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두뇌칩의 정보가 없었으면 누가 누군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대화는 대개 마커스와 아나스타샤에게 집중되었고, 아룹과 파트리샤는 가끔씩 들어오는 질문에 그저 착한 부하임을 연기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일단 이런 경우에는 연방이 보상을 해주기로 되어있어. 새로운 행성을 찾아서 개척하자. 나도 군에 연줄이 있으니까 좀 알아볼게. 잘 될 거야.”
빈우의 모습을 한 마커스의 제안에 누나와 동생들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그녀들은 고향을 잃어버렸다. 몇몇은 슬퍼하고 있고, 누구는 망연자실해 하고 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름 빈우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마커스 오빠는? 마커스 오빠는 왜 아무런 연락이 없어?”
나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빈우 너랑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이제까지는 가끔이지만 그래도 안부 연락은 했잖아. 근데 이런 일이 있었는데 왜 연락 한 번 안 오지? 정말로 너무한다, 너무해.”
이어지는 규리의 푸념에 예리가 나서서 마커스를 두둔한다.
“아유, 규리야. 마커스 씨는 정보부 차장이잖아. 지금 한창 바쁠 텐데 우리한테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어? 안 그래, 빈우야?”
당사자인 마커스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다.
“그 새끼 원래 그런 놈이야.”
그의 농담에 자매들 사이에서 픽하니 웃음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그때 조금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우 이 새끼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연락 안 하긴 매한가지잖아. 아나스타샤가 농장 관리 다 하고. 얼굴 보기 힘들다. 너 우리가 그렇게 싫니?”
중년의 누나인 다리가 빈우에게 핀잔을 준다.
“왜 싫어? 근데 나도 언제까지나 누나 동생한테 둘러싸여 살 순 없잖아.”
“어머어머, 저 새끼 나불대는 것 좀 봐. 아나스타샤, 쟤 좀 때려.”
“네? 아니. 그게….”
아나스타샤가 마커스의 뒷통수를 보며 머뭇거리자, 화면 너머의 여장부들이 우- 하고 야유를 했다.
“하이고야, 지가 젖 먹여 키운 놈이라고 못 때리겠다네. 빈우는 좋겠네.”
“뭐야아. 나도 아샤 젖 먹고 자랐다고.”
“나리 이년아. 넌 하도 안 먹어서 분유 먹었잖니.”
“아니에요, 나리 아가씨도 잘 드셨어요. 제 젖이 모자라서 분유 드신 거였어요.”
“엄멈머! 그 큰 가슴에서 젖이 모자랐다고?”
“그게, 안드로이드는 유선 효율이 안 좋아서 크기가 좀 컸습니다.”
“그러니까 순정을 사야 해. 순정 봐봐, 색깔도 분홍이고 얼마나 이뻐.”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좀체 가라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누나, 나 미안한데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그 소란에 어렵사리 마커스가 끼어들자 자매들의 얼굴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가득 찼다.
“에휴, 그래 이놈아. 피자 좀 작작 열심히 만들고. 연락 좀 해.”
“응, 안 할래.”
“허이구, 버르장머리하고는. 딸랑 하나 있는 남자애라고 오냐오냐 길렀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오셔?”
자매들과 마커스의 대화가 인사로 마무리될 때쯤, 막내인 나리가 나서서 인사했다.
“우리 오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고향과 농장을 잃은 그녀는 아룹과 파트리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도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이다.
화면이 꺼지자 마커스는 변형된 외모를 원래대로 바꾸며 돌아앉았다. 그러면서 본래의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제 친구의 무사함을 그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데 협조해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아뇨, 저희들로서도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룹 또한 미소로 답했다.
“우후후, 속이는 게 아니면 더 뜻깊었겠지만 말이에요.”
파트리샤 역시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대할 할 뿐이다. 그녀는 대충 감 잡았다. 이 사람은 빈우와는 다르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진다. 그뿐이다. 애초에 아룹과 파트리샤를 이용대상으로 보았지, 거래나 교섭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저기 근데….”
파트리샤가 다시 슬금슬금 말을 꺼낼 기세다. 하지만 아룹은 그냥 잠자코 있었다.
“빈우의 자매들은 모두 어머니의 단성생식으로 태어난 클론들입니다.”
마커스는 그녀의 질문이 뭔지 예측했는지 파트리샤가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엑, 잠깐만요. 클론이라고요?”
뜻밖의 사실에 파트리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네, 정확히는 자신의 난자에 자신의 핵을 수정시킨 다음 다시 자신의 자궁에 주입해 클론을 낳은 거죠. 노동력이 필요한 농업 행성에서 인간의 난자를 써서 인간의 자궁으로 태어난 것이니 어찌어찌 합법입니다.”
마커스가 죽은 빈우의 어머니 사진을 띄웠다. 역시나 빈우의 자매들과 똑같은 얼굴이다.
“자신의 난자를 수정한다고 해도 변화가 가능할 텐데요? 빈우의 어머니가 딸들을 전부 자신의 클론으로 낳았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남자인 팀장님은 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난 겁니까?”
이번에는 아룹이 물어본다. 하지만 마커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빈우도 자기 엄마의 단성생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다만 조작이 조금 가해졌죠.”
뜻하지 않게 빈우의 출생에 대한 정보를 접한 파트리샤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룹은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긴 뭐, 말씀대로 불법은 아니지요. 하지만 좀 놀랍긴 합니다. 아직도 그런 출산을 하다니요. 자치행성이라면 모를까, 과전은 직할령 아닙니까?”
“사람 사는 곳은 백인백색이죠.”
마커스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빈우의 신상정보를 띄웠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군사정보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치명적인 정보들이다. 도구로서의 장점과 단점 외에도 유사시의 처리방안에 대해서도 적혀있었다. 그중 한 항목을 마커스가 지목했다.
“덧붙여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빈우가 울토르 프로젝트에 선발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커스가 가리킨 곳은 파트리샤와 아룹의 눈으로는 인식하거나 해독할 수 없었다.
“시스터 콤플렉스?”
일부러 엄한 답을 내놓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파트리샤에게 마커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유전적 결함.”
상당히 불길한 단어의 등장에 373 팀원 두 사람의 안색이 조금 불쾌하게 바뀐다. 파트리샤가 힐긋 아나스타샤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정란을 남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작을 가하다가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의일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리 큰 결함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아나스타샤가 치료용 모유를 먹였기에 문제 될 건 없었고, 사관학교에 들어와서는 강화 시술을 받으며 치료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마커스는 화면상의 모자이크를 쿡쿡 찌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녀석과 울토르 클론들은 유전적 결함이 있어요. 스위치 하나면 폭발할 수 있는 미세한 틈이 말이지요.”
다시 파트리샤가 뭐라고 할 때, 이번엔 아룹이 나섰다.
“그럼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아룹은 온화한 표정이지만, 파트리샤는 부팀장이 저런 얼굴을 하고도 무슨 짓을 할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저도 말렸습니다. 하지만 이걸 오히려 무기로 만들어 가져다 바친 것은 빈우입니다.”
파트리샤와 아룹이 반신반의할 때, 마커스가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나스나샤, 대신 설명 좀 해주겠어?”
“네, 타이 소령님. 제 주인님은 어려서부터 단백질 분해에 관련된 대사질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당 질환자 치료용 수유 모듈을 달고 치료했습니다. 꾸준히 치료한 결과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타이 소령님 말씀대로 군에서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인님은 울토르 프로젝트에 들어간 다음, 자신의 결함 유전자를 찾아내 복원한 다음 거기에 가공을 했습니다. 그 결과 주인님과 클론들은 일정 시간 동안 군용 식량을 먹지 못하면 소화에 지장이 옵니다. 가령 일주일 이상 군용 식량이나 마카롱 같은 것을 드시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식사를 흡수할 수 없으세요. 민간용 에너지팩 주입도요.”
소화에 지장이 온다, 라는 이야기는 일반인이라면 그냥 그렇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군용강화를 한 군인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이들은 육체를 강화한 만큼 하루에 소비할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외부에서 꾸준히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에너지 부족으로 굶어 죽을 수 있다. 물론 그전에 신체 모드가 절약으로 바뀌겠지만, 빈우의 경우는 스스로 족쇄를 만들어 진상한 셈이다. 참고로 군용 식량이나 군용 에너지 팩은 오직 군에서만 구할 수 있다. 민수용은 있긴 하지만 적당히 조정해서 판매하기 때문에 진짜 군용 식량은 오직 연방의 군인 신분으로만 먹을 수 있다.
“조온나 더러운 충성서약이네요. 밥뚜껑에 자물쇠를 쳐달아 갖다 바쳐야 사람대접하나? 그동넨?”
이제 파트리샤는 대놓고 틱틱거린다.
“이런 게, 통과되는 겁니까? 군사정보국에서는요?”
아룹조차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마커스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저도 말렸습니다?”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확인시키는 듯한 어투다. 물론 당사자인 빈우가 밀어붙인 것이라면 말릴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마치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마커스의 저 태도가 파트리샤와 아룹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런 두 사람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지금까지의 언동을 보면 알 확률이 높지만-마커스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뭐어, 아룹 부팀장은 빈우에게 그런 조언을 들었고, 그런 비밀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으니 꽤나 신임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룹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마커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만 빈우와 저는 친구이자, 협력 관계입니다. 저는 빈우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이지만, 저 또한 제 할 일은 해야지요.”
파트리샤의 눈썹이 모로 휘는 게 딱히 좋은 예감은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저는 조만간 군사정보국을 그만둘 예정입니다.”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라 아룹과 파트리샤는 뭐라 반응하지 못했다.
“이번에 국방부에 차관 자리가 하나 났다고 합니다. 샤다이의 준동과 뻐꾸기 작전에 관련되어 사무차관 쪽에 경험과 실력 있는 고급장교를 원한다는군요.”
연방에서 각 부서의 장이 되는 장관을 보좌할 차관은 정무차관과 사무차관이 있다. 이중 정무차관은 보통 의회에서 파견되고, 사무차관은 해당 부서의 실무진이 담당한다. 다만 국방부에선 외계 종족과의 전투가 심화될 경우, 사무차관을 군에서 데려오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일로 미뤄보아 군사정보국에서 차장까지 했던 마커스라면 사무차관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현재 국방부 차관은 제이크 타이… 였죠.”
아룹의 말에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제 아버집니다.”
그 말에 아룹이 끙하는 소리를 냈다. 제이크 타이의 아내인 아만다 타이는 복합 군수산업체인 볼터 사의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마커스는 뼈대 굵은 금수저인 셈이다.
문제는 마커스가 국방부로 가버리면 빈우는 끈 떨어진 연이 된다는 것이다. 군사정보국 차장보다야 국방부 차관이 훨씬 높은 자리긴 하지만-사무차관의 경우 유사시 장관직무 대행을 하기 때문에 대장 대우다.-먼 곳의 사자보다 가까운 곳의 늑대가 더 무서운 법이다. 지금 군사정보국의 차장으로서 군사정보국 파견 요원인 빈우를 막아주던 우산, 마커스가 자리를 비우면 빈우는 어찌 손쓸 틈도 없이 당하고 만다.
“잠깐만요. 그럼 우리 팀장님은요?”
“빈우는 제 친구니까 제 맘을 이해해 줄 겁니다. 그래도 아쉽군요. 국장까지 해먹어 보고 싶었지만 바로 앞인 차장에서 멈추다니. 하지만 앞으로 빈우의 도움이 없으면 그 이노우에 고토와의 싸움에는 승산이 없으니 이쯤에서 빠지는 게 정답이겠죠.”
아룹과 파트리샤는 이제야 알아챘다. 빈우와 마커스는 닮았지만 다르다.
빈우에게 군이란 자신의 이상을 위해 가는 길이다. 어쩌면 그 이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헌신한다. 하지만 마커스에게 군이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도구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는 연방의 군인인 빈우에게 친구일지 몰라도 군이란 조직에는 충성하지 않는다. 그것이 뼛속까지 군인인 아룹과 파트리샤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게 했다.