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아나스타샤가 허겁지겁 알탄훼아나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 샤다이마저 겁에 질려있었다. 악순환이었다. 빈우를 치료해야 할 알탄훼아나는 지상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정신적인 상처가 다시 도졌고, 또 그녀를 치료해야 할 아나스타샤는 수동모드가 되어버린 바람에 지금까지 그녀를 제대로 돌봐줄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탄훼아나 씨. 빈우의 친구인 마커스 타이라고 합니다. 저는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덜덜 이를 떨던 알탄훼아나가 마커스의 말을 듣더니 대답했다.
“거짓말.”
마커스는 아차 싶었다. 몇몇 고위 샤다이들은 상대의 대화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말을 다시 고쳤다.
“좋아, 숨길 것 없지. 난 빈우를 구하기 위해 뭐든지 할 거다. 뭐든지.”
그게 진실임을 파악한 알탄훼아나는 그 ‘뭐든지’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지레짐작해버렸다. 자신의 아버지와 지구제국, 빈우에게 계속해서 치인 그녀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알탄훼아나의 옆으로 아나스타샤가 다가와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알탄훼아나 씨. 제가 지켜드릴게요. 제가 당신을 돕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주인님을 구해주세요.”
그러자 알탄훼아나는 간신히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다.
“그, 그렇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일 수도 있어. 내가, 난. 난….”
하지만 알탄훼아나는 아직 정신이 채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누벨 노르망디에 강하했다. 그리고 그 결과 태스크 포스 373 지상팀을 구했으며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렇다면 그때 왜 저를 부르신 거죠?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저 밑의 누벨 노르망디까지 가려고 하신 거였어요?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나요?”
얼핏 보면 다그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알탄훼아나로 하여금 당시 그녀가 품은 결심의 동기를 다시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그건, 체메트디오프의 부하가 별을 깨우려 했기 때문이야.”
별을 깨운다, 란 단어에 아룹의 눈매가 꿈틀했다. 방금 겪었던 마그마의 분출과 그 뒤로 이어진 플라스마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낸 것이다.
“별을 깨운다고요?”
아나스타샤는 마커스와 아룹의 의문을 캐치해서 질문했다.
“너희들 말로는 해- 행성을 항성처럼 바꾸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연방의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행성을 항성으로 바꾸는 것, 딱히 불가능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중력과 질량이 필요하다. 행성만 한 크기의 물체가 통째로 핵융합을 할 정도의 수치다. 하지만 방금 누벨 노르망디에선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저 리퍼들 몇몇이 모여서 눈에 띄지도 않는 수작을 부렸는데 맨틀 아래의 마그마가 플라스마화 되었다. 인류의 영역에서 벗어난 과학기술이다.
“그건, 몹쓸 짓이야. 그 아이, 행성들은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야. 그것을 억지로 깨운다는 것은, 마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것과 같다고.”
제왕절개는 딱히 금기시된 기술이 아니지만, 연방의 사람들은 샤다이인 알탄훼아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갔다. 자연적이지 않은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죠. 그래요. 그들은 항성을 만들어서 다른 이를 해치려는 거였군요.”
아까 누벨 노르망디에서 솟아오른 코로나는 순양함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아나스타샤가 알탄훼아나를 껴안고 다독인다. 그러자 상처투성이 호민관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아냐, 그게 아냐. 놈들이 항성을 만들려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발 가르단 하스를 만들려는 거야. 확실해.”
발 가르단 하스란 말에 마커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요 근래 위험도가 급격히 올라간 행성 지성체다. 지표 내부에 플라스마 신경계가 있는, 별 그 자체로서 두뇌인 고대 종족이다. 그러나 마커스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정보만 수집했다.
“발 가르단 하스가 이케가미 소이치로를 통해 그의 몸 안으로부터 계단을 부쉈어. 그다음으로 귀환 찬성파와 집정관은 적셔진 종족과 유에네스를 계단의 재료로 바쳐 다시 계단을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부쉈어.”
뉴 소노라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날 알탄훼아나는 지구제국에 사로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를 악문 그녀가 간신히 다음 말을 꺼냈다.
“이건 찬성파 놈들의 계획 중의 하나야. 발 가르단 하스가 계단을 부쉈다면 다시 만들 수 있진 않을까. 만약 그가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새로운 발 가르단 하스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라고.”
동족의 귀환을 위해 항성을 만들다니 스케일이 거창한 놈들이다. 거기까지 들은 마커스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외부와 연결된 유선 회선을 통해 자신의 비서인 크산티페를 불렀다.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명령을 내린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아나스타샤는 다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행성 생명체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다시 계단을 만들려는 생각인가요?”
이번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다그치지도 않았고, 그저 부드럽게 보듬어 줄 뿐이다. 그러자 흠칫거리며 떨던 샤다이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 행성 생명체를 만든다고 해도 발 가르단 하스처럼 되려면 몇십억 년은 필요해. 찬성파의 계획은 그게 아냐. 만약 새로운 행성 생명체에 미약하나마 지성이 있다면, 감정이 있다면… 거기에 고문을 가하고 고통을 주어 거대한 계단을 만들겠다는 거야.”
태양을 만들고, 거기에 고문을 가한다는 계획은 도무지 인류로선 가늠하기 힘든 계획이다. 별에 지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이미 발 가르단 하스라는 전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고문하겠다는 계획은 스케일이 참으로 샤다이답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신 체와 가면… 은 무슨 의미죠?”
아나스타샤가 다독여준 덕분에 알탄훼아나는 평정을 상당히 되찾았다. 방금 아나스타샤의 질문대로 알탄훼아나는 누벨 노르망디에서 호소했다. 네가 쓸 가면과, 말을 걸러줄 체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친구가 없다고. 그러니 돌아가라고.
“발 가르단 하스 정도의 생명체는 우리 같은 작은 것들과 바로 대화할 수 없었어. 그 방대한 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겐 무리야. 그조차 자신을 보좌해 줄 관리자들이 있었기에 대화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지. 그 관리자들이 정보를 걸러주는 체가 되고, 다른 이들과 대화할 때 쓰는 가면이 되어주었던 거야.”
이외에도 중요한 정보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이쯤 해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제 주인님은 나을 수 있나요? 그분 몸 안에 들어간 당신의 선조들을, 변하고 있는 저 몸을 되돌릴 수 있나요?”
아나스타샤는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아니. 그건 내가 아냐. 내가 하고 싶어도 못 해. 저자는, 빈우는, 선조들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여 죽이고 있어!”
알탄훼아나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빈우에게로 넘어갔다.
“사실이야.”
워프 비스트의 뿔이 돋아난 빈우가 말했다.
“이전부터 내 안으로 놈들이 들어온 기색이 있었어. 그동안 어떻게든 막고는 있었지만, 난 그때 체메트디오프를 잡기 위해 몸의 주도권을 잠시 넘겼지. 워프 비스트들은 플라스마에 당하지 않거든. 도박이었지만 결과는 뭐, 성공이었지. 알탄훼아나, 너도 니 ‘선친’의 표정을 봤잖아? 걸작이더군.”
빈우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듣는 이들은 결코 웃지 못했다. 또 주인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원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힘겹게 울음을 참는 아나스타샤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격노해 자신의 몸을 버려가며 체메트디오프에게 덤벼든 것이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이 병신같은 년!’
아나스타샤는 치맛자락을 꽉 쥐어 잡으며 자책했다.
“빈우야. 그걸 막을 수는 없냐.”
마커스가 한 걸음 다가서며 질문했다.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빈우가 변한 것도, 변화가 진행되는 것도 다 빈우 자신의 탓이란 얘기다.
“글쎄다. 일단은 계단은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야. 거기로 놈들이 오는 것 같은데, 이제까진 내가 착실히 죽였어. 그런데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군.”
거기서 빈우는 알탄훼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보여?”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알탄훼아나는 조심조심 말했다.
“아, 아직 내 능력이 확실히 돌아온 건 아니야. 하지만… 왜 그대는 계단의 발판이 그렇게 많지? 왜 그렇게 많은 발판을 가졌으면서도….”
거기까지 말한 알탄훼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건 다 이쪽 발판들이야. 그대 마음속의 계단이라고. 내가 그날 부쉈던 저쪽의 계단은 아직 복구되지 못했어. 그렇다면 김 빈우, 지금 그대 안에 있는 선조의 정보들은 이미 과거부터 그대의 몸속에 들어온 자들이다. 그 때문에 몸도 변화하고 있고. 하지만 이들은 나 혼자선 없앨 수 없어. 그대가 도와주어야 해.”
“…라는데?”
빈우의 시선은 이번엔 마커스 쪽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 말고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마커스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어서 지끈거리는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너도 알다시피… 뻐꾸기 작전이 발동된 다음, 워프 비스트 증상이 발현된 자들은 모두 체포 대상이다. 아니면 제거.”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황망한 표정이 되었고, 아룹은 조금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둘 다 빈우를 지키기 위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워프 비스트는 인류의 몸을 차지한 샤다이 선조들이고, 이 현상을 앞으로 가속화시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폭탄인 것이다.
“아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여긴 태스크 포스 373이야. 샤다이의 기술과 자재를 수집하는 팀이지. 워프 비스트를 사로잡았다 한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즉 마커스는 안전핀이 풀린 수류탄을 처리하기보다는 원래의 주인에게 그대로 맡겨줄 속셈인 듯했다.
“괜찮겠어?”
빈우의 질문에 마커스는 어깨를 으쓱한다.
“내 권한과 네 권한을 합치면 딱히 문제 될 것은 없는데?”
“난 지금 워프 비스트의 육체야. 정신도 어떨지 모르고.”
“그걸 또 누가 알지?”
빈우의 입장에선 아주 믿음직스러운 말이지만, 연방의 안위를 생각해야 할 정보국 차장의 입장으로선 상당히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이다.
“그리고 발상을 바꿔봐. 이건 오히려 워프 비스트에 대해서 373 팀장인 네가 연방의 누구보다 자세히 연구할 기회 아냐?”
마커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빈우가 실없이 웃었다. 군사정보국 차장이 은닉하고자 한다면 정말 제대로 감추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워프 비스트에 대한 연구는 답보상태다. 살아있는 워프 비스트에 반쯤 발을 걸친 빈우라면 상당한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마커스, 너 이 미친 새끼.”
“새삼스럽게. 너랑 엮이면서 내 인생은 이미 이 꼬라지 난 거야. 그리고 알탄훼아나 씨?”
마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알탄훼아나를 대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영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만큼 마커스의 태도가 가식적이란 의미다.
“제 친구가 부디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건 그대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할 일이다.”
이번엔 마커스는 아나스타샤 쪽을 보았다. 헌데 누가 봐도 질이 확 다른 웃음이다.
“아나스타샤. 빈우를 부탁한다.”
“네, 타이 소령님. 제가 반드시 주인님을 본래 모습으로 돌려놓겠어요.”
본래 모습, 이란 말에 마커스는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다시 한번 더 되뇌었다. 빈우가 원래의 외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과연 빈우일까, 싶은 것이다. 오히려 그의 내면이 어떻게 되어있을까가 더 걱정되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가 들어오길 원하고 있었다. 마커스의 비서인 크산티페였다.
“아룹 부팀장, 그녀는 제 비서입니다. 아마 아까 제가 명령한 건에 대해서 대답을 들고 온 모양입니다.”
아룹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온 크산티페는 간단하게 말을 전했다.
“차장님. 말씀하신 건에 대해서 조사해 봤습니다. 차장님께서 예상하신 대로였습니다.”
“흐으음.”
그녀의 말을 들은 마커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빈우를 흘깃 보았다. 아마 빈우와도 관계된 정보일 것이다.
“말하지 마. 내가 확실하게 깨끗해지거든 그때 말해.”
빈우는 아직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 조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