아타스타샤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 메이드는 자기가 키운 주인을 결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빈우는 그녀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질문했다.
“고칠 수 있나?”
빈우가 세 번째로 물었다. 알탄훼아나의 침묵은 아주 짧았지만, 아주 길게 느껴졌다.
“몰라, 하지만 시도할 수는 있어.”
빈우의 침묵도 역시 짧았지만, 마찬가지로 길게 느껴졌다.
“부팀장, 나를 포박해서 귀환합시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총을 거뒀다.
“알겠습니다. 파트리샤, 위르겐.”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이 빈우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아나스타샤의 악다구니였다.
“저리 꺼져. 꺼져!”
로프와 케이블, 보수용 접착액을 들고 간 위르겐이 곤란한 얼굴로 멈춰 섰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파트리샤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 우린 팀장님을 구하려는 거야. 어서 블랙 랜스로 올라가야지. 알탄훼아나가 치료해줄 거라고.”
그러나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막무가내였다. 변해가는 주인, 그에게 총을 겨눈 부하, 그리고 포박하기 위해 다가오는 부하들. 아나스타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무도 주인님을 해칠 수 없어. 아무도 내 아이를 해칠 수 없어!”
분노에 휩싸여 벌벌 떠는 그녀의 귀에 빈우가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아나스타샤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뜬 표정은 경악이었다. 결코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듣고는 배신감에 놀란 반응이다.
“어, 어어.”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얼굴은 곧바로 무표정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수동모드로 들어간 그녀는 로봇이 되어 자기 의지는 죽인 채 철저히 복종하게 되었다. 빈우는 멍하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서둘러.”
파트리샤와 아룹이 달려들어 빈우를-워프 비스트를 포박했다.
“씨발, 적당히 묶어. 졸려 터지겠네.”
이 마당에도 팀장의 농담이 나오자 파트리샤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도 굳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그들의 머리 위로 도착한 롱소드가 장비 견인용 로봇암을 꺼냈다. 그리고 회수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회수해서 빈 무장창에 넣었고, 나머지 인원들도 로봇암으로 잡아 올렸다.
-팀장… 님……?
현재 빈우의 모습을 본 우지는 놀래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워프 비스트로 변해가는 팀장이 오만가지 도구로 묶여있으니 놀랄 법도 하다.
-버벅대지 말고. 로봇암으로 잡아서 가자. 만약 내가 수틀리거든….
빈우의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킨 것은 비단 우지만이 아니었다.
-…바로 던지고 입자빔포로 쏴버려. 명령이다.
명령이란 단어가 우지의 두뇌칩에 있는 한 구역을 자극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두뇌칩은 우지에게 커다란 사명감과 의무감을 심어주었다. 이 우주에서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알게 된 우지는 절로 고양감에 흥분이 되었다.
-야, 우지.
위르겐의 말에 정신을 차린 우지에겐 가래침을 뱉는 소리에 이어 전우의 퉁명스러운 핀잔이 들려왔다.
-그런 속삭임에 속지 마. 넌 네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해.
그의 말을 들은 우지는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두뇌칩이 이런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새끼들. 말 졸라 안 쳐듣네. 부팀장.
아직 두뇌칩은 작동하는지 빈우는 373 팀원들의 두뇌 회선으로 통신할 수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팀장님.
언제나 서글서글하던 아룹의 목소리는 굳어있었다.
-뭘 말해요. 다 알고서도 모른 척하기에요.
-…알겠습니….-
-아이 쌰아아앙!
아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트리샤가 욕지거리를 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녀 또한 일이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면 자신을 죽여 달라는 빈우의 명령, 부탁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것뿐이다. 거부할 순 없다. 두뇌칩의 권유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직업의 의무감을 그녀로서는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부하 복이 많네.
빈우의 그 말을 끝으로 팀원들의 두뇌 통신은 조용해졌다.
-야, 위르겐.
파트리샤의 개인 통신에 위르겐이 움찔했다.
-못 들은 척 연기하지 말고, 너 그런 거 못 하더라. 우리끼리 대화한들 뭐 큰일이 나겠니?
파트리샤의 핀잔에 위르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아, 왜요?
-씹새가. 요즘 부팀장님 분위기 조금 수상치 않디?
부팀장 아룹 라마누잔 원사는 언제나 허허 웃기에 일견 사람 좋아 보이지만, 단검뿔 토끼다. 단일 개체로는 연방 최고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하지만 그 상황에선 부팀장님이 총을 겨눠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야 팀장님을….
-등신아. 그거 말고. 스카이 후크에서 팀장님이랑 부팀장님 둘이서 쏙닥쏙닥하더란 말이야. 너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불행히도 위르겐은 그때 두 사람이 대화를 했는지도 몰랐다.
-아하, 흐음, 그게 말이죠.
-응, 알았어. 너 못 들었네.
파트리샤가 한숨과 함께 말을 끊었다. 무시당한 위르겐은 툴툴대다가 이번엔 자신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 말이죠.
-응? 걔가 왜?
파트리샤도 안드로이드 메이드가 걱정이 되는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방금 지상에서 아나스타샤가 했던 행동은 결코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안드로이드라니. 그러나 팀장이자 주인인 빈우가 애초에 안드로이드인 그녀의 설정을 어떻게 해놨는지에 따라서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행동할 수도-행동해야만 했을 수도 있으니 이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아까 스카이 후크 얘기하니까 문득 떠올라서 말이죠. 팀장님이 요즘 아나스타샤를 차갑게 대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아까 보니까, 아나스타샤도 그것 때문에 이것저것 노력해보던 눈치던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네요.
-아까? 뭘 봤는데?
파트리샤의 질문에 위르겐이 머뭇머뭇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뭐시냐. 오늘은 다른 날하고 다르게 힘 팍 주고, 검정 스타킹에 깔맞춤 검정 레이스 팬….
-로봇박이 새끼.
-아니이! 내가 훔쳐본 것도 아니고! 떨어질 때 보였잖아요. 그리고 이건 아나스타샤가 주인을 위해서-
조금 소란스럽게 투닥투닥하던 파트리샤와 위르겐은 갑자기 들린 아룹의 작은 손가락 소리에 급히 조용해졌다.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본 373의 부팀장은 그제야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