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쿠델카 모델의 유두 색깔은?”
“분홍색.”
우물쭈물하던 아룹의 질문과는 달리 마커스의 대답은 금방 나왔다. 이어서 마커스가 바로 질문했다.
“아나스타샤의 유두 색깔은?”
“…갈색.”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아룹이지만, 이런 내용의 대화는 영 낯설었다. 물론 동료들과 이 비슷한 분위기의 짓궂은 농담을 한 적은 종종 있다. 하지만 군사정보국 차장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의 안드로이드를 대상으로 한 음담패설은, 그것도 그 사람이 부추겨서 하는 것은 상당히 민망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쪽 바닥에서 가끔 하는 상대방 확인법이니까요.”
아룹의 마음을 아는지 마커스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그러고 보니 빈우는 저번에 오브리가도의 피자 타이거에 아룹을 데려가 그곳 점장과 이상한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지금과 비슷한 용도였으리라.
“물론 두뇌칩으로 상대방 조회가 가능합니다만, 이게 완벽한 보안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단둘만이 알고 있는 암호들을 통해 확인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혹은 앞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마커스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이 커피가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블랙 커피와 빵. 이에 대해선 빈우가 지나가듯이 농담조로 말한 적이 있었다.
“네, 사관학교 시절의 식사였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징벌용이었다고 하시더군요.”
“맞습니다. 제 기수에서 이걸 가장 많이 먹은 것은 저와 빈우지요. 이 사실은 아는 사람은 저와 빈우 외에도 당시 교관들과 동기들 정도, 제법 됩니다. 하지만 자기를 키워준 안드로이드의 젖꼭지 색깔에 대해선 이야기가 다르죠.”
마커스는 빵을 한 조각 뜯어 입에 넣곤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빈우가 프로토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하셨습니다. 동일한 단어나 사물을 언급한다고 해도, 각 대상이 처한 상황이나 지내온 환경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인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위장 임무를 종종 뛰는 저희들은 이런 대화로 서로를 파악하지요. 난 적이지만 실은 너의 아군이라거나, 난 아군이지만 지금 적으로 행동해서 도와줄 수 없다거나, 혹은 나는 가짜다, 라거나 말입니다.”
마커스의 시선이 아룹을 잠시 훑었다. 약간 적의가 엿보이는 듯했지만 이는 적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마치 아룹 라마누잔 원사라는 대상을 낱낱이 분석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금의 이야기는… 저와 빈우가 처음으로 싸웠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저 스펙을 쌓으려고 온 잘나가는 부잣집 도련님과 절박한 심정으로 도망쳐 온 농업 행성 촌뜨기가 사관학교에서 만났다 해도 친구가 되긴 힘들지요. 하지만 우리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쿠델카 모델에게 길러졌다는 점이죠.”
아까 마커스는 쿠델카 모델 안드로이드와 동행했다. 그녀 역시 메이드였고, 복장도 아나스타샤와 마찬가지로 빅토리안 스타일이었다.
“닮은꼴이라곤 전혀 없던 두 악동은 같은 첫사랑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급속히 친해졌지요. 마치 비밀스러운 터부를 공유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희미하게 웃는 마커스의 미소는 아마 당시를 회상했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보모에 대해서 이런저런 자랑을 하던 둘은 점차 음흉한 곳까지 이야기를 뻗쳐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젖꼭지까지 갔지요. 그런데 마침내 거기서 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저는 분홍색을 주장했고, 빈우는 갈색을 주장했지요.”
거기까지 말한 마커스는 추억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런 마커스를 보며 아룹은 그 당시 두 악동이 어떤 결론을 냈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싸웠습니까?”
“엄청나게요. 각자 소중한 사람의 비밀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양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옥상에서 떨어진 두 악동들은 땅에 떨어질 때까지 결코 멱살을 놓지 않았고, 사이좋게 목뼈가 부러져 침대 신세를 졌죠.”
마커스의 입가에 잠시 생겼던 쓴웃음은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사라졌다.
“저와 빈우는 그런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사이입니다. 동시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는 사이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밀접한 협력 관계지요. 그런데… 방금 같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비밀을 당신 같은 제삼자에게 전해주다니 좀 충격이었습니다.”
아룹은 태스크 포스 373의 부팀장이자 빈우의 전우이기도 했지만, 마커스에겐 한낱 타인에 불과한 모양이다.
“의외였습니까?”
“아뇨. 그 녀석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지요. 또한 당신이 빈우에게 있어서 저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상대란 것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온 것입니다. 이제 안내해 주시죠.”
아룹은 쿠델카 모델의 은밀한 신체 부위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를 확인하는 암호임과 동시에 전달자의 신원을 보증하는 얘기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어쨌든 그는 팀장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동시에 미묘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조직의 차장을 팀장에게로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아룹이 마커스를 안내한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장소는 병실이 아니라 블랙 랜스 외곽의 격리 구역이었다. 주변은 전파나 자기장 등에 대해 철저히 차단해놓았고, 유사시에 구역째로 소각하거나 폭발시킬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세 사람이 있었다. 무표정한 아나스타샤,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대는 알탄훼아나. 그녀 둘은 구속구에 묶인 빈우를 보고 있었다. 이어서 마커스도 빈우를 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간신히 평정심을 지켜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빈우야.”
마커스의 부름에 빈우가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고통 때문인지 변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워프 비스트의 형상이 상당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친구는 지금 인류의 적으로 변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마커스.”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빈우가 대답했다. 친구의 그 모습에 마커스는 입가를 간신히 일그러뜨려 웃는 흉내를 냈다.
“새끼, 입이 참 싸다. 그런 걸 여기저기 떠벌리고 말이지.”
마커스의 말에 빈우의 송곳니 가득한 입이 씰룩였다. 그것 역시 힘들게 만든 미소임을 마커스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갈색인 것을 입으로 확인했다고.”
이번에 픽 하고 터진 마커스의 웃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애비 없는 호로새끼 티 내나. 입으로 어떻게 색을 확인하냔 말이다.”
이번에는 빈우의 눈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시선이 아나스타샤에게로 향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수동모드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마커스의 뒤에서 아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저희로서는 그녀를 재가동할 수 없었습니다.”
아룹은 블랙 랜스로 귀환한 다음 아나스타샤를 원래 상태로 돌려보려 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빈우야, 너 설마… 아나스타샤를 재기동할 수 없는 거야?”
아나스타샤 같은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주인을 귀신같이 판별해낸다. 만약 빈우의 명령이 거부되었다면 아나스타샤는 현재 저 모습의 빈우를 주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의미거나, 그의 신원을 보증할 두뇌칩이 오염되었다는 의미다.
“아니, 인식은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상태니까 내 두뇌칩이 어떨지 몰라서 말이야. 최대한 외부 접촉은 삼가고 있어. 몇몇 기능은 아예 묶어놓았다.”
현재 빈우는 워프 비스트가 되어가는 중이다. 만약 두뇌와 두뇌칩에 워프 비스트의 침투가 시작되었다면 자칫 군사정보국의 기밀이 샤다이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빈우는 최대한 육체적, 정신적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내가 할게.”
마커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에게 걸어갔다. 안드로이드는 즉시 고개를 돌려 목 뒤의 접속단자를 드러냈고, 마커스는 거기에 손가락을 대면서 명령했다.
“수동모드 해제.”
그 명령이 입력되자 아나스타샤가 다시 고개를 마커스 쪽으로 돌렸다. 그 사이 그녀의 얼굴엔 울음이 가득해져 있었다.
“…타이 소령님.”
마침내 감정을 되찾고 부들부들 흐느끼는 그녀가 무릎을 꿇고 마커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부탁입니다. 주인님을 구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주인님을….”
마커스는 서둘러 자신도 앉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달랬다.
“걱정 마. 아나스타샤. 난 빈우를 구하러 왔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부터 해줘.”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아- 제 잘못이에요. 제가 잘못을 저질렀어요. 제가, 제가 내려간 것 때문에 주인님이 저렇게 되신 거예요. 제 잘못이에요. 전 나쁜 아이예요.”
마커스는 경련하는 아나스탸사의 접속 단자에 다시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리고 유선으로 접속해 문제가 되는 당시의 기록을 조회했다.
빈우와 373 지상팀이 누벨 노르망디의 지열발전 연구소로 강하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오다 히토미 의원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실에 있던 알탄훼아나가 경고를 해왔다. 아나스타샤는 알탄훼아나의 정신 치료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통신회선을 하나 만들어 연결해 두고 있었고, 그쪽으로 알탄훼아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저 건물 아래에서 별심장의 불길이 생기려고 한다!”
샤다이는 플라스마를 별심장의 불길이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항성의 플라스마를 일컫는다. 알탄훼아나는 지상의 리퍼가 누벨 노르망디 지하에서 플라스마를 상전이 시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것이 완성되면 지상팀이나 42전단이 문제가 아니라 별 자체가 항성으로 변한다고 했다. 열이나 압력, 질량과는 상관없이 고체와 액체들이 바로 플라스마화 한다고 말이다.
수 차례 치료를 하며 알탄훼아나의 여러 정보를 수집했던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경고가 진실임을 파악했고, 주인을 구하기 위해 즉시 행동에 나섰다. 알탄훼아나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가 그 플라스마화 과정을 중지시키려고 한 것이다. 말릴 사람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비서 역할을 하는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제법 권한도 있었고, 오다 의원마저 건투를 빌어주었다. 주인을 반드시 구하라고.
그러나 지상에서 마주치게 된 것은 죽은 줄 알았던 샤다이 집정관인 체메트디오프였다. 놈은 압도적인 플라스마 발생능력 외에도 발 가르단 하스 관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자기 조작능력을 사용해 373 지상팀을 철저하게 농락했었다. 여기서부터는 아나스타샤도 동력이 꺼지고 장갑복의 동력도 떨어지는 바람에 373팀원들의 두뇌칩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군.’
마커스는 빈우의 두뇌칩에 있는 전투 기록을 봤다. 당시 빈우는 장갑복이 작동 정지된 상황에서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체메트디오프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 바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빈우는 철저하고, 또한 냉혹하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 나가도 그는 아랑곳 않고 목표만을 노릴 것이다.
그러나 그때 빈우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동력이 끊어진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이었다. 마치 시체마냥 놀란 표정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진 아나스타샤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빈우가 폭발한 원인이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전원이 내려간 것뿐이다. 하지만 빈우는 그녀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평정을 잃고 폭주한 것이다.
만약 마커스 자신이었다 해도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주고, 가정교사를 했던 쿠델카 모델 크산티페가 그런 꼴을 당했다면 잠시나마 평정을 잃었을 게 확실하다. 그러나 결국은 진정했을 것이다. 빈우와는 달리.
“아나스타샤. 빈우를 치료할 방법을 알잖아. 어서 해야지.”
마커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나스타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소리쳤다.
“그래요! 알탄훼아나. 알탄훼아나가 치료할 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